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누가?”
“예, 공작님께서요.”
그럴 리가.
모나드 백작가의 사정이 이 지경인 것도 꼬박 7년 만에 처음 알았는데.
레녹스에게 모나드 백작가는 추상적인 공간이었다.
제 연인이 모나드 백작 영애이니, 수도 어딘가에 집이 존재하긴 하겠지 하고 넘기는 수준에 불과했다.
줄리엣은 그와 함께 수도에 올일이 있을 때마다 백작저에 들르고는 했지만 레녹스는 그런 그녀를 데리러 온 일조차 없었다.
제 연인이 어디서 누구와 눈이 맞아도 눈 하나 깜짝 않을 남자가 집안일까지 신경 써 주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성가신 짓을 할 리가.
그러나 노부인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어제도 줄리엣 아가씨 편에 황금을 보내 주셨잖습니까?”
그런 적……, 없다.
"아가씨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올해도 바쁘셔서 같이는 못오셨지만 공작님께서 풍족한 새해를 보낼 수 있게 신경 써 주셨다고요.”
레녹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택의 모두가 감읍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직접 만나 뵙고 인사드릴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공작님.”
눈먼 노부인은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였다.
레녹스는 이게 무슨 상황일까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줄리엣의 유모라는 노부인은 물론이고 그녀를 옆에서 부축하고 선 어린 하녀 역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
모두 줄리엣이 꾸며낸 말일 것이다.
“줄리엣이 그렇게 말했다고?"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냉랭함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눈먼여인은 온화하게 말했다.
“그럼요. 우리 줄리엣 아가씨야 언제나 매번 공작님 얘기뿐이시죠. 어제만 해도 저를 붙잡고 평소 공작님이 얼마나 배려해 주시는지, 소문과는 달리 어찌나 다정한 분이신지 한참 얘기하다 돌아가셨는걸요.”
레녹스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줄리엣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짐작이 아예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반대로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선뜻 납득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그가 아는 줄리엣 모나드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공작님, 우리 아기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눈먼 노부인은 깊이 허리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워낙 수줍으셔서 말이 없으시지만 속이 참 여 리시답니다. 생각도 깊고 상처도 많이 받으시죠. 그러니 아껴 주세요."
레녹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물끄러미 눈먼 여자를 응시했다.
이 유모라는 여인은 처음부터 줄리엣의 거짓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7년간 연인으로 지내면서 얼굴을 한 번도 비친 적 없는 남자 다정한 연인일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줄리엣이 거짓말까지해 가며 그를 필사적으로 변호한 것은, 그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미 다칠 대로 다친 자존심이었지만 최소한 제 유년 시절을 을기억해 주는 소중한 사람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겠지.
레녹스는 저를 둘러싼 악명에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세간에서 자신의 연인을 두고 뭐라고 떠드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굳이 사교계의 소문이 아니더라도 그런 것쯤은 뻔한 일이다.
유모를 비롯한 백작가 하인들도 짐작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가씨의 연인은 무심하고 가차 없기로 악명 높은 남자다.
아가씨가 의지할 데 없는 북부에서 그의 연인으로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을지 걱정했을 게 뻔했다.
그런데도 늙은 유모를 안심시키려는 주인 아가씨의 서투르고도 어설픈 거짓말에 매해 속는 척했을 것이다.
거짓말을 한 줄리엣이나 매번 속아 넘어가 주는 백작가의 하인들, 둘 중 누구도 나쁘지 않았다.
레녹스는 잠시 생각했다.
북부에 머무르던 시절에도 줄리 엣은 공작 부인이 아니니 사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사재가 있을 리 없었다.
물론 배를 끓는 일이나 드레스며 장신구 같은 게 부족한 일도 없었겠지만 그뿐이었다.
문제는 줄리엣은 그로부터 선물받았던 모든 물건들을 고스란히 두고 갔다는 것이다.
백작저의 처지가 이러한데 대체 줄리엣은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그 황금을 어디서 마련했을까?
레녹스는 한참을 침묵한 뒤에야 겨우 돌아설 수 있었다.
"저택이 많이 낡았군. 도울 일손을 보내지.”
***
“남편분을 만나러 가신다고 하셨죠?”
홍차를 가져온 승무원 소녀가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줄리엣에게 물었다. 그녀의 이름은 엔지라고 했다.
줄리엣은 엔지에게 그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줄리엣의 왼손 약지에는 가느다란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아무 장식도 보석도 없는 흔한 실반지였지만 신분을 속이기에는 오히려 그쪽이 좋았다.
지금 줄리엣은 남편을 만나러 가는 젊은 부인 행세 중이니까.
“남편분께서 동부 관문에서 일하시나 봐요. 하긴, 거기 좋은 일자리가 많다고 들었어요.”
붙임성 좋은 엔지는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했는지 명랑하게 떠들었다.
역시 가짜 신분을 만들어 두기 잘했다.
줄리엣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마력석으로 움직이는 열차는 값이 꽤 비싼 탈것이었다.
그런데 1인용 객실을 빌려서, 하녀도 없이 혼자 여행 중인 젊은 여자라니. 눈에 띄는 게 당연하다.
어린 승무원 소녀는 그런 줄리 엣이 퍽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눈앞의 줄리엣이 귀족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기야, 열차를 이용하는 귀족들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열차의 주요 이용객들은 부유한 평민 계층, 그중에서도 먼 거리를 빨리 주파해야 하는 상인들뿐이었다.
