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
제기랄.
일이 복잡하게 되었다.
장례식이 열리는 묘지를 향해 빠르게 걸으며 가스팔 남작이 씨근거렸다.
'멍청한 놈들이. 그깟 열쇠 하나도 못 훔쳐서………!'
근본 없는 화적 놈들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그 화적 놈들이 일을 제대로 하기만 했어도 그는 지금쯤 열쇠따위는 팔아 치우고 남해의 별장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빚쟁이들에 에쫓기고 수도 경비대의 조사까지 받는 신세였다.
현장을 떠났던 직후, 가스팔은 숨이 붙어 있던 줄리엣을 살려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부랴부 랴 그곳으로 돌아가 봤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온통 피가 말라붙은 자국뿐이었다.
가스팔이 돈을 주고 고용한 화적 떼는 행방이 묘연했고 모나드백작 부부의 시신과 줄리엣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뭔가 소식을 들은 것은 그 일이 있고 꼬박 나흘이 지난 뒤였다.
줄리엣이 기억을 잃은 채로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다. 부모의 시신과 함께.
'전부터 그 계집애가 목숨 질긴 줄은 알았지만.'
3년 전 낙마 사고 때처럼, 또다시 살아 돌아올 줄이야.
충격으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돌았지만 가스팔은 불안에 떨었다.
줄리엣이 입을 열면 가스팔을 범인으로 지목할 것이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줄리엣이 살아돌아온 바로 그다음 날, 수도 경비대에서는 가스팔을 소환했다.
슬슬 가스팔이 백작 부부의 죽음에 연관되어 있다는 소문도 퍼졌다.
역시, 줄리엣을 살려 둔 게 화근이었던 것이다.
'미리 알리바이를 만들어 두길 잘했지.’
약삭빠른 가스팔은 화적 떼를 고용한 직후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언할 증인들도 만들어 놓았다.
가스팔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은 죄가 없다며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그날 그곳에 있었던 화적 떼가 깨끗이 증발했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직 줄리엣의 증언뿐이었다.
예상대로 수도 경비대는 그것만으로는 그를 법정에 세울 수 없다며 그를 풀어 줬다.
만약 그들 중 하나라도 살아서 가스팔이 이 일의 주모자라고 증언했더라면…….
가스팔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대체 화적들은 어디로 갔으며, 그 계집애는 어떻게 멀쩡한 몸으로 돌아온 걸까?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가스팔이 고용했던 화적들은 질 나쁘기로 유명한 무뢰배였다.
그런 놈들이 갑자기 죄를 뉘우치고 동정심을 발휘해 줄리엣을 곱게 보내 주기라도 한 걸까?
“늦으셨네요, 가스팔 숙부님."
가스팔은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너, 너…….”
어둑어둑한 묘지 한가운데 검은 드레스를 입은 줄리엣이 홀로 서 있었다.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충격이 더했다.
어딘가 한군데는 잘못되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상복을 입은 줄리엣은 조금 창백한 것을 빼면 지나치게 멀쩡했다.
“장례식은 다 끝났어요. 조문객들도 돌아갔고요."
뎅그렁, 뎅그렁.
때마침 신전에서 망자를 위해 울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 오늘은 죽은 모나드 백작 부부의 장례식이었고, 백작부부가 비극적 죽음을 맞은 지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경악한 가스팔이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자 줄리엣이 비웃듯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노, 놀라기는 누가 놀랐다는 거야!"
“제가 살아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그게 무슨 소리냐. 설마."
가스팔 남작은 주변을 한 바퀴 휘 둘러보았다.
대낮임에도 먹구름이 잔뜩 낀 궂은 날씨였다. 천둥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번개가 치는지 이따금씩 하늘이 번쩍거렸다.
줄리엣의 말대로 조문객들은 모두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줄리엣과 가스팔 남작을 제외하면 묘지에 산 사람이라곤 멀찍이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묘지기 노인이 전부였다.
“정말로 내가 네 부모의 죽음에 연관 있다고 생각하는 게냐?"
보는 눈이 없는 걸 확인한 가스팔 남작은 되레 큰소리를 쳤다.
“마침 잘됐다! 네가 나를 범인 이랍시고 고발하는 바람에 내가 어떤 고초를 겪었는 줄 알기나해?"
말하다 보니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저 계집애가 어떻게 살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스팔 남작의 기억 속 줄리엣은 순진한 어린애였다.
열다섯 살 생일 선물로 받은 망아지의 안장 밑에 못이 있는 것도 모르던 멍청하고 다루기 쉬운 어린애.
일이 좀 꼬이기는 했다만, 아직은 괜찮았다.
마침 형 부부가 죽어 줬으니, 그가 줄리엣의 후견인이 되면 백작가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
겨우 열여덟 살 아닌가. 큰소리 쳐서 기를 죽여 놓으면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계산을 끝낸 가스팔은 완전히 자신감을 되찾았다.
“증거 있어? 증거도 없이 사람을 그렇게 몰면, 너 이 녀석아!
무고죄라는 게..…."
“아, 증거요.”
별안간 줄리엣이 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계시네요, 숙부님.”
차디찬 비웃음에 가스팔은 움찔했다.
“고작 그딴 걸 얻자고 내가 당신을 여기로 끌어 냈을까.”
“그, 그게 무슨…….”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가스팔은 생각했다.
