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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31화 (28/229)

31화.

“제가 방금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이렇게 다시 보니까 워낙 반가워서 ….….”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하던 줄리 엣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반갑다고?

오늘 난생처음 보는 얼굴인데.

대체 뭐가 반갑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역시 다시 봐도 모르는 얼굴이다.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거리에서 우연히 스치기라도 하면 10년은 족히 잊기 어려운 미남자였다.

레녹스 칼라일의 연인으로 살면서 눈이 높아진 덕분에 웬만큼 잘생긴 남자는 쳐주지도 않는 줄리엣의 까다로운 기준으로 봐도 인정할 만큼 잘생겼다.

……그렇지만 이제 슬슬 그만해 줬으면 좋겠는데.

줄리엣은 힐끔 주변을 곁눈질했다.

열차 내의 난투극은 얼추 정리 된 모양이었다.

“로이 님!”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커다란 체격의 장년 남자를 비롯해서 그를 구하러 온 듯한 사람들 대부분이 어느새 옆에 우르르 몰려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이 못마땅하다는 듯 줄리엣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사람들이 찾으러 온 '로이 님은 이 남자가 맞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구출대상이 이상한 여자에게 대뜸 무릎 꿇고 사과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고, 그럼 아까 그 늑대는 대체 뭐였을까?

'그 늑대가 로이 님이 아니었단 말이야?'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줄리엣은 주변을 대충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까의 그 집채만 한 늑대는 어딜 간 건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열 칸짜리 열차라지만 그 정도 크기의 늑대라면, 그런 존재감이라면 설령 다른 칸으로 건너갔어도 이렇게까지 조용하진 않을 텐데.

줄리엣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어디 다친곳은……?”

줄리엣과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그 즉시 반사적으로 사과했다.

어째 적당히 받아 주지 않으면 밤새 이러고 있을 기세였다.

게다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선하게 잘생긴 얼굴이라, 어쩐지 화내기 어려운 상대였다.

줄리엣은 눈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조용히 타일렀다.

“....…알겠으니까 이제 옷 좀 입어요.”

“예?”

"크흠.”

그들의 뒤에 서 있던 장년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남자의 어깨에 긴 겉옷을 걸쳐 주었다.

장년 남자는 맨 처음 줄리엣이 식당 칸에서 스치듯 보고 감탄했던 그 거구의 남자였다.

은회색 머리칼의 청년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단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줄리엣이 지적한 대로 겉옷을 받아 어깨에 걸쳤다.

서글서글한 금빛 눈이 또다시 줄리엣을 향했다.

또다시 그 입에서 사과의 말이 나오기 전에 줄리엣이 재빨리 선수 쳤다.

"나 알아요?”

“네?”

“아까 그랬잖아요. 나보고 반갑다고.”

"아, 그건…….”

남자는 조금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나는 그쪽 같은 사람 모르겠거든요.”

"아.”

유순하게 눈을 몇 번 깜박이던 남자가 갑자기 씩 웃었다. 언제 그녀 앞에서 절절맸냐는 듯, 놀라울 만큼 매력적인 미소였다.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아가씨."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자연스럽게 줄리엣의 손끝을 붙잡고 그녀의 손등에 가벼이 입 맞줬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에 에줄리엣은 조금 놀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남자의 이름을 들은 줄리엣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 이름은 로미오 로물루스 바스칼. 그냥 로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잠시 후.

조용한 열차 안에 줄리엣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줄리엣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니. 유모가 옛날에 들려줬던 로맨스 소설에나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이름같지 않은가.

“어울리지 않게 고풍스러운 이름이죠. 저도 잘 압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던 로이는 이내 씩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웃으시면 제가 상당히 쑥스러운데요.”

“아니, 미안해요. 그게 아니라…….”

줄리엣은 애써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꾹 참았다.

그의 뒤편에 서 있던 사람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지만 한번 터진 웃음은 참기 어려웠다.

이렇게 유쾌하게 웃는 것이 얼마 만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하지만 뭐라고 설명하든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그래서 한참 만에 웃음을 그친 그녀는 그냥 환하게 미소 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줄리엣이에요.”

**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아침에, 한 남자가 황제의 궁을 향해 다급히 걷고 있었다.

금발의 청년은 2황자 클로프였다.

황제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 데, 클로프는 셋 중 가장 유능하다 평가받는 둘째 아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황태자로 책봉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이야기했다.

클로프의 걸음은 다소 들떠 있었다.

2황자인 그가 이런 이른 시각에 아버지인 황제를 찾아온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드디어..'

황실에 대한 존경이라곤 모르는 눈엣가시 같은 칼라일 공작이었지만 공작가에 세작을 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칼라일 공작은 오직 신임할 수 있는 사람만을 가까이에 두었고 , 그의 측근들은 하나같이 충성심이 대단해서 돈으로 매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클로프는 어떻게든 칼라일 공작의 약점이 될 만한 정보를 캐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어젯밤.

드디어 칼라일 공작의 불온한 움직임을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제 밤, 레녹스 칼라일은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파트너를 끌고 연회장을 나가 버렸다.

황제를 향한 양해의 말 한마디 없는 것이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칼라일 공작이 대신전에 침입해 성물을 강탈해 갔답니다.”

클로프의 부하 하나가 공작의 행적을 추적하는 데 간신히 성공한 것이다.

뭐든 책잡을 거리를 벼르던 클로프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신전과의 사이가 나쁜 공작이니, 잘만 하면 이 일을 계기로 공작가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클로프는 이 기쁜 소식을 보고 하기 위해 동이 트자마자 아버지인 황제를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클로프는 황제의 알현실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춰야 했다.

클로프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경비병을 향해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비켜라. 당장 폐하를 뵈어야겠다.”

그러나 경비병은 비켜나지 않았다.

