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21화 (18/229)

21화.

*

수 시간 뒤, 줄리엣은 푹신한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그 사이 열은 말끔하게 내려 있었다. 몸 상태가 생각보다 멀쩡해지자 그녀는 혹시 그 모든 일이 꿈은 아니었을까 기대해 보았다.

(떴다. 눈.)

(계약자.)

물론 착각에 불과했다.

(인간. 남자. 없는.)

(싫은. 여기.)

(나가자. 빨리.)

그런데 줄리엣에게 말을 걸어오는 나비들은 어제보다 훨씬 목소리가 작고 어눌했다.

마치 갓 말을 배운 생물처럼 더듬더듬 단어를 나열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상하다. 분명 유창하다 못해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떠들어 댔던 것 같은데.’

몸을 일으킨 줄리엣은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

그래도 생각보다는 양호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물어뜯은 입술이나 충혈된 눈, 상처 난 손정도를 제외하면 놀랍도록 멀쩡했다.

격한 운동을 하고 난 다음 날처럼 온몸이 아픈 것치고는 멀쩡했다는 뜻이다. 어제 다친 건지 발목이 시큰했지만 그래도 절뚝거리며 돌아다닐 정도는 되었다.

줄리엣은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침실 밖으로 나갔다.

“헉.”

삐걱.

갑자기 침실 문이 열리자 놀란듯, 문 앞에 의자를 비스듬히 기대어 놓고 앉아 있던 청년이 놀라서 다급히 일어났다.

“일어나셨군요?”

곱슬곱슬한 주황색 머리칼이 인상적인 청년이었다.

주드 헤이온.

줄리엣은 이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황실에 충성하는 헤이온가의 막 내아들이면서도 불쑥 북부 공작가에 충성을 바치기로 한 주드는 수도에서도 제법 유명했다.

주드 역시 줄리엣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음, 그러니까 모나드 양. 배고 프실 텐데 먼저 식사를, 아니 의사부터….”

"아뇨.”

"어, 말할 줄 아시네요?”

주드가 씩 웃었다. 그러나 줄리 엣은 웃지도 않고 곧장 물었다.

"어디 계세요?"

“아, 공작님은 출타 중이십니다.”

“그거 말고요.”

그거?

주드는 순간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웃기 않기를 백번 잘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저희 부모님이요.”

주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사라졌다.

“보여 주세요.”

“저, 아가씨. 보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부탁드려요.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요.”

창백한 얼굴로 인형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줄리엣의 고집을 을꺾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공작가의 주치의며 하녀장, 부기사단장까지 온갖 직함을 단 사람들이 달려 나와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부단장인 밀란이 한숨을 푹 쉬며 지시했다.

“열어 드려.”

서늘한 지하 밀실의 문이 열렸다.

그곳엔 전날 밤 공작가의 사람들이 임시로 수습해 놓은 시신이 놓여 있었다.

줄리엣은 천천히 관 곁으로 다가갔다.

나란히 관 속에 누워 있는 모나 드 백작 부부의 표정이 잠든 것처럼 평온하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시신을 확인한 그녀가 졸도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게 힐끔거리던 밀란은 의외로 담담한 줄리엣을 보고 조금 안도했다.

줄리엣이 물었다.

“저, 잠시만 혼자 있어도 될까요?”

“아, 예. 필요하시면 부르시죠.”

밀란은 그녀가 애도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 주었다. 그가 문을 닫고 돌아 나온 순간, 안에서 처절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레녹스 칼라일이 그녀의 존재를 다시금 떠올린 것은 꼬박 한나절이 더 지난 한밤중의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지.'

고작 그 정도였지만.

“그래서, 어딨지?”

“예?”

레녹스는 공작가의 가신들이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면 더 신경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어제데려오신 아가씨라면, 저...”

그러나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어디에 있다고?"

“?”

대답을 들은 레녹스는 기가 막 혔다.

수도의 공작저는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대부분의 시간 동안 북부의 공작성에서 머물기 때문에 그리 많은 가구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공작저에는 쓰지 않는 공간이 많았다.

