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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29화 (26/229)

29화.

승객이 많지 않은 열차에서 떼로 오르는 그들은 자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입은 옷은 어딘가의 제 복 같았지만 좀 이상했다.

본래 제복은 신분을 알 수 있을만한 계급장, 혹은 상징이나 훈장 같은 것을 다는 법이다. 그런데 그 어디에서도 표식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수상한 점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주 잠시 스쳐 지나갔을 뿐이지만 줄리엣은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그들이 곁을 지나갈 때, 펄럭이는 검은 망토 안쪽에 중간 길이의 칼을 숨긴 것을 보았던 것이다.

7년간 공작가의 기사들에게 질리도록 익숙했던 줄리엣이 그걸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원칙적으로 열차 내에 무기 반입은 금지였다.

아무래도 승무원에게 알리는 게 좋을까? 하지만 그랬다가 더 큰 소란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지 염려스러웠다.

'……심각한 일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줄리엣은 칼을 숨긴 남자들이 사라진 방향을 힐끔거렸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은 다음 역에서 열차가 정차했을 때 일어났다. 또다시 한 무리의 수상한 일행이 우르르 열차에 올라탄 것이다.

그들은 칼을 갖고 있지는 않았은 체격이었다.

지만 멀리서 보기에도 범상치 않

'정말 크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하던 줄리엣은 그들 중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 같은 장년의 남자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신장이 거의 2미터에 육박하는 험악한 남자였다.

'케인 경보다 큰 것 같네.'

줄리엣은 태연히 차를 마시는 척하며 자신의 호위 기사였던 케인을 떠올렸다.

하지만 저 남자는 전직 용병대장인 케인보다도 커 보였다.

곰을 인간화하면 꼭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자들은 아까 전, 커다란 짐을 신고 열차에 탔던 무리와는 달리 칼을 숨기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무기가 달리 필요 없어 보일 정도로 하나같이 건장한 체격들이었다.

직관적으로 말해서, 아까의 그 칼을 숨기고 탄 남자들과 붙으면 이쪽이 우세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 확실합니다. 로이 님은 이 열차에 계신 게 분명합니다."

“최대한 조용히 흩어져서 찾아라.”

로이 님?

줄리엣이 수상한 대화를 엿들은 것은 고의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열차가 다시 출발하자 수상쩍은 무리는 곧 다른 칸으로 건너갔다.

줄리엣은 뭔가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전에 객실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까 그 검은 옷을 입고 칼을 숨긴 남자들도 마음에 걸렸고, 수상한 무리를 둘이나 봤는데, 뭔가 말썽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하지만 스콘은?'

줄리엣은 못내 아쉬웠지만 일단 객실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찻잔도 다 비었고, 그러나 줄리엣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직전, 트레이를 든 엔지가 돌아왔고 줄리엣은 스르르 자리에 다시 앉았다.

'점심으로 홍차와 스콘을 먹고 객실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빨리 먹고 들어가면 되니까.’

“기다리셨죠! 하나씩 나눠 드릴 게요.”

갓 구워 낸 스콘 냄새에 점잖게 식사를 하던 식당 칸 사람들은 기대에 부풀었다.

사람들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얌전히 자리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어느덧 트레이를 든 엔지가 줄리엣의 바로 앞까지 온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으아악!”

멀리서 희미한 비명이 들려오더.

니 식당 칸의 문이 벌컥 열렸다.

“모두 움직이지 마!”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검은 제복을 입은 괴한들이 진부한 대사와 함께 칼을 뽑아 들고 나타나 식당 칸의 사람들을 위협했다.

조금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검은 두건을 써서 하관을 가렸다.

는 것뿐이었다.

꺄아악!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괴한들은 신속히 식당 칸 안의 인원을 눈으로 훑더니, 날이 기묘하게 휘어진 잠비야를 든 채 사람들을 밀치거나 위협했다.

와장창!

그 바람에 밀쳐진 엔지가 들고 있던 트레이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철판이 엎어지며 담겨 있던 스콘이 와르르쏟아진 것은 물론이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패닉에 빠진 가운데, 오직 줄리엣만이 홀로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작은 디저트용 접시를 들고 있던 그녀의 시선이 바닥에 엎어진 스콘 트레이에 꽂혔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이보시오. 일단 칼은 치우고 대화로…….”

“입 닥쳐!”

갑자기 뛰어 들어온 괴한은 승객들을 장악하기 위해 인질을 하나 잡았다. 제압하기 가장 좋아 보이는 상대로 말이다.

그리고 인질의 목에 칼을 들이 대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이 여자 목이 날아가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아마 그 괴한은 방금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몰랐을 게 분명했다.