대귀족이나 고위 성직자들은 막대한 비용과 마력석이 소비되는 게이트를 통한 이동을 가장 선호했다.
물론 그게 현존하는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이긴 하지만 터무니없이 비싸다.
게다가 신원이 확실한 허가증이 없으면 게이트를 이용할 수조차 없었다.
기차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도 극히 적은 터라 줄리엣이 앉아 있는 식당 칸에도 고작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식당 칸이라니.
주방이 어느 칸에 붙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열차 내부에서 조리가 가능한 것 역시 마력 석 덕분이었다.
가짓수는 적지만 아침 식사는 꽤 맛있었다.
갓 구워져 나온 따끈한 크루아상을 맛봤을 때는 줄리엣도 꽤 놀랐다.
아침 식사를 마친 줄리엣의 앞에 엔지가 새로 우린 홍차를 가져다줬다.
“륀느 차예요.”
줄리엣은 은은한 차향에 감탄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죽은 모나 드 백작 역시 이 차를 좋아했었다.
차향에 반해 잔을 비운 줄리엣이 조심스레 물었다.
"더 마실 수 있나요?”
“그럼요!”
엔지는 기쁜 듯 아예 찻주전자를 새로 가져다주었다.
주방에서 찻주전자를 들고 돌아온 엔지는 뭔가 심상치 않은 달콤한 냄새를 희미하게 달고 왔다.
후각을 자극하는 고소한 버터냄새에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했다.
“주방에서 스콘을 굽고 있거든요.”
스콘이란 말에 식당 칸에 앉아 있던 다른 승객들이 미어캣처럼 일제히 고개를 빼 들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가져다 드릴게요.”
비싼 값을 하는구나. 줄리엣은 속으로 감탄했다.
'비싸도 배 대신 열차를 타길 잘했어.’
이 정도 호사라면 충분히 지불할 마음이 있었다.
심지어 승객 수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톡. 토독.
"아.”
어쩐지 아침부터 날이 흐리더니 아니나 다를까, 열차가 산등성이를 넘자마자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태풍이 오려나?”
“이 계절에 무슨 태풍이에요?
그냥 지나가는 비겠죠.”
잠시 긴장해서 무심코 찻잔을 꽉 쥐었던 줄리엣은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대로 지나가는 비였다.
안도한 줄리엣은 빗방울이 조금씩 차창을 두드리는 광경을 마음놓고 구경했다.
비오는 날, 그것도 녹음이 우거진 산을 구경하면서 열차에 앉아 홍차를 들고 있다니.
조금 뒤엔 갓 구운 스콘도 곁들 여질 예정이고, 아, 최고다.
오랜만에 누리는 평화에 달콤한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열차에 탄 승객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특히나 식당칸에는 더 사람이 없었다.
"......?"
그런데도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줄리엣은 고개를 들었다.
뜻밖의 범인은 바로 줄리엣의 코앞에 앉아 있었다.
줄리엣보다 두 칸 앞쪽 좌석에 앉은 아기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줄리엣을 빤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귀여워……!'
특히나 말랑말랑해 보이는 저 하얀 볼 살이 너무 귀여웠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 봤지만, 줄리엣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줄리엣이 아기를 보고 활짝 웃자, 아기 역시 배시시 웃으며 줄리엣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빠!”
“어머. 너 자꾸 누굴 보고 웃는 거야, 응?”
앞자리에 앉은 아기 엄마가 그렇게 말하자, 줄리엣은 언제 웃었냐는 듯 재빨리 찻잔을 살펴보는 척 딴청을 부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기.
그건 줄리엣이 두 번의 삶 동안 단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존재였다.
"......"
찻물에 비친 줄리엣의 얼굴에서 사르르 미소가 사라졌다.
사실은 딱 한번.
가질 뻔했던 적이 있었다.
첫 번째 삶에서 그녀가 죽기 거의 직전에.
지금도 그렇지만, 첫 번째 삶에서의 줄리엣은 정말로 특출할 것 하나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주치의가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고 말해 주었을 때, 줄리 엣은 뭔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부풀었었다.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결혼은 안 해도 아이는 날을 수 있는 거잖아요. 레녹스, 만약에 우리 아기가 생기면 -"
"만약은 없어, 줄리엣.”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외면뿐이었다.
“못 알아듣나? 아이를 가져도 낳게 할 일 없을 거야."
그 말 때문이 아니라도, 줄리엣은 아기를 품에 안아 보지 못했다.
두 번째 삶을 사는 동안에도, 줄리엣은 이따금씩 그 싸늘한 말을 혼자 곱씹어 보곤 했다.
줄리엣은 싸늘하게 식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쿵.
그러다 문득 열차가 멈춰 섰다.
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줄리엣이 탄 이 열차는 동부 관문까지 가는 동안 몇 개의 역을 거쳤다.
수도에서 줄리엣을 태웠듯이 중간 역에서 내릴 손님은 내리고, 또 새로운 승객과 짐을 싣고 다시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는 시스템이었다.
이 역에서도 새 승객들을 태우는 모양이었다.
창밖을 구경하던 줄리엣은 문득 뒤쪽 칸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쿵.
“실었습니다!”
줄리엣은 슬쩍 뒤쪽을 곁눈질했다.
그러고 보니 열차의 맨 뒤 세개의 꼬리 칸은 짐을 싣기 위한 공간이었지.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뭔가 엄청나게 거대한 짐을 실었나 보다.
줄리엣이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수상한 남자들이 열차에 우르르 올라탔다.
'……어?'
줄리엣은 순간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