그가 장례식장에 온 것은 줄리 엣이 불러서가 아니었다. 형 부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수도 경비대가 다시 자신을 의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붉은 입술로 줄리엣이 싱긋 미소했다.
“약속할게요. 저는 숙부님을 절대 법정에 세우지 않을 거예요.”
“그, 그거 고맙구나.”
가스팔은 대꾸하면서도 주춤거 거리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검은 상복을 입은 계집애가 환히 웃는 게 어쩐지 섬찟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왜 치맛자락이 흔들리는 것인지.
게다가 먹구름이 끼었는데 왜 아까부터 번쩍거리는 빛이…….
아까보다 하늘이 어두워진 것 같다고 생각하던 가스팔 남작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그의 머리 위가 어두워진 것은 먹구름때문이 아니었다.
남작의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영롱한 빛을 뿌리는 나비 떼였다.
“왜냐하면, 그 재판은 영원히 열리지 못할 테니까요."
차분한 목소리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나비들이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으, 으아아악!”
경악하는 가스팔 남작의 눈에 그것들은 더 이상 영롱한 나비가 아니었다.
악몽에서도 본 적 없는, 입을 쩍 벌린 거대한 괴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가스팔 남작이 살아서 본 마지막 장면이 되었다.
거대한 나비 떼가 가스팔 남작을 향해 달려들고 그를 완전히 삼켜 버리는 동안 줄리엣은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챙그랑.
등 뒤에서 들린 소리에 줄리엣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지팡이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던 묘지기 노인이 지팡이를 떨어뜨린 것이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줄리엣은 그저 둘째손가락을 입술에 가볍게 가져다 댔다.
노인은 덜덜 떨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황급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줄리엣은 묘지를 가로질러 사뿐히 걷기 시작했다.
복수라고 할 만한 것을 마쳤지만 그 어떤 성취감이나 후련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되었네..'
줄리엣은 담담히 생각했다.
'바꾸지 못했어.'
열심히 노력했지만, 거의 다 이 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그녀자신밖에 없었다. 그 외엔 지킬것도 가진 것도 없었다.
이윽고 줄리엣은 걸음을 멈췄다. 묘지의 입구에 다다른 것이다.
거기에는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사두마차가 조용히 서 있었다.
아무런 문장도 새겨져 있지 않았지만 그녀가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시종이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줄리엣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순순히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에 앉아 있던 남자 역시 태연히 맞은편에 올라앉는 줄리 엣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여상히 물었다.
“북부로 돌아가시나요?”
“그래. 조건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나?”
대답하기에 앞서 줄리엣은 눈을 깜박였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과거처럼 흘러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그의 곁에 머물면 되는 일이 아닌가.
머물다가, 달리아가 등장하기 전에만 떠나면 되겠지.
줄리엣은 지쳐 버렸다. 아무 생각 없이 조용히 쉬고 싶었다.
고작 마음을 지키는 일 따위, 지금껏 겪어 온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줄리엣은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과거와는 달리, 눈앞의 남자에 에게 홀려서 자신을 잃지 않을 자신이.
“생각해 봤거든요.”
엿새 전, 줄리엣이 그에게 제안했던 거래의 조건은 간단했다.
“저는 전하께 쓸모가 있어요.
그렇죠?”
그가 누굴 만나 뭘 하든 간섭하지 않고, 애정을 갈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물의 능력을 제공하는 '편리한 연인이 되는 것이다.
그 대가로 줄리엣이 요구한 것은 두 가지 조건이었다.
하나는 가스팔 남작의 신병을 그녀의 손아귀에 넘겨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적어도 3년간 그의 곁에 머물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런 건 보통 거래라고 부르지 않지.”
줄리엣의 요구 사항을 들은 레녹스는 그렇게 말했었다.
양쪽의 조건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거래는 성립할 수 없다며, 좀 더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결정했나?"
“네, 계약서를 써 주세요.”
“계약서?”
“네. 전하와 저, 둘 중 누구라도 원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조건으로요.”
레녹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걸 본 줄리엣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건 거래 조건이 안 되나요?”
“안 될 것 없지."
줄리엣 모나드는 기묘하게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처연한 분위.
기의 여자였다.
파스텔 톤 드레스를 차려입고 연회장에 서 있을 때보다, 기이 하게도 검은 드레스를 입고 묘지에 섰을 때 섬뜩하리만치 아름답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여자를 물끄러미 보다가 레녹스는 문득 물었다.
“하나 묻겠는데, 이런 계약이 왜 필요한 거지?”
줄리엣의 핏기 하나 없는 파리한 피부, 가지런히 틀어 올린 긴 머리조차 연한 색이었다. 붉은 입술을 제외하고는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듯 아슬아슬한 인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섭도록 아름다웠다. 독기를 뿜어내는 꽃처럼.
“왜냐하면 제가……….”
온기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눈으로 줄리엣이 대답했다.
“첫눈에 반했거든요.”
조금도 사랑에 빠지지 않은 눈이었다. 장담컨대, 그가 들어본 고백 중 가장 성의 없는 호소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엘리엇.”
“예, 전하.”
마차 밖에서 기다렸다는 듯 공손한 대답이 들려왔다.
“펜과 ”
“펜과 종이를 가져와.”
그는 여전히 마주앉은 줄리엣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어 말했다.
“그리고 침실을 비워 두라고 전해, 동관의 그 방으로."
잠시 후, 마차는 북부를 향해 출발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