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
줄리엣은 난생 처음 보는 거대한 늑대를 앞에 두고 눈을 깜빡였다.
크르르르.
천만다행으로 철창 안의 거대한 늑대는 온몸이 쇠사슬에 칭칭 묶인 채였다.
은회색 늑대는 처음 봤다.
아니, 이렇게 거대한 늑대가 존재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동부에는 마물이 득실거린다더니 이것도 그런 것들 중 하나일까?'
그렇다면 아주, 아주 진귀한 마물임이 분명했다.
아름다운 은회색 털은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가까이 가서 쓰다듬어 보고 싶을 정도로 탐스러웠다.
“흩어져서 찾아라!"
“!"
“로이 님! 어디 계십니까!”
……아무래도 바깥의 남자들이 찾는 것은 이 늑대인 것 같았다.
‘로이 님’이 설마 사람이 아니라 늑대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조금 혼란스러워진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쩌다 납치라도 당했니, 멍멍아?”
그르르릉.
거대한 늑대의 목에서 위협적인 울림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아무리 영물이라도 사람 말을 을알아듣진 못할 것이다.
어쩔까 잠시 고민하다가 줄리엣은 일단 원래 계획대로 하기로 했다.
“착하지, 멍멍아.”
늑대가 묶여 있는 모습을 찬찬히 관찰한 다음, 줄리엣은 조심스레 어두운 철창 쪽으로 손을 뻗었다.
“지금 풀어 줄 테니까……. 아무튼 날 잡아먹으면 안 돼. 알겠지?"
그렇게 다짐을 받으면서도 줄리 엣은 여차하면 도망칠 생각으로 퇴로를 확보하는 걸 잊지 않았다.
조심스레 다가간 줄리엣은 늑대가 어디에 어떻게 묶여 있는 구조인지 살폈다.
철창살 우리는 물론이고, 늑대의 전신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는 쇠사슬은 커다란 자물쇠로 몇 겹이고 잠겨 있었다.
"......?"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늑대의 목덜미에 박혀 있는 정체불명의 실린더였다.
유리 관 안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수상해 보이는 진홍색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뭐지?
늑대용 진정제 같은 건가?
꼭 커다란 주사기처럼 생긴 실린더가 늑대의 목덜미 언저리에 꽉 박혀 있는데, 그 모양이 꽤나 아파 보여서 줄리엣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건 손으로 뽑아야 할 것 같은데.'
줄리엣은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크릉.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늑대가 위협적으로 꿈틀거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쇠사슬에 칭칭묶여 있는 덕에 늑대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잠깐만… 잠깐만 그대로 있어. 착하지, 멍멍아?”
줄리엣은 간신히 손을 넣어 실린더를 단번에 뽑아냈다.
키앙!
늑대가 외마디 신음처럼 몸을 뒤틀었다.
열차 칸이 다 흔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줄리엣은 실린더를 놓치지 않았다. 뽑혀져 나온 것은 주사 바늘 같은 거였다.
“미안, 이제 아픈 거 안 할 테니까.”
줄리엣은 초조해져서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늑대를 묶고 있는 쇠사슬은 단순한 구속 도구가 아니었다. 뭔가 특수한 열쇠가 아니고서는 풀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줄리엣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는 작은 나비 서너 마리가 나타났다. 꼭 파란 반딧불처럼 보였다.
수상한 빛 덩어리의 등장에 놀란 듯, 늑대가 털을 곤두세웠다.
잠금장치 안으로 나비들이 모습을 감추자 순식간에 쇠사슬이 풀렸다.
철컥.
갑자기 몸을 옥죄고 있던 구속이 떨어져 나가자 늑대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황금빛 눈 한 쌍이 줄리엣을 의미심장하게 노려보았다.
'설마, 은혜도 모르는 짐승인 건 아니겠지?'
줄리엣은 살짝 긴장했지만 늑대는 다행히 그녀에게 달려들거나하지는 않았다.
그 이후로는 줄리엣이 더 도와줄 것도 없었다.
커다란 늑대가 한 번 가볍게 몸을 털어 내자마자 얽혀 있던 쇠사슬과 철창이 일제히 박살났다.
크르릉.
늑대는 한 번 기지개를 켜더니 열린 문을 통해 앞 칸으로 단숨에 뛰쳐나갔다.
***
늑대가 빠져나간 다음 줄리엣은 반대로 짐칸의 문을 닫았다.
바깥이 아수라장이니만큼, 역설적으로 열차 내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는 여기뿐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줄리엣은 100까지 센 다음에야 짐칸의 문을 열고 나왔다.
