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2. 줄리엣의 연인.
“....… 레녹스, 제발."
차디찬 돌바닥 위,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가 흐느껴 울고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의 주변으로 나비 형태의 푸른빛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나비는 평소와는 달리 간신히 반짝이며 날개를 겨우 움직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연갈색 머리칼을 가련하게 늘어뜨린 여자는 그의 발치에서 애원했다.
보는 사람이 절로 애처로울 만한 자태였으나 비딱하게 턱을 괴고 그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녀가 아는 어떤 수를 쓰더라도 한번 차갑게 식어 버린 연인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조르지 않을게요.”
사랑이 아닐지라도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
처음부터 그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녀는 결국 마음을 지키지 못했다.
내심으로는 자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누구에게도 오래 곁을 허락하는 법이 없었던 남자가 조금이라도 특별하게 여기는 존재는 자신밖에 없다고.
참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그 역시 한 조각 마음이라도 내 줄 날이 올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인내했다.
그러나 그녀의 부질없는 희망은 한순간에 깨어졌다.
“……다시는, 그 여자 얘기는 하지 않을게요. 아니,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않을게요."
상냥한 말 한마디, 미소 한 번 보여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남자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무관심했으니까.
그러나 정말로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냉혹하기 그 지없었던 남자가 오직 한 사람에게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자가 다정히 웃어 주는 그 상대는 그녀가 아니었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허락하는 그의 옆자리는 결코 제 차지가 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제야 모든 것이 처음부터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너무 늦게.
“그러니까 레녹스, 우리 아기만은…….”
“줄리엣 모나드.”
더는 못 들어 주겠다는 듯, 남자가 말을 잘랐다.
얄팍한 인내심으로 우는 여자를 참아 주는 것도 거기까지였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가볍게 치켜올렸다.
물기 어린 눈으로 그녀는 간절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를 마주 내려다보는 것은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붉은 눈뿐이었다.
"분명 내가 경고했을 텐데,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자존심을 버리고 마지막으로 애원했건만, 돌아온 것은 귓가를 파고드는 차가운 비웃음뿐이었다.
“착각하면 곤란하지. 언제부터 ‘우리’ 였었지?”
*
헉.
줄리엣은 꿈에서 깨어나 눈을 반짝 떴다.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덜컹덜컹.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진동과 낯선 천장. 그리고 작은 1인용 침대가 간신히 줄리엣을 현실로 끌어내렸다.
꿈에서 깨어나고 나서도 그녀는 한참 동안 멍하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착각하면 곤란하지.”
차가운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명히 울리는 것 같았다.
'아니야, 나는.'
줄리엣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도망쳤잖아.'
그렇다. 이곳은 더 이상 그 남자의 곁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조금 전은 그저 일어나지 않은 악몽에 불과했다.
'그냥 꿈이잖아.'
회귀 전에도 겪은 적 없고, 지금의 삶에서도 겪을 리 없는.
이런 악몽쯤은 익숙했다.
'그러니까 괜찮아.'
스스로를 그렇게 다독이며 줄리 엣은 습관적으로 몸에 지니고 있던 진주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차갑고 매끄러운 진주의 표면 감촉이 안도감을 주었다.
목걸이라기보다는 작은 진주들을 길게 엮어 만든 로사리오에(로사리오: 묵주 기도를 드릴 때 쓰는 성물) 가까운 물건이었다.
끝에 십자가 대신 자그마한 은색 열쇠가 펜던트처럼 달린 것을 빼면.
알이 작은 진주라 그리 대단치는 않지만 줄리엣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값진 물건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 모나드 백작부인의 유품이었기 때문이다.
줄리엣은 무심코 목걸이의 한 귀퉁이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안쪽에 정교하게 새겨진 글씨를 보지 않고도 읽을 수 있었다.
'릴리안 세네카.'
릴리안은 어머니인 모나드 백작부인의 이름이었다.
줄리엣이 알기로, 어머니의 결혼 전 이름은 '릴리안 세네카'가 아니라 '릴리안 메이페어’ 였다.
'그럼 세네카는 대체 어디서 나온 이름이지?'
줄리엣은 궁금했지만 줄리엣은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았다.
