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
번쩍.
번개가 내리쳤다. 순간적으로 달빛조차 들지 않는 숲에 눈부신 섬광이 들이쳤다.
그 바람에 남자의 반듯한 이마와 고집스러운 눈썹과 서늘한 눈매가 드러났다.
그의 앞에는 거대한 지네 마물이 머리가 잘린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쿠르릉.
레녹스는 그제야 퍼뜩 정신이든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새삼 제가 마물의 숲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레녹스는 폭풍우를 싫어하는 어떤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언제 돌아오세요?"
줄리엣이 천둥번개를 무서워한단 건 좀처럼 알아채기 쉽지 않은 사실이었다.
우선, 줄리엣 모나드는 당돌하 하다 못해 겁이 없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북부는 천둥번개를 동반한 큰 비가 내리는 일이 드물었다.
그나마 보통 큰 태풍이 오는 계절은 여름인데, 그 무렵이면 그들은 여름 별궁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기억이기에 줄리엣의 기억은 조금 다를 것이다.
북부의 공작위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고 그는 줄리엣을 혼자 내버려 두는 일이 많았으니까.
"곧 태풍이온대요.그러니까…."
가지 말라거나 같이 데려가주면 안 되느냐고 하거나 일찍 돌아와 달라고 떼를 썼더라면, 그랬다면 좀 더 일찍 알아챘을지도 모르는데.
"조심하시라고……."
어렵게 입을 떼 놓고 겨우 그렇게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미련하긴..'
줄리엣은 그런 면에서는 답답할만큼 고지식하게 굴었다.
보수적이다 못해 심술궂은 북부의 대귀족들을 상대할 때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뒤집어엎던 여자다. 그러니 유령 같은 게 무서웠을 리는 없다.
어린애처럼 천둥이 치는 밤에 혼자 있기 싫어한다는 걸 들키고 싶어 하지 않았던 거겠지.
레녹스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쿠르릉.
천둥이 심하게 치는 날이면 줄리엣은 밤새 불을 환히 켜 놓고 오도카니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면 잠들기 어려울 텐데.”
무심코 툭 던진 말에 움찔하며 마지못해 불을 끄긴 했다. 무서워한다기보다는 트라우마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제야 그녀의 부모가 죽던 날 손에 꼽을 만큼 큰 폭풍우가 몰아쳤다는 게 떠올랐다.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천둥치는 밤이면 창백해진 얼굴로 아닌 척하며 필사적으로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게 제법 귀엽기도 했다.
그래서 그 역시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그가 곁에 없는 날이면, 홀로 잠들지 못하는 줄리엣이 뭘 할지 혼자 궁금해한 적은 있다.
그러나 물어본 적은 없었다.
그저 밤새 온 방 안의 불을 환히 켜 놓고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거나 혹은 하녀들을 불러 밤을 새거나 하지 않을까 하고 짐작했을 뿐이다.
그 이상 알고 싶어 하지도, 알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번쩍.
다시 번개가 쳤을 때, 레녹스는 제 발 아래에서 앙상한 백골을 발견했다.
숲의 바닥에는 사람의 것이 분명해 보이는 백골이 수북했다.
발치에 굴러다니는 이 많은 인골이 모두 불운하게 길을 잘못 든 여행자들은 아니었다.
오염된 숲이 영향을 끼치는 것은 비단 기형적인 마물들뿐만이 아니다.
수해는 그 자체로 독성을 뿜어냈다.
기이하게도 동물들에게는 무해한 이 독은 인간에게는 환각을 보게 하고 묘하게 약에 취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지만 북부에는 산지가 많았고 자연히 이런 오염된 숲의 수도 많았다.
북부 영지의 마물을 토벌하면서 환각에 중독된 영지민들을 처리하는 것도 공작가 기사단의 일중 하나였다.
레녹스는 새삼스레 궁금해졌다.
마물이 내뱉는 독도, 오염된 숲이 내뿜는 독성도 그의 몸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신도 마찬가지일까?
오염된 숲을 수도 없이 드나들었지만 레녹스는 단 한 번도 환각을 본 적 없었다.
축축한 안개 속에서 레녹스는 칠흑 같은 숲 너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윽고 아무것도 보일 리가 없는 어두운 나무들 사이에서 연기처럼 희끄무레한 형체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나풀거리는 머리채와 치맛단부터 시작해서 이내 불안한 듯 어두운 숲을 홀로 서성거리는 여자의 완전한 형태가 보였다.
눈에 익숙한 여자의 실루엣이 눈앞에 잡힐 듯 선명히 떠올랐지만 레녹스는 미소 비슷한 것도 짓지 않았다.
조금 어이없었다.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 볼 수 있는 거였나?
레녹스는 자신이 정말로 환각을 보고 있는지, 아니면 제 상상일 뿐인지 궁금했다.
쿠르릉.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변을 힐끔거리던 여자가 갑자기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선 쪽을 보더니 여자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환해졌다.
다음 순간 제 쪽으로 뛰어오는 여자를 향해 레녹스는 무심코 빈 손을 내밀었다.
“줄……."
