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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32화 (29/229)

32화.

**

칼라일 공작과 황제의 독대는 채 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접견실 밖에서 대기하던 엘리엇은 밖으로 나온 공작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자신의 주인과 황제가 짧은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얘기를 한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대화 내용을 묻기도 전에, 엘리엇은 문득 공작이 웬 장식품 하나를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것은 날개를 반쯤 편 비둘기 모양의 은 세공품이었다.

꽤나 깜찍한 그것은 크고 모양좋은 주인의 손에 어울리는 듯도, 어색한 듯도 했다.

'어라, 전하께 저런 물건이 있었나?’

엘리엇은 고개를 갸웃했다.

황제의 하사품일까? 어쩐지 낯익은 것도 같고.

그러나 엘리엇이 묻기도 전에 칼라일 공작이 먼저 그를 불렀다.

"엘리엇.”

"예, 전하.”

“기사들을 데리고 북부로 돌아가라. 그리고 돌아가자마자 예식 준비를 하도록.”

“예?”

엘리엇은 한 박자 늦게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일행을 챙겨 북부로 돌아가라는 말은 칼라일 공작은 함께 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예식이라니? 무슨식?

엘리엇은 일단 가장 궁금한 것부터 차례로 묻기로 했다.

“그럼, 전하께서는……?”

“나는.”

어느새 궁 밖으로 나온 레녹스칼라일은 검은 말에 가볍게 올라 타 고삐를 쥐고는 담담히 말했다.

“내 신부님을 모셔 와야지.”

**

'아.’

줄리엣은 푹신한 침상 위에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엄습하는 근육통에 줄리엣은 조금 놀랐다. 온몸이 다 아팠다. 왜 이렇게 뼈마디가 아픈가 하고 생각해 봤더니…….

어제의 일이 생각났다.

“맞아, 그랬지…….”

커다란 늑대도 보고, 좀 이상한 승객들도 만나고, 칼부림 나는 것도 보고…….

오랜만에 정신 사나운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몸을 혹사한 덕분이었다.

줄리엣은 끙끙거리며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런 줄리엣을 반긴 것은 언제 들어도 달갑지 않은 목소리들이었다.

(떴어. 눈.)

(주인. 인사. 아침.)

나비들은 살랑거리며 침실 안을 날아다니는 걸로도 모자라 심지어 인간 흉내를 내듯 무려 '아침 인사'를 했다.

기분 탓인가. 줄리엣은 저것들이 점점 더 능숙하게 인간을 흉내 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그래. 안녕.”

받아 주지 않으면 잔뜩 토라져서 더 성가셔질 게 뻔했으므로, 줄리엣은 대충 인사를 받아 주었다.

(안. 녕?)

(안녕. 아침.)

그랬더니 줄리엣이 물을 마시는 사이, 더욱 신이 난 듯 저희들끼리 새로 배운 단어를 열심히 종알거렸다.

정말이지, 툭하면 토라지는 것이 다섯 살짜리 어린애가 따로 없었다.

'본체는 차원 너머의 위대하신 존재라며?’

줄리엣은 가끔 헷갈렸다.

다른 정령들도 이 모양인 걸까?

어쨌든 오늘 아침부터 서툰 말솜씨로 줄리엣에게 말을 붙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재잘대는 나비들은 꽤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른 아침 햇살을 받아 푸르스름한 날개가 평소보다도 신묘한 빛깔로 반짝였다.

'그럴 만도 하지.’

침상을 정리하는 동안 줄리엣은 기운이 넘치는 나비들을 힐끔거렸다.

'어제 그 포식을 했으니.'

잔뜩 포식한 덕분인지 평소보다.

빛깔이 더 짙고 선명했다.

'또 제멋대로 튀어나온 건 물론이고 말이지.’

줄리엣은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나비들이 그녀의 허락 없이도 멋대로 튀어나오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는 게,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줄리엣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비들은 열린 창가 근처를 서성이며 정신 사납게 방해했다.

줄리엣은 마물들의 기분이 좋아진 이유를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어제 오랜만에 실컷 배를 불린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공작의 곁을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확실한 이유는 모르지만, 이 마물은 레녹스 칼라일을 싫어했다.

'정확히는 무서워해야 한다고 하나.’

왜 싫어하느냐고 물어보면 어물어물 대답을 회피하거나 입을 꾹다물어 버려서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러했다.

그런 점까지 총체적으로 다섯살 어린애 같았다. 한번은 작정하고 집요하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이 무서워?”

언제나처럼 침묵으로 일관하던 줄리엣이 거듭 묻자 나비들은 꼭 토라진 것처럼 불퉁거리며 마지못해 대답을 내놓았다.

(싫어. 인간, 그림자, 그것.

넘었다. 사냥개, 경계. 먼저.)

(배신자. 고양이)

(계약자. 괜찮아. 좋아.)