'좀 더 물어볼걸.’
줄리엣이 어머니의 가문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동부 출신이라는 것, 신분이 낮고 한미했다는 것.
가족들이 거의 다 죽어서 고아나다름없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첫눈에 반했다며 열렬한 구애를 해서 어머니 가 청혼을 승낙했다고 했던가.'
실제로 줄리엣은 한 번도 외가 식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없었다.
'지나가듯 기사의 딸이었다고 들은 것도 같지만..….’
놀랍게도 줄리엣은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줄리엣이 동부로 떠나기로 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제국의 귀족 연감을 샅샅이 뒤졌지만 이상하게도 세네카라는 가문은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귀족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줄리엣은 그제야 생각했다.
신분이 다른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경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혈통이 트집잡히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래서 평민 중에 몰락 가문의 족보를 적당히 사들인 다음 결혼하는 경우도 있었다.
'무리도 아니지.'
제국의 수도는 서쪽에 치우쳐 있고 수도 사교계의 귀족들은 수도를 벗어나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동쪽 출신 귀족이라고 하면 그냥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친구들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들 역시 모나드 백작 부인이 된 후에 사귄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결혼 전의 릴리안이 정확히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오랫동안 백작가에서 일한 하인들도 돌아가신 백작 부인의 가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며 송구해했다.
최소한 수도에는 릴리안 세네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다음, 줄리엣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세 평 남짓한 아담한 1인용 객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쪽 면을 꽉 채운 커다란 창문 밖으로 빠르게 바깥 풍경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줄리엣은 아무렇게나 눈가를 훔치고 침대에서 내려와 잠자리를 정리했다.
똑똑.
"일어나셨습니까, 손님?
손님? 좋은아침이에요!”
때마침 문 두드리는 소리에 객실 문을 열자 바깥에 수건을 든 승무원이 서 있었다.
“뜨거운 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침 식사는 지금 준비해 드릴까요?”
줄리엣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소녀는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쾌활한 물음에 줄리엣은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준비를 부탁한 다음 줄리 엣은 짐 가방을 꺼내 옷을 갈아입었다.
줄리엣은 의식적으로 즐거운 생각을 떠올리려 애썼다.
찝찝한 악몽과 전날 밤의 여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있었다.
뭐가 있을까. 뭔가 밝고, 활기찬 생각은.
덜컹이는 열차에서 잠을 잔 것은 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여행하는 것도.
옷가지를 정리하다 말고 줄리엣은 문득 차창 밖을 응시했다.
다 큰 미혼의 아가씨가 시중드는 하녀도 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몹시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줄리엣은 1인용 객실을 빌리고, 남편을 만나러 가는 젊은 부인이라고 적당히 둘러댔다.
열차의 승객 명부에 적힌 그녀의 이름은 릴리안 세네카.
줄리엣은 어머니의 처녀 적 이름을 쓰면 뒤를 밟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모를 일이었다.
운이 좋으면, 동부에서 '릴리안세네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 수도 있으니까.
긴 머리를 대충 빗어 내리며 줄리엣은 신분증에 적힌 위조된 신분을 곱씹어 보았다.
설정상 릴리안 세네카의 남편은 동부 관문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결혼 3년차였지만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아 둘 사이에 아이는 없었고 아직은 신혼에 가까웠다.
세네카 부인은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사람답게 얌전하고 노출이 없는 무채색 드레스를 즐겨 입는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드레스는 자세히 보면 레이스와 프릴을 고급으로만 쓴 꽤 사치스러운 의상이었다.
세네카 부인의 집안은 대대로 포목점을 운영했고 그래서 옷가지만큼은 신분에 비해 질 좋은 것이어도 상관없었다.
줄리엣은 가짜 신분이 퍽 마음에 들었다.
신분에 걸맞게 줄리엣은 머리를 단정히 하나로 틀어 올리고 검은 베일을 썼다.
행여나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지만.
'세네카 부인은 음전하니까 그렇다고 치지, 뭐.’
머리를 정돈하던 줄리엣의 시선이 문득 작은 짐 가방에 가 닿았다.
아차.
'다 두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줄리엣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