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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17화 (17/229)

17화.

말에서 내려 수풀을 제치고 달려가려던 주드는 멈칫했다.

유적의 돌바닥엔 온통 검고 찐득한 것이 묻어 있었다. 누가 일부러 유화 물감을 마구잡이로 잔뜩 뿌려 놓은 것처럼.

당연히 물감은 아니었다.

말라붙은 피였다.

**

“엉망진창이군.”

그건 상당히 온건한 표현이었다.

저쪽 구석에 시신 네 구가 있기는 했지만, 바닥을 적신 피는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부부로 보이는, 잘 차려입은 중년 귀족 남녀의 시신과 그들의 하인과 마부로 보이는 시신까지.

모두 네 사람.

‘그럼 이 여자는 저 부부의 딸인가?’

레녹스는 바닥에 누운 여자를 심드렁히 내려다보았다.

묘하게 낯익은 듯도 했다.

아름다웠을 연푸른색 드레스 자락이 피가 묻어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피도 아니다.

애초에 이 정도 피를 흘렸으면 살아 있을 수도 없겠거니와, 그녀의 몸에는 눈에 띄는 큰 상처도 없었다.

“주군, 시신들을 수습할까요?"

기사 하나가 레녹스의 의견을 물었다.

그가 대답하려던 찰나, 여자의 입에서 절박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윽.”

'건드리지 마!’ 줄리엣은 그렇게 외치려고 했다.

사실은 아까부터, 이 남자가 등장했던 순간부터 그녀는 소리치 결국 그의 명대로 기사들은 멀찍이 물러났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한 거리가 되자 남자의 시선이 줄리엣을 향했다.

"너 말이야.”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을 짚은 그는 줄리엣과 눈높이를 맞추듯 자세를 낮췄다.

“네가 무슨 짓을 벌인 건지는 는알고 있나?”

어쩐지 조금 재밌어 하는 투로 남자가 말했다.

그러나 바람과 달리,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한 헐떡임 뿐이었다.

줄리엣은 충혈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런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남자가 조금 웃은 것 같았다.

“시신은 건드리지 마라, 하.”

“예?”

“아무것도 손대지 말고, 전부 열 걸음 떨어져.”

줄리엣은 대답 대신 그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이었어도 줄리엣은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몰랐으니까.

정신을 차려 보니 줄리엣은 이곳에 혼자 남겨져 있었다.

혼자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작은 빛무리들이, 정확히는 아주 작은 나비 모양의 빛들이 반짝이면서 주위를 나풀거렸다. 꼭 살아 있는 생물처럼.

(계약자야.)

(들려?)

주변을 맴도는 이 손톱만 한 빛 무리들이 아마 목소리의 정체인 듯싶었다.

재잘거리는 목소리는 그녀가 정신을 잃기 전보다 수가 늘어 있었다.

시끄럽다고 되뇌어도 소용없었다.

온몸에 열이 끓고 꼭 팔다리가 부러진 것처럼 손을 까딱하기도 어려웠다. 뭐가 잘못됐는지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 도와줄 사람을 을기다렸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것이 이 남자였다.

레녹스 칼라일. 그녀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피해 보고자 했던 사람.

이전의 삶에서 남자는 줄리엣을 구원했고 줄리엣은 그를 열렬히 사랑했다. 그리고 줄리엣의 삶은 남자의 손에 의해 끝났다.

“쯧.”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가볍게 혀를 찬 남자가 줄리엣의 이마를 짚었다.

크고 서늘한 손이 닿자 줄리엣은 그 손에 뺨을 부빌 뻔했다.

'아.'

신기한 일이었다.

겨우 손이 닿았을 뿐인데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들던 목소리들이 깨끗이 사라졌다.

삽시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그것만으로도 한결 두통이 가라 앉았다. 대신 몸이 뜨겁다는 건 더 잘 느껴졌다. 의식이 몽롱한 것은 열 때문인 모양이었다.

“하."

'이것 봐라.’ 그녀를 살피던 레녹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너, 꽤나 터무니없는 걸 불러냈군.”

뭘 불러내?

“한데 그런 것치고는."

남자의 시선이 여전히 그녀의 주위를 팔랑거리며 맴도는 작은 빛무리들에 가 닿았다.

“마력을 닫을 줄도 모르고, 저것들을 통제할 줄도 모르고."

기분 탓일까. 손톱만 한 나비모양의 빛무리들이 순간 움찔한 것 같았다.

“그리고 마력을 이렇게나 줄줄 흘리고 있으니.”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빙긋 웃었다.

“곧 죽겠군.”

…… 뭐?

'이 나쁜 놈아!'

순간 눈물이 찔끔 났다.

'그래도 조금은 도와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해가 안 가나?”

뭐가 그리 구경거리라고, 레녹스 칼라일은 아예 줄리엣의 곁에 자세를 고쳐 앉아 다정하게 속삭였다.

“마력을 닫지 않으면 죽는다고, 너.”

말하는 투를 보아하니 그는 아무래도 '마력을 닫는 방법이 뭔지 알면서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는 게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뭔가를 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줄리엣은 몸이 너무 아파서 엉엉 울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흐읏.”

목이 뭔가 잘못된 건가.

울음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곁에 앉은 그가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꼭 약 올리듯이.

얄궂게도 서늘한 감촉이 기분좋았다.

줄리엣은 직감했다.

'이 남자는 나를 죽게 내버려 둘 거야.'

왜냐하면, 그녀가 아는 레녹스칼라일은 이유 없는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니까.

무감한 눈만 해도 그랬다. 약간의 호기심을 담은 붉은 눈은 참 과분하게 예뻤지만 그의 표정은 권태롭기 짝이 없었다. 조금 신기한 동물을 보는 듯한 시선이 전부였다.

'....…원래 이런 놈이었잖아.'

알고는 있었다.

전생의 그는 세상에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처럼 잔인하게 굴었다.

그래도 어쩐지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이렇게 될 거라면,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피해 다녔던 걸까.’

호흡이 가빠지고 의식이 아득해졌다. 스르르 눈을 감은 줄리엣은 이내 완전히 의식을 놓아 버렸다.

이윽고 뺨을 감싸는 누군가의 의손길이 느껴졌다. 입술이 슬쩍 닿았다 떨어졌던 것도 같았다.

“도와주는 건 한 번뿐이야.”

웃음기 섞인 속삭임을 들은 것도 같다고, 줄리엣은 생각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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