그녀가 제 품으로 정말로 뛰어 오기라도 할 것 같아서.
그러나 여자는 유령처럼 레녹스를 곧장 지나쳐 그의 뒤편으로 달려갔다. 뒤를 돌아보자 여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안겨 있었다.
쿠르릉.
연달아 다시 천둥이 쳤지만 맨발로 까치발을 든 채 얼굴 모를 상대에게 매달린 여자는 더 이상 겁먹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다.
제게는 좀처럼 보여 준 적 없는 얼굴로 환히 미소 짓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비밀스러운 연인을 향해 눈웃음치며 목에 팔을 두르고 입맞춤을 졸랐다.
그리곤 얼굴 모를 남자의 가슴 팍에 뺨을 기대며 조금 서글픈듯 그러나 애틋하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아기를 가졌어요.”
제게 순종하던 단정한 입술이 달싹이는 것 같았다.
"그러니 도망가요, 우리.”
캉!
홧김에 내지른 눈먼 검날에 무언가 부딪혔다.
작은 불꽃이 튀는 것을 보고 그것의 정체를 짐작한 순간, 레녹스는 손으로는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날아간 화살에 마물의 몸체가 풀썩 쓰러졌다.
청동 사슴이었다. 숲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급 마물.
다른 점이 있다면 온몸이 희다는 것뿐이었다. 오염된 숲에서 이 정도 돌연변이는 놀랍지도 않았다.
아마 숲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지네가 죽은 것을 보고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뛰쳐나온 것 같았다.
레녹스는 쓰러진 마물을 냉랭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흰 사슴의 목덜미에서 붉은 핏줄기가 솟아 올랐다.
눈앞에 어른거리던 여자의 환영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이거, 당신 애 아니야.”
그러나 어디까지나 소리 없이 벙긋거리던 환각과는 달리, 싱그럽게 미소 짓는 줄리엣은 분명 그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평소였다면 그 말의 진위부터 의심했을 것이다. 그가 냉정을 을잃는 일은 손에 꼽게 드물었다.
그러나 기울어진 이성이 판단력을 좀먹었다.
딱히 잘라 낼 타이밍을 재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손을 먼저 놓아 버리는 것은 제 쪽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랬는데.
'사실은 속셈이 있었단 말이지.'
레녹스의 입매가 잔인하게 비틀렸다.
손을 뻗으면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그까짓 나비 따위. 줄리엣의 환술은 그에게는 통하지도 않았다.
제 앞에서 한 번도 운 적 없었던 줄리엣이 보인 눈물에 흔들렸을 뿐이다.
잘그락.
그의 손아귀에서 목걸이가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태양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이 화려한 목걸이는 저택 열 채의 값과 맞먹는 사치스러운 물건이었다.
그런데도 줄리엣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마치 아무리 값비싼 물건이라도 그와 관련된 것은 끔찍하다는 듯이.
목이 꿰뚫려 바르작거리던 흰사슴이 숨이 끊어져 죽 늘어졌다.
'너를 어쩌면 좋을까.'
차가워진 머리로 레녹스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줄리엣에게 한 번도 준 적 없는 것을 바라고 있단 걸 아직 깨닫지 못했다.
* * *
"주군.…….”
말들을 데리고 검은 숲 밖에서 기다리던 하딘은 숲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공작을 발견하곤 흠칫 놀랐다.
어두운 색 피부를 가진 하딘은 남부 이민족 출신으로, 오직 공작에게만 충성하는 정예 기사단의 우두머리였다.
주인의 명이라면 뭐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수행해 온 충성스러운 수하였지만, 그런 하딘의 눈에도 마물의 피를 뒤집어 쓴 공작의 모습은 섬뜩하게 느껴졌다.
돌연변이 마물들의 군락지에서 상처 하나 없이 멀쩡히 걸어 나온 걸로 모자라, 공작은 피투성이가 된 흰 사슴을 한 마리 끌고 나왔다.
“저, 주군.”
죽은 사슴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하딘은 조금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본래 이런 소식을 전하는 것은하딘의 일이 아니었다.
비서인 엘리엇이나, 하다못해 다른 기사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지금 공작의 곁에 있는 것은 그 뿐이었다.
“……조금 전 황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호수가 붉게 변했다고 합니다.”
수도, 황궁 인근에는 출입이 제한된 신성한 호수가 있다.
평범해 보이는 작은 호수가 신성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 호수가 재앙을 예고해 주기 때문이었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에 한 번씩 호수가 붉게 물들면 뭔가 불길한 재앙이 닥치리란 계시였다.
하필이면 성대한 신년 연회 다음 날 불길한 징조가 나타나다니. 황제가 기겁해서 한밤중에 급히 칼라일 공작에게 연락을 취한 것도 당연했다.
“주군?”
그러나 사냥감을 던져 놓고 손을 닦던 레녹스 칼라일은 징조나 재앙 따위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눈치였다.
아무렇게나 턱을 타고 흐르는 핏줄기를 훔쳐낸 다음 공작이 여상하게 물었다.
“모나드 백작가가 어느 쪽이지?”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