안타깝게도, 괴한이 선택한 인질은 줄리엣이었다.

**

“!"

“으아, 아아악!"

선량한 승객들은 인질범들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무릎을 꿇고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승객들은 별안간 등 뒤에서 터져 나오는 끔찍한 비명에 눈을 질끈 감았다.

사람들은 인질로 잡혔던 불쌍한 여자가 반항하다 살해당한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천벌을 받을 놈들 같으니!

공포에 질린 승객들은 하나같이 벌벌 떨면서 속으로 인질범의 잔혹함에 개탄했다.

그리고 인질로 잡혔던 가여운 여자가 최대한 덜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았길 빌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의 시야 안으로 허겁지겁 기어 들어온 것은 복면을 쓴 인질범 하나였다.

“사, 살려 주..…!"

인질범은 마치 끔찍한 것을 보기라도 한 듯 공포에 질려 바닥을 허우적거리다 졸도해 버렸다.

'……어라?'

슬며시 뒤를 돌아본 열차 칸의 사람들은 더욱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본 것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검은 제복의 괴한들이었다.

그리고 멀쩡히 서 있는 것은 조금도 위협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가녀린 여자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줄리엣은 어리둥절한 얼굴의 승객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쯧.

아주 잠시 아쉬운 듯한 시선으로 바닥 쪽을 힐끔거리긴 했지만 정말로 잠시였다.

줄리엣은 곧장 앞 칸으로 향하는 문을 조금 연 다음 문 틈새로 바깥 상황을 확인했다.

역시, 바깥은 칼 든 남자들과 아까의 무리가 뒤엉켜 싸우느라 아수라장이었다.

줄리엣은 문 틈새로 나비 네댓마리를 내보냈다.

"어?”

“또 ”

“이건 또 무슨…… 아아악!”

그리고 신이 난 나비들이 열차안을 휘젓고 다니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비들은 닥치는 대로 칼부림을 벌이는 괴한들에게 날아가 악몽을 선사하고 그들의 공포를 먹어 치웠다.

살의와 악의를 가진 약탈자들이라니. 감정을 먹어 치우며 힘을 불리는 나비들에게는 만찬장이나다름없는 환경이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나비들이 열차를 한 바퀴 돌고 오는 데만도 한참 걸릴 것 같았다.

끔찍한 비명을 뒤로하고 줄리엣은 침착하게 다시 문을 닫았다.

상황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았다. 줄리엣은 직관적으로 생각했다.

이자들은 단순한 열차 강도 따위가 아니었다.

열차 안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은 크게 두 무리였다.

한 무리는 나중에 열차에 오른 습격자들. 그들은 뭔가를 찾고 있었다.

“샅샅이 뒤져라!”

"님"

“로이 님! 어디 계십니까!"

줄리엣은 아무래도 그들이 찾는 것이 신분이 높은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다.

나머지 한 무리는 방금 전 줄리 엣을 인질로 잡았던 이들이었다.

검은 복면을 쓴 그자들이 바로'로이 님’을 여기로 납치해 온 납치범들인 모양이었다.

습격자들과 납치범들이라.

줄리엣은 차분하게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열차가 제대로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큰 상관이 있었다.

줄리엣은 차라리 납치당한 존재를 저 습격자들에게 얼른 돌려줘버리고 이 사태를 정리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뭘 어떻게?

뭘 ?

잠시 고민하던 줄리엣은 문득 식당 칸 뒤쪽이 짐칸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검은 복면의 무리가 열차에 오르기 전, 분명 이 짐칸에 뭔가 커다란 짐을 실었다는 것도.

대체 여기 뭐가 있길래 그런 걸까?

"으......."

바닥에 쓰러진 검은 복면의 남자가 정신을 못 차리고 꿈틀거렸다.

줄리엣은 괘씸죄로 그자의 손등을 한 번 더 꽉 밟아 주고는 짐칸으로 향하는 문을 확 열어젖혔다.

드르륵.

문은 간단히 열렸지만 생각보다 안이 깜깜해서 금방 뭐가 보이지는 않았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지만 딱히 철창살 외에는 특별한 게 보이지는 …….

잠깐, 철창이라고?

줄리엣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짐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짐칸 하나를 꽉 채우고 있는 것은 난폭한 육식동물을 운송할 때나 쓸 법한 거대한 철창살 우리였으니까.

절그럭. 묵직한 쇠사슬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어둠 속, 철창 너머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다음 순간 줄리엣은 흠칫 놀랐다.

거대한 짐승의 황금빛 눈동자한 쌍이 줄리엣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 늑대?"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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