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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33화 (30/229)

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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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의 소동으로 식당 칸은 한 산했다.

다른 승객들은 겁을 먹은 모양인지, 모두 객실에 틀어박혀 있다고 엔지가 슬쩍 귀띔해 주었다.

"이것도 먹어요.”

줄리엣은 먹성 좋게 그릇을 비우는 로이를 구경하다가 제 몫의 달걀 요리가 담긴 접시를 밀어주었다.

로이는 당연하다는 듯 줄리엣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었고,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치고 홍차를 즐길 때까지도 식당 칸은 텅 비어 있었다.

덕분에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즐기는 것은 그들뿐이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요?”

“그 사람들?”

“로이를 납치했던 사람들이요."

"아.”

로이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음…… 글쎄요.”

로이는 빙그레 웃었다.

“키탄다른 사람들이 데려가서 묶어 뒀어요. 그 다음은 모르겠지만요.”

하긴. 달리는 열차에서는 도망갈 곳도 없겠다.

줄리엣은 딱히 남 일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이런 남자가 왜 납치당했는지는 꽤 궁금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어요?”

“사람들이요?”

줄리엣은 부연하는 대신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로이가 알아들었다는 듯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키탄이 화를 냈거든요."

줄리엣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어제 로이를 데리러 왔던 사람들 중, 그 불곰같이 커다란 아저씨 이름이 키탄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줄리엣을 볼 때마다 무시무시하고 불쾌한 표정을 짓곤 해서, 줄리엣은 꽤나 그가 거북했다.

"왜요?”

“내가 돌아가지 않겠다고 해서요.”

심하게 축약된 말이었지만 줄리 엣은 이번에도 알아들었다. 그리고 좀 황당한 기분이 되어서 그를 위아래로 다시 훑어보았다.

'아하, 그러니까 가출 청소년이셨어?'

그렇게 생각하니 앞뒤가 들어맞았다.

‘로이 님’이라며 그를 찾으려 부산을 떨던 키탄과 그 무리가 생각났다. 첫인상과는 달리, 아무래도 귀한 집 도련님이신 모양이었다.

“왜 돌아가기 싫은데요?”

“셋째 형 목을 부러뜨렸거든요.”

“…… 형이 있어요?"

산뜻한 대답에 줄리엣은 조금 당황했지만 가까스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심지어 셋째형이라니, 대가족의 귀한 막내 도련님인 걸까.

끄덕끄덕.

로이는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줄리엣의 눈치를 살폈지만 줄리 엣은 당황을 수습하느라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그럼 얘는 몇 살인 거지?

스무 살?'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얼굴에 정신이 팔려 몰랐는데, 로이는 어딘지 소년 같은 구석이 있었다.

"음,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부모님도 걱정하실 테고…….”

부모님이 엄하신가 보다. 남 일이라 줄리엣은 적당히 좋게 말했다.

“줄리엣은.”

“으응?”

“내가……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그런 걸 왜 나한테 물어?

줄리엣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줄리엣은 자신이 타인에게 그렇게 다정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자신의 삶만 감당하기에도 벅찼다.

‘하지만 어린애잖아.'

그리고 머리핀도 찾아 줬고, 눈이 즐거울 정도로 잘생겼고 착한 애 같았다. 첫인상은 그리 좋지 못했지만.

그러니까, 모처럼 상냥하게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음, 형이랑은 왜 싸웠는데요?"

"갖고싶은 게 있는데… 제가 가지지 못한 걸 놀려서요.”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가지면 되잖아요?”

“.....…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네. 그리고 집에도 돌아가고요.”

어차피 가출 청소년에게 해 줄 말은 하나뿐 아닌가.

'부모님 걱정시키지 말고 집에 가서 형들이랑 화해하세요, 도련님.'

줄리엣은 인심 써서 상냥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맞은편에서 그녀를 유심히 관찰하던 로이가 활짝 웃었다.

“네, 그럼 그렇게 할게요."

줄리엣은 자신이 무심코 건넨말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이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열차의 종착역은 동부에서 가장 큰 성, 아키텐이었다.

원래 줄리엣의 목적지 역시 그곳이었다. 동부 관문이라고 하면 흔히 아키텐을 가리켰으니까.

하지만 한바탕 난리를 겪은 승객들 중에는 한시도 이 열차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열차가 중간 역인 로아델에 도착하자, 질린 얼굴의 승객들과 부상자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리고 줄리엣 역시 그 인파에 섞여 있었다.

