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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27화 (24/229)

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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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드 백작가의 저택은 오래된 저택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한산한 수도의 구도심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녹음이 우거진 가운데 위치한 모나드 백작저는 한적한 교외 저택의 모습에 좀 더 가까워 보였다.

새하얀 지붕이 햇살을 받아 빛나는 저택의 외관은 좋은 말로는 고풍스러웠고 솔직한 말로는 낡았다.

낡고 오래된 저택을 찾아오는 방문객은 극히 드물었다.

7년 전, 불운한 사고로 주인 일가가 참변을 당한 이후로는 안 그래도 조용한 일가를 찾아오던 방문객의 발걸음이 뚝 끊겨 버렸다.

인심이 각박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혼자 남겨진 주인 아가씨마저 북부로 떠나 버린 뒤로는 정말로 아무도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몇 년 만에 지체 높은 방문객을 맞게 된 백작가의 하인들은 기겁했다.

".…누구시라고요?"

남자는 제국민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대귀족의 이름을 댔다.

무슨 까닭에선지 화려한 옷차림은커녕 흠뻑 젖은 방종한 차림새였지만 붉은 눈의 남자는 제 신분을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얼이 빠져 있던 하인들은 그제야 그가 풍문으로만 듣던 주인 아가씨의 연인임을 깨닫고는 황급히 문을 열어 주었다.

"이, 이쪽으로 오시지요.”

주인 일가가 부재한 지 7년이나된 저택의 하인들이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법도를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남자가 타고 온 검은 준마의 말고삐를 받아 든 하인은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고삐를 넘긴 칼라일 공작은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수풀이 우거진 정원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한때 가문의 외동딸이 숨바꼭질을 하며 뛰어놀았을 정원은 황폐한 지경이었다.

미로 정원은 앙상했고 분수는 말라붙었다.

“정원사가 없나?”

"이, 일손이 워낙 부족하여"

반사적으로 변명을 내놓은 늙은 집사는 아차 했다.

귀한 신분의 손님에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은 예법에 한참 어긋나는 것이었다.

심지어 상대는 악명 높은 북부의 지배자가 아닌가. 경을 칠 노릇이었다.

집사가 지금이라도 고개를 조아려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젊은 공작이 그를 지나쳐 홀로 본관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나이든 집사가 다급히 그 뒤를 따랐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칼라일공작은 손님이니 이렇게 허락도 도구하지 않고 저택에 대뜸 발을 들이는 건 예법에 어긋났다.

설령 그가 대귀족이고 주인 아가씨의 연인이라도 아닌 건 아닌 거였다.

하지만 지금 백작저에는 집주인 노릇을 할 일가가 아무도 없었고….

'……없어도 예법에는 어긋나는 것 아닌가?'

집사가 갈등했지만 애초에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감히 레녹스 칼라일에게 예법운운할 수 있는 사람은 제국에 아무도 없었다.

“줄리엣의 방은 어느 쪽이지?"

"예? 아, 3층의 서쪽인데…"

칼라일 공작은 집주인이라도 되는 양 태연하게 3층으로 향했다.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쫓아가던 집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사실은 처음부터 물었어야 하는 질문이었다.

“저어, 전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공작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전하께선 혹시 줄리엣 아가씨를 찾아오신 겁니까?”

멈칫.

그 질문에 갑자기 칼라일 공작이 우뚝 멈추더니 그를 향해 돌아섰다.

집사는 그 유명한 칼라일 공작가의 붉은 눈을 실제로 보는 순간 쭈뼛 소름이 돋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늙은 집사가 겨우 용기를 끌어 모아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줄리엣아가씨는 지금 부재중이십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공작은 의외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숨죽이고 공작의 반응을 기다리는 사이, 집사는 칼라일 공작이 이 무시무시한 악명과는 달리 반듯한 미남자라는 걸 알았다.

공작의 여자 버릇은 유명했다.

과연 젊은 아가씨들이 목을 맬만한 외양이었다.

왜 그의 외모에 관한 소문은 악명만큼 널리 퍼져 있지 않은지가 궁금해졌다.

거기까지 떠올리고 나서야, 집사는 공작이 어쩌면 아가씨를 찾아온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줄리엣이……."

“예?”

“줄곧 이 방을 썼나?”

"아…… 예!”

그들은 어느새 침실 앞에 서 있었다.

“막 걸음마 떼실 때부터 이 방을 쓰셨지요.”

집사는 칼라일 공작의 앞인 것도 잊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모나드 저택에 남아 있는 사용 인들은 대부분 백작가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어린 줄리엣이 태어나서 첫 걸음마를 떼는 모습을 지켜본 이들도 많았다.

"…그렇군.”

레녹스 칼라일의 손이 문가의 기둥을 짚었다.