……역시나 무슨 말인지 해석할 수 없는 모호한 대답이었다. 심지어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도 있었다.

이 마물이 칼라일 공작을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급한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

나비들은 그렇게 대답해 놓고는 언제나처럼 말했다.

(인간, 싫어. 괜찮다. 너만, (우리 계약자. 좋다. 너도?)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아첨하듯 맺었다.

애교를 부리는 것으로 대화를 끝어쨌든 그 덕분에 레녹스가 이 따금씩 줄리엣의 신체에 그의 마력을 흘려보낸 다음 날이면, 한동안 나비들은 절대 멋대로 튀어 나오거나 평소처럼 재잘대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편했던 건데….

(주인, 피곤?)

(조용? 피곤?)

(계약자? 아파?)

(? ?)

줄리엣은 이제 저 수다쟁이들을 어떻게 감당하나 하고 한숨을 내쉬며 객실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다 문 바로 앞에 기대 앉아 있는 은회색 머리칼의 남자를 발견하고 눈을 깜박였다.

“… 로이?"

“아.”

복도에 거의 구겨져 있던 것 같은 자세의 남자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쓸데없이 놀랍도록 민첩한 동작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사람처럼, 로이는 줄리엣과 마주섰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동작이 춤동작처럼 자연스러워서 줄리엣은 박수라도 쳐야 하나 생각했다.

“줄리엣.”

샛노란 호박색 눈이 놀란 듯 크게 뜨였다.

줄리엣은 민망해서 조금 웃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이 괜히 멋쩍었다.

로이라고 불러 달라고 해서 다행이지, 만약 로미오로 불러야 했다면 그녀는 그만 수치사 했을 것이다.

“여기서 뭐해요?"

……설마 밤새 여기서 이러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묻는 것과 동시에 의구심이 들었다.

“그게...”

로이는 대답에 앞서 헝클어진 뒷머리를 정리했다. 그 사이 줄리엣은 그를 느긋하게 훑어보았다.

다행히 오늘은 정상적인 옷차림이었다. 올려다보기 목이 살짝 아플 정도라 줄리엣은 반걸음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

“이거요.”

그러나 그녀가 물러나기도 직전에, 타이밍도 공교롭게 로이의 손이 줄리엣의 손을 붙잡았다.

로이가 불쑥 손에 들려 준 것을 본 줄리엣은 잠시 눈을 깜박였다.

전날, 객실에서 넘어지면서 떨어뜨렸던 줄리엣의 머리핀 중 하나였다. 하나는 바로 찾았지만, 다른 하나는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어디서 찾았어요? 이거 주려고 기다렸어요?”

끄덕끄덕.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순식간에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뭔가…... 우리 로로 같네.'

다섯 살 때 키우던 강아지가 생각났다.

줄리엣만 보면 꼬리를 맹렬히 흔들던 회색 강아지.

훤칠한 키에 걸맞지 않게 반짝 반짝 눈을 빛내는 로이를 보면서 줄리엣은 어쩐지 열심히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를 떠올리곤 미묘해졌다.

(.....)

아.

줄리엣은 순간 어떤 생각이 들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열린 그녀의 객실 문 너머로 창가에 내려앉아 미동도 하지 않는 나비가 보였다.

'맞다, 그랬지.'

소드마스터인지, 고위 사제인지는 몰라도 로이 역시 나비들의 환술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줄리엣은 잠시 생각하다가 로이의 손등을 가리켰다.

“그거, 아프진 않아요?”

로이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의 손등에 기다랗게 상처가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줄리엣은 저도 모르게 놀라서 그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

“핥으면 안 돼!”

그가 지나치게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손등을 핥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덧나요!”

“덧?"

“그러니까 세균 감염이-."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자니 뭘 말하는 소용없을 것 같았다.

'됐다. 말을 말아야지.'

"…안으로 들어와요.”

“네.”

로이는 기웃기웃 하면서도 순순히 줄리엣이 시키는 대로 객실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거기 앉아요.”

“네.”

“손 이리 주고요.”

“네.”

유순한 강아지처럼 로이는 잘도 대답했다.

‘말 잘 듣네..'

줄리엣은 그의 얼굴을 힐끔 곁눈질했다. 소독약을 들이붓는데도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따가울 텐데..'

줄리엣은 치덕치덕 소독약을 들이부은 다음 대충 붕대로 칭칭감아 버렸다.

“다 됐어요.”

다소 성의 없는 응급 처치에도 로이는 항의는커녕 줄리엣이 감아 준 붕대가 신기한지 계속 만지작거렸다.

"자꾸 만지지 말아요.”

대충 묶어 놓은 엉성한 매듭이 신경 쓰여서 그렇게 말했더니, 로이는 정말로 다시는 매듭을 건드리지 않았다.

“네.”

생글생글 예쁘게도 웃는 얼굴을 보며 줄리엣은 조금 묘한 기분이 되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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