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22화 (19/229)

22화.

“거래?”

“네.”

레녹스의 입가가 드물게 시원스런 호선을 그렸다. 보기는 근사하다만, 줄리엣은 알고 있었다.

저건 비웃음이다.

하지만 줄리엣은 실망하지 않았다.

“저는 전하께 쓸모가 있어요.”

줄리엣은 한 발짝, 조심스레 그를 향해 다가갔다.

카우치에 등을 대고 앉은 레녹스의 시선이 줄리엣의 것보다 낮았다.

서 있는 줄리엣의 시선이 더 높았기 때문에 줄리엣은 레녹스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쓸모?"

"네, 보시다시피요.”

타이밍 좋게 줄리엣의 나비들이 어둠 속에서 날개를 반짝였다.

설마하니 아무도 용도를 모르던 백작 열쇠가 첫 번째 삶에서 대귀족들이 경쟁적으로 차지하려 애쓰던 아티팩트였을 줄이야.

그러나 레녹스는 여전히 차갑게 대꾸했다.

“덜떨어진 정령사는 필요 없어.”

차가운 말에도 줄리엣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한 발짝 더 레녹스가 앉은 의자로 다가갔다.

“덜떨어지지 않도록 배울게요.

가르쳐 주시면…….”

“가르쳐?

레녹스는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안지도 않는 여자를 가르치는 취미는 없어.”

줄리엣은 대답 대신 한 발짝 또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가까워지다 못해 둘의 무릎이 닿을 만한 거리였다.

“하지만 제 조건은 아직 듣지도 않으셨잖아요.”

“듣는다고 달라질 것 같지는 않군.”

“어제 말씀하신 마력을 닫는거. 그게 뭔지……."

줄리엣의 왼손이 레녹스가 앉아 있는 카우치의 등받이를 짚었다.

줄리엣은 조용히 물었다.

“가르쳐 주실래요?”

그로부터 닷새 뒤.

줄리엣은 황궁의 연회장 한쪽에 앉아 있었다.

“세상에, 모나드 양!"

수도에서 소문만큼 빠른 게 또 있을까.

상냥한 사교계 사람들은 혼자가 된 가여운 백작 영애를 찾아와 앞다투어 그녀를 위로했다.

“얘기 다 전해 들었어요."

"얼마나 상심이 많으시겠어요.”

쏟아지는 값싼 동정과 가벼운 관심들. 그리고 필연적으로 수군 거림이 뒤따랐다.

[다들 너를 많이 걱정하고 있어.

마지막 날 연회에는 참석할 거지?]

며칠 전에는 파티마가 저택으로 편지를 보냈다.

물론 줄리엣이 성치도 않은 몸으로 마지막 날의 연회에 참석한 것은 파티마의 편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줄리엣은 정작 연회장에 도착해서 파티마와 말 한 번 나누지 못했다. 그녀는 파티마가 말한 '다들이 누구였는지 궁금하다고 생각했다.

“독하기도 하지. 부모가 죽었는데 연회장에 올 정신은 있었나 보네요.”

왜냐하면 상투적인 위로를 건네고 돌아서기 무섭게 사람들은 하나같이 험담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청사슴 연회의 마지막 날이었다.

결국 줄리엣은 7일간 열리는 청사슴 연회의 첫날과 마지막 날에만 참석한 셈이었다.

평소라면 마지막 날의 블루벨 벨화관은 누구에게 돌아갈지가 최대의 관심사였겠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아무도 블루벨에는 관심이 없는

"증언만으로는 가스팔 남작을 을체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경비대에서는 그렇게 말했다.

가스팔 남작은 당연히 자신의 의혐의를 부인했다. 과거와 똑같이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언했다.

결국 줄리엣이 백작 부부를 살해하고 그녀를 납치한 화적들과 가스팔 남작을 연관 지을 고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아, 들었어요. 화적들이었다.

죠.”

“네, 백작 부부의 시신은 차마 눈 뜨고 못 볼 꼴이었대요.”

"그런데 혼자 살아 돌아왔다.

죠?”

“그럴 수도 있죠.”

목소리를 낮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어허, 모르는 소립니다. 화적들이 어떤 놈들인데.”

“경비대가 사창가에서 발견했다던데…….”

공식적으로 줄리엣이 발견된 곳은 그녀의 집 앞이었다. 공작가의 기사가 거기에 내려 주었으니까.

하지만 소문은 악의적으로 부풀려졌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살아 돌아왔겠어요.”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까."

“안 그래요, 글랜필드 양?”

실컷 떠들던 사람들은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파티마 글랜필드를 대놓고 지목했다.

커다란 괘종시계를 바라보았다.

청사슴 연회는 공식적으로 열두시 종이 칠 때 끝난다.

시곗바늘이 열한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줄리엣의 관심사는 오직 한 가지였다. 그 칼라일 공작이 사람을 보냈을까, 보내지 않았을까.

줄리엣이 공작가에서 돌아온 지는 닷새가 지났지만 칼라일 공작으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저와 손을 잡을 생각이 있으시다면, 청사슴 연회의 마지막 날 사람을 보내 주세요.”

줄리엣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어쩌면, 오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레녹스 칼라일이 그녀의 부탁을 거절한다면, 이곳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래도 걱정할 거 없어. 지금처럼만 하면 돼.'

어떻게든 그를 피해 다니며 엮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것처럼 말이다.

'방법을 찾아보자. 그리고 그 다음은…….'

그 다음엔 뭘 해야 하지?

막막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전생의 삶처럼 비참한 인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줄리엣은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뚜벅, 뚜벅.

삽시간에 고요해진 연회장을 유유히 가로지른 발걸음이 바로 제 앞에 멈춰 섰다는 것도.

그리고 지끈거리던 두통이 순간 말끔히 가셨다는 것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나직한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줄리엣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 전하?”

붉은 눈의 남자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자비로운 아가씨께 축원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줄리엣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칼라일이 청사슴 연회의 규칙대로 유치한 인사말을 읊고 있는 상황을.

그녀의 입술에서는 반사적으로 답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손목의 꽃송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줄리엣이 속삭이듯 말했다.

“거절당할 줄 알았어요.”

“왜?”

“귀찮은 일 싫어하시잖아요.”

순간 레녹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고개를 푹 숙인 줄리엣은 보지 못했지만, 레녹스는 손을 내밀었다.

"이쯤 하면 연극은 충분한 것 같군. 그만 나가지.”

그러나 줄리엣은 그 손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못 걸어요. 발목 때문에.”

“들어올 땐 어떻게 왔는데?”

“저기 시종장님이…….

줄리엣이 한쪽에 서 있던 시종장을 가리키자 레녹스의 눈썹이 비딱하게 치켜 올라갔다.

그녀의 말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레녹스는 뭔가 욕설 비슷한 걸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줄리엣은 그에게 안겨 연회장을 유유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부축해 줬다는 뜻이었는데.' 지금 와서 그렇게 정정하기엔 좀 늦은 것 같았다.

줄리엣은 그의 어깨 너머로 경악한 사람들의 표정을 생생히 볼 수 있었다. 그 틈에서 얼핏 당황한 파티마의 얼굴을 본 것도 같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줄리엣은 직감했다.

유년 시절과는 영영 작별이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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