“선객이 계십니다, 황자님.”

선객?

클로프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침에 누가 황자인 그보다 먼저 황제를 알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 의문의 답은 그의 뒤에서 나타났다.

등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클로프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태연히 걸어오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공작?”

클로프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가 소식을 가져온 바로 그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레녹스 칼라일.

신분을 증명할 만한 장신구는커녕 검소해 보이기까지 한 옷차림이었지만 결코 잘못 볼 수 없는 남자였다.

알현실 앞에 선 클로프를 발견한 칼라일 공작의 시선에는 눈인사는커녕 조금의 존경도 없었다.

황실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유일한 공작가.

그러나 황실보다 역사가 긴 칼라일 가문은 제국의 초대 황제로부터 불가침 조약을 대가로 북부의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공작가임에도 그들이 황실에 고개를 조아리지 않고, 황족처럼 전하(Your Highness)라고 불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걸음걸이마저 육식 맹수를 연상시키는 남자는, 조금 전 클로프가 그랬던 것처럼 알현실 문 앞에 멈춰 섰다.

“열어.”

그러나 조금 전과는 달리 알현실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알현실 밖에 그대로 남겨진 클로프는 이를 악물었다.

**

신년 무도회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황궁에는 긴장된 공기가 감돌았다.

불청객이 무장한 기사들을 이끌고 황궁에 찾아온 것이다. 감히 황제와의 독대를 청한 남자는 북부의 공작이었다.

“.…… 칼라일 공작, 방금 뭐라고 했나?”

“저 결혼합니다.”

황제, 막시밀리안 2세는 의심이 많고 제법 이익을 따질 줄 아는 자였다.

칼라일 공작가는 제국과 황실에 양날의 검과 같은 존재였다.

공작이 거느린 강력한 군대가 꺼림칙할 때도 있지만 황실을 위협하거나 북부 영지를 떠나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든든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호수가 붉게 변하는 ‘징조가 나타나자마자 가장 먼저 칼라일 공작을 부른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만약 다가올 재앙이 이민족의 침입 같은 거라면 공작가의 군사력이 필요할 테니까.

그러나 황제의 생각과 달리, 레녹스 칼라일이 황궁을 찾은 것은 황제의 부름에 응해서가 아니었다.

황제는 건너편에 앉은 레녹스칼라일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이번 대의 칼라일 공작은 자신의 막내아들보다도 어린,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었다.

“축하하네. 상대는 어느 가문의 아가씨인가?”

황제는 긴장했다.

공작의 용건을 듣자마자 징조에 대한 걱정은 저 멀리로 밀려났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의 재앙보다는 눈앞의 칼라일 공작이 더 무서운 존재였다.

황제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칼라일 공작의 결혼 상대가 될 법한 대귀족 가문들의 이름을 떠올려보았다.

만일 공작가가 타국의 왕족이나 세력이 막강한 가문과 혼인 동맹을 맺으면 골치 아파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후보 가문들의 목록에 현재 그의 연인으로 알려진 모나 드 백작 영애의 이름은 없었다.

칼라일 공작의 아름다운 연인들은 유명했다.

그리고 공작이 그 연인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황제 역시 줄리엣 모나드가 공작 부인이 될 거라고는 믿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황실과 그 측근들은 가볍고 미래에 대한 기약 없는 관계를 선호하는 칼라일 공작의 여자관계를 은근히 반기기도 했다.

그런데 대뜸 결혼이라니. 그것도 하루아침에?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레녹스칼라일은 표정 없는 싸늘한 낯으로 황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다 불쑥 대답했다.

“폐하의 양녀입니다.”

"......?"

지나치게 태연한 칼라일 공작의 태도에 황제는 잠시 동안 '자신에게 정말 양녀가 있었던가?' 하고 착각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황제에게는 양녀는커녕 딸조차 없었다. 그는 아들만 셋인 것으로 유명했다.

“아니, 나한테 양녀가 어디있…….”

“오늘부터 줄리엣 모나드가 폐하의 양녀입니다.”

황제는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렸다.

그는 이 건방진 놈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레녹스 칼라일은 북부의 신전을 모조리 폐쇄해 버린 일로 신전에서 파문당한 상태였다.

그러니 그는 정식으로 신전에서 축복하는 결혼식을 올릴 수 없었다.

설령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한들 그 아이 역시 정식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결혼 상대가 종교의 수호자인 황실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신전은 황실의 결혼식이라면 무조건 성대히 축복을 내려 줘야 하는 암묵적인 의무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 새파랗게 어린 공작 녀석은 고작 완벽하고 흠잡을데 없는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황실을 이용할 작정이었다.

'……이런 오만방자한 놈을 봤나?'

거기에 천애 고아가 된 제 연인에게 흠잡을 데 없는 신분을 만들어 주겠다는 속셈까지.

아무리 칼라일 공작가의 세도가 하늘을 찌른다고 해도 고작 여자 하나를 위해 대놓고 황실을 이용하려 하다니.

당돌하다 못해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황제는 화를 낼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분노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서명하시죠.”

황제가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레녹스 칼라일은 미리 준비해 온 서류를 황제 앞에 태연히 밀어 놓았다.

그 바람에 황제는 화를 낼 타이 밍을 놓치고 말았다.

얼떨결에 눈앞의 서류를 들여다 본 황제가 경악했다.

[충성스러웠던 고 모나드 백작과 모나드 백작가의 유일 상속자인 줄리엣 로즈마리 모나드를 황실과의 우정과 그의 충정을 헤아려 황실에 입적한다.]

이런 미친 문장으로 시작한 그 완벽한 서류는 칼라일 공작가 소유의 사파이어 광산을 약혼 예물로 황실에 넘긴다는 내용으로 끝났다.

황제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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