예를 들어, 조명 하나 놓지 않은 어둑한 별관이 그랬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별관 거실로 들어선 레녹스는 약간 질린 기분이 되었다.

임시로 관을 안치해 둔 문 바로 앞에서, 오도카니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여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뭘 하고 있지?"

표정을 지었다.

“지금도 말이 안 나오나?"

“...……아뇨. 이제 괜찮아요."

신기하게도 목소리가 돌아와 있었다.

목을 매만지자 줄리엣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레녹스가 말했다.

“조심하는 게 좋을걸. 몸 주인이 제 역할을 못하면, 저것들이 널 삼켜 버릴 테니까.”

“몸 주인?”

“그럼 저것들이 누구 목소리를 빌려 떠든다고 생각했지?”

줄리엣은 갑자기 오싹해졌다.

생각해 보니, 그녀의 귓가에 재잘거리는 목소리들은 그녀 자신의 목소리와 비슷한 것도 같았다.

"나를 보자고 했다던데.”

“아, 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줄리엣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곧장 용건을 꺼내는 대신 레녹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과거의 삶에서 사랑했던 남자를 다시 보는 것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정작 그는 그녀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데.

'당신이 미워.’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감정이 되살아났다. 원망과 애증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그때의 레녹스 칼라일과 지금 눈앞의 남자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란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 줄리엣은 하루 종일 부모님의 관 앞에 앉아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또 그런 일을 겪는 건 싫어.'

이대로 흘러간다면 어차피 또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달리아'가 나타나는 순간 그녀는 버려질 것이다. 첫번째 삶에서 그랬던 것처럼.

줄리엣은 그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는 했지만, 그에게 줄리엣은 철저히 도구에 불과했다.

'그러면 결국에는 또 똑같은 꼴을 당하겠지.'

하지만 줄리엣에게는 지금 레녹스가 필요했다.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네.”

줄리엣은 어젯밤 레녹스가 말했던 “마력을 닫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기억해 냈다.

전생의 삶에서 달리아가 그와 와처음 만났을 때도 똑같은 일이 있었으니까.

그것은 아직 달리아가 공작성에 객식구로 머물던 무렵이었다. 줄리엣은 달리아의 시중을 드는 하녀들의 대화를 엿들은 적 있었다.

"바보야. 마력을 다스렸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몰라? 두 분이 동침하셨다는 뜻이잖아!”

처음으로 마력을 각성한 사람은 유난히 몸에 흐르는 마력이 불안정하게 날뛰었다.

마법사들에게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는 것이 마력이었다.

하지만 아직 마력이 뭔지, 그 존재를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는 초보자들에게는 꽤 위험했다.

정말로 둔한 경우에는 마력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기까지 5, 6년의 시간이 소요되기도 했다.

자칫 당황하면 그대로 마력을 을닫지 못해서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그래서 마력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상대와 지속적인 스킨십이 필요했다.

불가해한 힘을 가진 가문의 유물은 나중에 닥칠 역경을 위해 꼭 필요하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물건을 가지고 사라진 사람이었다.

'달리아 프란’이름부터 사랑스러운 꽃과 같은 그녀는 레녹스의 소꿉친구이자 남매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레녹스의 아버지가 죽고 가주 자리를 놓고 다툼이 일어나자, 공작가의 하인이었던 달리아의 부모는 딸을 데리고 도망쳐버렸다.

‘보물도 함께 말이지.'

전쟁터에서 열심히 구른 레녹스는 돌아와 공작위를 되찾은 직후부터 보물의 행방을 쫓았다.

아마 지금도 달리아를 찾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줄리엣은 알고 있었다.

레녹스가 그 보물을 다시 손에 넣는 것은 7년 뒤, 죽은 줄 알았던 달리아와 다시 재회하는 때였다.

‘하지만 여기서 달리아 이야기를 하면 안 되겠지.'

그녀가 공작의 최측근조차 모르는 이야기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설명할 방도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레녹스 칼라일의 눈이 담담히 반짝였다.

“그걸 빌미로 협박이라도 할 생각인가?”

협박이라니.

“저는…….”

줄리엣은 말을 신중히 골랐다.

“전하와 거래를 원해요.”

잊혀진 줄리엣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