얼핏 봐서는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그 기둥에 줄리엣이 자라면서 매 해 생일마다 키를 쟀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첫 걸음마를 떼던 순간부터 유치가 빠져 엉엉 울음을 터뜨렸던 다섯 살, 처음으로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석했던 열여섯. 그리고 성년이 된 열여덟 살 겨울의 생일까지.

크고 모양 좋은 손이 기둥의 파인 홈들을 느릿하게 매만졌다.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집사는 왠지 보면 안 되는 장면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흠흠, 그럼 필요하신 게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어쩐지 머쓱해진 집사는 그 말을 남기고는 그곳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레녹스 칼라일은 침실 안을 한 바퀴 빙 돌아보았다.

작은 문을 통해 이어지는 옆방은 작은 응접실과 드레스룸이었다.

섬세한 거울과 가지런히 놓인 빗, 순서대로 차곡차곡 정리된 된 옷가지와 손때 묻은 책들.

그리고 소녀 시절부터 쓴 듯한 캐노피가 드리운 사주 침대.

줄리엣은 어린 시절의 애착 어린 장난감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 아이였던 게 분명했다.

작은 응접실 한쪽에 놓인 커다.

란 상자 안에는 유년 시절 가지고 놀았을 법한 장난감들이 가득했다.

햇살이 잘 드는 아늑한 침실로 돌아온 레녹스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커다란 헝겊 인형을 집어들었다.

한때는 보드라운 분홍색이었을 것 같은 토끼 인형은 지금은 바래고 군데군데가 낡아 기운 흔적이 역력했다. 귀는 축 늘어지고 숨죽은 솜이 초라했다.

레녹스는 제 몸만 한 크기의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잠들었을 어린애를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었다.

어쩐지 기묘한 감각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저택이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줄리엣의 시간이 고스란히 이 공간에 남아 있었다.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 레녹스 칼라일은 저택의 회랑을 걸었다.

당연하게도, 이 낡고 고풍스러운 저택에 그가 찾는 존재는 없었다.

애초에 모나드 백작저 사람들은 줄리엣이 수도를 떠난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그들은 그저 주인 아가씨의 연인인 칼라일 공작이 갑자기 백작저에는 왜 온 것인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섬세한 화장대, 소녀다운 취향으로 가득한 침실.

그는 열여덟 살 줄리엣 모나드가 어떤 소녀였는지 어렴풋이 기억해 냈다. 그러나 그가 아는 줄리엣 모나드는 자기 취향을 말하는 법이 없는 연인이었다.

아니, 묻지 않았던 것은 그 자신이었던가?

줄리엣의 체향과 비슷한 은은한 향이 저택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그의 연인은 이곳에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이곳에 뭘 찾으러 왔나?

줄리엣이 그를 버리고 떠난 이유를 찾아서? 아니면, 외도의 증거?

레녹스 칼라일은 차갑게 자조했다. 그대로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때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님.”

머리가 하얗게 센 푸근한 인상의 노부인이 어린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복도 끝에 나타났다.

“저는 이베트라고 합니다. 줄리 엣 아가씨의 유모지요.”

자신을 유모라고 소개한 여자는 칼라일 공작이 서 있을 법한 방향으로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노부인의 은회색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레녹스가 묘하게 방향이 어긋난 시선을 잠시 마주보다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앞이 안보이나?”

“예, 그렇습니다.”

줄리엣의 유모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지병이 있어서 시력이 나빴는데 5년 전부터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백작가에 남을 수 있도록 줄리엣아가씨가 배려해 주셨지요.”

레녹스는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안 봐도 사정을 알 만했다.

눈도 안 보이는 늙은 유모에 나이 지긋한 집사. 아주 늙었거나 너무 어린 하인들. 엉망이 된 정원과 방치된 지 오래인 낡은 저택.

사용인들은 모두 다른 귀족가에서는 받아 주지 않을 법한 구성원들뿐이었다.

스무 명도 채 되지 않는 인원이 사이좋게 오순도순.

몰락 귀족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당연하다. 그는 관심이 없었고, 줄리엣은 한 번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레녹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아마 모나드 백작가의 남은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간신히 저택 살림을 유지하는 듯했다.

말 그대로 유지에 불과하다.

오래된 저택일수록 그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들어간다. 지금의 의모나드 백작저는 그야말로 비바람이 들이치지 않도록 나무판자를 덧대는 게 고작이었다.

북부의 칼라일 공작성과 비교하자면 백작저는 저택이라기보단 오두막에 가까웠다.

“살림이 꽤 어려운 것 같은데.”

“공작님께서 살뜰히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부족함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지나가듯 물었던 레녹스는 귀를 의심했다.

'.… 내가?’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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