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25화 (22/229)

25화.

***

순은으로 날개를 반쯤 펼친 비둘기 모양을 세공한 솜씨가 대단히 정교했다.

북부 공작가의 영지 중에는 암초투성이 군도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배로도 접근이 쉽지 않고 고기잡이도 영 신통치 않은 작은 섬들이었다.

그 군도의 별칭은 ‘칼라일의 은잔' 이었다.

겉보기와는 달리 그곳 광산의은 매장량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북부의 험준한 영지에서는 다양한 광물들이 쏟아져 나왔고, 칼라일 군도의 은광은 공작가가 소유한 다른 광산들에 비하면 소박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은잔'같은 귀여운 이름을 붙였던 것 같다.

군도의 은 매장량이 상당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근 20여 년간 공작가에서 은을 본격적으로 채굴하라고 명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통적으로 군도의 소유권이 공작가의 안주인에게 귀속되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공작 부인의 사재, 비상금 같은 거였다.

그리고 지난 20여 년간 칼라일공작가에는 안주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줄리엣이 그 은광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그녀가 북부의 공작성에 머문 지 3년쯤 되었을 때였다.

**

“주인마님을 뵙습니다!”

유행이 한 100년쯤 지난 듯한 옷을 차려입은 노인이 공작성으로 찾아왔다.

노인은 줄리엣을 보자마자 넙죽궁정식 절을 했다.

당황한 줄리엣에게 엘리엇이 허겁지겁 달려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노인은 군도의 촌장인데, 10년에 한 번씩 출납 결산 보고를 하러 공작성에 방문할 때마다 부득불 군도의 주인이신 공작 부인을 뵙고 인사를 올리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린다는 이야기였다.

“그냥 적당히 받아 주시죠. 어차피 전하께서는 묻지도 않으실 겁니다.”

엘리엇이 소곤소곤 종용했다.

“지난 방문에는 하녀장 메릴 부인이 대신 인사를 받았으니까요.

얼른요! 아니면 저 양반 안 떠납니다. 설마 오늘내일하는 노인네를 객사하게 둘 생각은 아니시죠?”

줄리엣이 엘리엇에게 말려든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줄리엣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노인은 환하게 웃으며 줄리엣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건 저희가 부인께 드리는 마음입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노인의 뒤에서은 세공품을 잔뜩 담은 수레가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겁한 줄리엣은 애써 노인을 설득해서 첫 번째 수레의 맨 위에 놓여 있던 가장 작은 한 쌍의 비둘기 장식품을 받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저는 이게 좋아요! 그러니까…… 이거면 충분해요.”

노인은 못내 아쉬운 듯한 표정이었지만 줄리엣이 고른 비둘기를 보고 이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부인의 안목도 탁월하십니다! 비둘기는 다산의 상징입죠.

모름지기 가내가 평화로워야 ……. 이렇게 훌륭하신 주인마님을 뵈니 이 제노피, 이제는 여한 없이 세상을 하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신 눈물을 찍던 제노피 노인이 겨우 물러간 다음, 엘리엇이 심술궂게 투덜거렸다.

“저 노인네 다음번 방문 때도 살아 있을 겁니다.”

한바탕 요란스러운 손님맞이를 마친 뒤, 후원에 홀로 남은 줄리 엣은 손 안의 비둘기 장식을 한참이나 만지작거렸다.

사이좋게 날개를 펼친 은색 비둘기는 두 마리의 형태가 조금 달랐다.

각각 따로 만들어졌지만 두 개가 한 쌍으로 겹쳐지는 형태였다.

줄리엣은 그것을 유심하게 보다가 홈을 찾아 두 마리를 겹쳐 보았다.

달칵 소리를 내며 두 마리가 꼭 맞게 들어맞았다. 비스듬히 포개어져 있는 두 쌍의 날개가 더없이 다정해 보여서 줄리엣은 혼자 조금 웃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든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뒤로 숨겼다.

“이건, 그러니까…….”

"알아.”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후원의 입구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던 남자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본 걸까.

당황해 시선을 떨구는 줄리엣의 앞으로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줄리엣은 입술을 깨문 채 뒤로 숨겼던 비둘기 장식품을 내밀었다.

대체 왜 숨겼을까?

도둑질하다 들킨 어린애처럼 소스라쳤던 스스로의 행동이 부끄러웠다.

차마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서, 줄리엣은 그가 손에 든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내내 고개를 푹숙이고 있었다.

남자가 비둘기 날개를 유심히 보다가 물었다.

“이깟 싸구려가 좋아?"

선득한 물음에 줄리엣은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대답해 봐, 줄리엣 모나드."

고개를 들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손이 줄리엣의 고개 끝을 치켜올렸다.

억지로 마주하게 된 레녹스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의 버릇이었다.

그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줄리 엣의 머리를 스쳤다.

대체 또 뭐가 그의 신경에 거슬렸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가능성은 그 거였다.

감히 정부 주제에, 정말 공작부인이라도 된 것처럼 대신 인사를 받아서?