“부상자! 부상자 이쪽으로!”

다른 승객들은 짐을 내리느니 환자를 챙기느니 부산을 떨었다.

짐이라곤 가벼운 여행 가방 하나가 전부였던 줄리엣은 유유히 혼잡한 역을 빠져나왔다.

망가진 베일을 버린 그녀는 역사를 나와 얼마쯤 걷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열차가 막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멈춰 서서 손차양을 한 채 멀어지는 차체를 구경하던 줄리엣은 중얼거렸다.

“왠지 좀 미안하네.”

인사도 없이 이별이라서.

하지만 생각해 보면, 딱히 인사를 주고받을 만한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아, 그래도 그 호박색 눈은 정말 예뻤다.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으면 홀랑 넘어가서 간도 쓸 개도 빼 줄 것처럼 위험했다.

하지만 본능이란 건 무시하면 안 된다.

'아마 수인족이겠지.'

그런 촉이 왔다.

물론 줄곧 줄리엣에게는 주인 앞에서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유순하고 착한 척 굴었다.

하지만 대뜸 커다란 남자가 살갑게 군다고 경계를 허물 수 있을 리가.

줄리엣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가장 껄끄러운 건 바로 그거였다. 환술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것.

(저것. 기분 나빠.)

본래 나비들이 흥분하면 말을 알아듣기 힘들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나비들은 또박또박 불쾌감을 표시했다.

애석하게도 줄리엣은 그 의견에 동의했다.

게다가 수상쩍은 구석도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분명 늑대일 때는 아무 제한이 없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나비들을 불러내 그를 풀어 주는 그 모든 과정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 직후, 인간 모습일때는 그럴 수 없었다. 나비들이 역소환당하고, 강하게 거부감을 나타낼 만큼,

'그래서 괜히 헷갈리기만 하고.’

줄리엣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처음에는 그 커다란 늑대와 수상한 남자를 쉽사리 연결 짓지 못했다.

라이칸슬로프, 흔히 웨어울프라고도 불리는 그 종족은 고고하기로 유명해서, 줄리엣 역시 두번의 삶을 사는 동안 직접 본것은 처음이었다.

소드마스터인지 고위사제인지.

정체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꺼림칙한 상대였다.

그러니까,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사양입니다.

'뭐,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알아서 집 잘 찾아 가겠지.’

그를 구하러 온 다른 사람도 잔뜩 있었고 말이다. 줄리엣은 발길을 돌렸다.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다시.

덜컹덜컹.

로이는 문가를 짚고 선 채 텅비어 버린 객실 안을 바라보았다.

창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누가 쓰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잘 정돈된 상태였다.

“로이 님.”

어느새 뒤쪽에서 나타난 키탄이 그의 상념을 방해했다.

“이만 가셔야 합니다.”

충성스러운 키탄은 조금 재촉하듯 말했지만 로이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키탄이 악취에 인상을 구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키탄은 훌륭한 숲의 일족이었다. 인간보다 수십 배는 예민한 감각을 가진 그들로서는 이곳에서 나는 악취를 더 이상 견디기어려울 터다.

인간이란 것들은 본래 그렇다.

어딜 가나 악취를 남기고 자비롭고 위대한 일족의 혐오를 불러일으킨다.

정말이지, 조금의 동정도 받을 자격이 없는 비열하고 어리석은 종이다.

로미오 바스칼은 어제까지만 해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 자비를 베풀 가치도 없고 살려 둘이유도 없노라고.

하지만 불과 몇 시간 전, 그는 처음으로 역겹지 않은 인간을 만났다.

분명 인간은 맞는데 체향이 역하기는커녕 견딜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당장 흰 목덜미에 이를 박아넣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유혹적인 체향이었다.

그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숲의 일족이라면 누구나 이 현상의 의미를 안다.

로이는 아무것도 없는 빈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가볍게 손을 쥐었다 폈다.

일족 내에서 그는 반쪽짜리 취급을 받았다. 유일하게 개화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들 중 가장 어리고 가장 강했다. 그의 형제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아버지는 그를 배척했다.

개화를 하면 반려를 만날 수 있다. 각인하는 상대를 만나는 것은 일족이라면 누구나 고대하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로이는 그게 멍청한 짓이라고만 생각했다. 개화니 반려, 각인 같은 것들은 모두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기분이었군.”

로이는 빙그레 웃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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