'이쯤이면 됐겠지.'
열차 안은 폭풍이 휩쓸고 간 듯 아수라장이었다.
그래도 칼부림하던 괴한들은 얼추 제압된 듯했다.
“꺄아악!”
그렇게 생각하며 객실을 세 개쯤 건너오던 찰나, 줄리엣은 구석에 몸을 웅크린 어느 모녀를 향해 칼을 번쩍 치켜드는 남자를 발견했다.
앞뒤 잴 것도 없이 손끝에서 나비 한 마리가 팔랑거리며 날아올 랐다.
그 순간이었다.
"비켜요!”
줄리엣은 균형을 잃었고 누군가에 의해 밀려 넘어졌다.
쿠당탕!
금빛.
갑자기 바닥으로 밀쳐진 줄리엣은 확 들이치는 햇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를 밀친 방해자는 상당히 근사한 외모의 젊은 청년이었다.
그녀를 보호하려는 목적이었겠지만.
“엄마아!"
다행히 때마침 우르르 몰려온 사람들이 모녀를 구해 냈다.
칼 든 괴한은 달아났다.
조금만 기다렸으면 끝장을 낼수 있었을 텐데 마지막 순간 집중이 흐트러져 환술이 깨져 버린 것이다.
쩡 하는 충격과 함께 줄리엣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줄리엣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의원인을 바로 깨달았다.
'소드마스터?’
이런 경우는 지난 7년간 딱 한번 경험했다. 환술이 통하지 않는 상대가 중간에 끼어든 때였다.
평소였다면 나비들이 그녀에게 경고했겠지만 잔뜩 흥분해 날뛰는 나비들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환술이 깨지자 나비들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환술이 중간에 깨진 피해는 고스란히 줄리엣에게 돌아왔다. 줄리엣은 머리가 깨지는 듯한 통증과 메스꺼움을 느꼈다.
"흐윽.”
"괜찮으십니까! 아가……."
졸지에 그녀를 바닥에 밀어 쓰러뜨린 불청객이 갑자기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왜?
입을 열면 내장이라도 튀어나올것 같은 느낌이었다.
줄리엣은 다급히 입을 틀어막고 자신을 방해한 자를 쏘아보았다.
덕분에 이 훼방꾼의 황금빛 눈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에게 밀려 넘어진 덕에 쓰고 있던 검은 베일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줄리엣은 그제야 이 달갑지 않은 불청객이 그녀의 위에 상당히 묘한 자세로 올라타 있음을 알아챘다.
눈이 마주친 남자는 상당히 빼어난 외모였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줄리엣 역시 호감을 품었을 정도로.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누가 봐도 반듯하게 잘생긴 청년이었다.
어쩐지 늑대처럼.
'……늑대?'
그러나 미남이고 뭐고, 환술을 방해받은 부작용으로 줄리엣은 상당히 심기가 날카로운 상태였다.
“비켜요.”
“예?”
“내 위에서 비키라고요!”
"아…… 예!”
황급히 물러난 남자가 죄송하다 느니 실례했다느니 사과의 말을 한 것 같았지만 남자를 밀쳐 낸 줄리엣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느라 듣지 않았다.
밀쳐질 때의 충격으로 긴 머리를 고정시켰던 머리핀 역시 날아가 있었다.
줄리엣은 휘청거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내 머리핀."
하지만 이내 얼마 가지 못하고 비틀거리면서 다시 바닥을 짚었다. 긴 머리칼이 치렁하게 흘러 내렸다.
입을 열면 왈칵 피라도 토할 것 같았다.
"레이디, 괜찮으십니까?”
가까이 다가온 손이 머리핀을 을대신 주워 내밀며 물었다.
'….…괜찮아 보이냐?'
대답할 상태가 아니라, 줄리엣은 겨우 의자에 기대 앉아 숨을 골랐다.
그런 그녀의 앞에 다가와 무릎을 꿇은 남자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 채 사과했다.
“정말, 뭐라고 사과드려야 할지…….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훤칠한 체격에 은회색 머리칼. .
황홀한 금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그리고 그보다 인상적인 것은 남자가 상반신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남자는 연신 줄리엣에게 사과하며 절절맸다.
근사하다 못해 훌륭한 몸매의 소유자가 제 앞에 꿇어앉아 어쩔 줄 모르고 있으니 줄리엣은 좀 기분이 이상해졌다.
따지자면 이렇게 젊은 남자가 소드마스터 일 줄 몰랐던 거니까 그의 탓은 아닌데 그는 주인에게 야단맞은 강아지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