주제넘었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공작가의 재산을 탐내는 것처럼 보여서?

훔치려는 건 아니었다고 변명이라도 해야 할까.

“……싸구려 아니에요."

물론 공작가의 막대한 부에 비하면 깃털만큼의 가치도 없겠지만…….

“돌려주세요. 제 거예요.”

줄리엣은 똑바로 그의 눈을 마주보고 말했다.

아주 잠시, 그가 손에 든 것을 던져 버리고 제 성에서 나가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러나 레녹스는 그녀의 손에 다시 비둘기 장식을 얌전히 돌려주었다.

그날 오후 그가 별다른 얘기도 없이 영지 시찰을 핑계로 공작성을 떠나 버리는 바람에 그를 다시 만난 것은 한 달 뒤의 일이었다.

게다가 몇 달 뒤, 보석함에 잘넣어 뒀던 비둘기 한 쌍 중 한 마리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줄리엣은 그날 그렇게 말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

짐 가방 손잡이 부분에서 위태롭게 달랑거리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줄리엣은 비둘기 장식을 떼어 짐 가방 안쪽의 주머니에 따로 넣어 두었다.

오기를 부려서 얻어낸 은장식이었다. 딱히 은이 탐났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어린애처럼 떼를 써서 지킨 물건인데, 반쪽을 잃어버려서 무척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남은 하나는 어디 잘 보이는 곳에 둬야겠다고 생각하다 짐 가방에 달아 놨던 모양이다.

하나 남은 비둘기마저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줄리엣은 멍하니 창가를 바라보았다.

지난밤 그녀를 뒤쫓아 온 레녹스는 화가 난 것 같아 보였지만 그건 잠시뿐일 것이다.

레녹스 칼라일은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지 않고 그래서 잠시 당황한 것뿐이다. 좀처럼 뭘 잃어 본 적이 없는 남자였으니까.

전날 밤, 레녹스 칼라일은 일정을 바꿔 그녀를 데리고 곧장 북부로 돌아가겠다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녀는 독하고 모진 거짓말까지 해가며 그로부터 도망쳤다.

그러니 어쩌면 레녹스는 지금쯤 줄리엣의 행동에 화가 나서 공작가의 가신들을 이끌고 북부로 떠나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그가 아직까지 수도에 머무르고 있다면…….

“..….… 지금쯤이면 만났으려나.”

만났겠지.

달리아 프란.

그의 진짜 연인 말이다.

*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레녹스 칼라일은 상당히 모범적인 귀족이었다.

신전에서는 방종한 악마의 자식이니, 방탕한 폭군이니 하면서 흑색 비방 전선을 펼치지만 북부의 지배자인 레녹스 칼라일의 일상은 의외로 단조롭고 단순한 편이었다.

일하는 시간 외에 깨어 있는 동안 레녹스 칼라일의 여가 활동은 크게 두 가지였다.

마물이 들끓는 숲으로 사냥을 가거나, 혹은 제 연인과 함께 몇 날며칠이고 침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거나.

다소 모시기 까탈스러운 편이긴 했지만 꽤 괜찮은 상관이었다.

이성을 잃을 만큼 취하는 법도 없고 약에 손을 대지도 않았으며 도박벽도 없었다.

가끔 즐기는 사냥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건전한 통치권 행사였다.

북부는 마물이 들끓는 땅이었으니까. 북부의 영지민들은 마수토벌에 힘쓰는 북부의 주인을 사랑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야, 뭐.

결혼은커녕 약혼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제외하면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엘리엇은 제 주인이 차라리 약쟁이거나 알코올 중독인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랬으면 차라리 이 한밤중에, 이 많은 사람을 괴롭게 하진 않았을 거 아닌가.

"키르르르~!"

“윽!”

또다시 검은 숲에서 마물의 비명이 들려왔다.

엘리엇은 반사적으로 같이 비명을 질렀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오직 한 사람만 알 것이다.

“……이러다 수도 인근에 마물씨가 마르겠군요.

주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황실에서 수당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엘리엇은 기막혀서 혀를 쯧 하고 찼다.

기사단 막내인 주드는 평소에는 쾌활하고 귀여운 녀석인데, 가끔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 무리수를 던지곤 했다.

엘리엇은 조금 씁쓸해졌다.

"어쩐지 불안하다 했더니.”

전날 밤, 줄리엣을 데리러 기차 역으로 갔던 레녹스는 혼자 돌아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계속 저 상태였다.

마물이 나오는 수도 인근의 숲 숲에 틀어박히더니, 닥치는 대로 썰어 대고 있는 것이다.

“쯧. 그걸 또 뻔하게 본인들만 모른다니까, 또.”

아마 줄리엣 본인조차 자각하지 못했겠지만 칼라일의 일상은 서서히 그녀로 중독된 것이다.

그리고 줄리엣이 떠나자 칼라일공작은 어쩔 줄 모르면서 숲에 틀어박혔다.

“....… 차라리 술을 드셨으면 좋겠군.”

"아니면 들어가서 잠이나 주무시든가요.”

잊혀진 줄리엣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