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7년 전 여름.
“칼라일 공작이십니다.”
줄리엣의 세상이 뒤집혔다. 그리고 그녀는 그 해 여름을 영원히 잊지 못했다.
* * *
“줄리엣! 듣고 있어?"
뾰족한 목소리에 줄리엣은 뭔가를 열심히 쓰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미완성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허리에 양손을 얹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가봉 핀을 잔뜩 꽃은 채로.
“아, 미안. 뭐라고 했어, 파티 마?”
파티마의 미간이 구겨졌다.
“뭐가 가장 예쁘냐고 물어봤잖아!”
“아하."
줄리엣은 손으로는 급히 편지지를 정리하면서 파티마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음, 내 생각엔……."
파티마의 뒤편에 지친 표정으로서 있던 의상실 직원들이 재빨리 드레스 하나를 흔들며 소리 없는 신호를 보냈다.
팔락팔락.
“...… 분홍색?”
“그렇지?”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파티마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출장 나온 의상실 직원에게 지시했다.
"분홍색으로 할게요. 내일 오전까지 가능하겠죠?”
“물론입니다, 글랜필드 영애.”
“일곱 시에 무도회 시작이니까, 정오까지는 도착해야 해요!"
세 시간 만에 글랜필드가의 거실을 벗어나게 된 의상실 사람들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최근 제도에서 유명한 카미유 의상실의 직원들로, 오늘은 파티마의 요청으로 글랜필드가를 방문한 거였다. 열여덟살의 파티마 글랜필드 백작 영애는 줄리엣의 동갑 친구였다.
드디어 드레스를 결정하고 기분이 좋아진 파티마는 하녀를 시켜 차를 가져오게 했다.
하녀가 트레이를 가지고 왔을 때는 줄리엣도 가져왔던 일거리를 모두 정리한 다음 얌전히 거실에 앉아 있었다.
"너는? 드레스 안 골라?"
쿠키를 하나 집어 들며 파티마가 떠보듯이 물었다.
“응. 나는 괜찮아.”
“그럼 내일은 뭘 입고 가는데?"
“엄마 드레스를 고쳐서 입기로 했어.”
“고쳐서…… 입는다고?"
파티마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그녀에게 드레스를 고쳐 입는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선택지였다.
“응. 그러려고.”
정작 줄리엣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바야흐로 늦여름의 사교 시즌이었다.
갓 열여덟 살 생일을 지나 처음으로 여름 무도회 초대장을 받은 아가씨들이라면 누구나 첫 블루벨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이고 싶어 했다.
파티마는 선심 쓰듯 말했다.
“원하면 너도 같이 드레스 골라도 돼. 우리 아빠한테 말씀드리면 네 것도 사 주실걸."
그러자 떠날 채비를 서두르던 의상실 직원들이 움찔했다.
정작 줄리엣은 아무렇지도 않게 싱긋 웃었다.
"아냐. 우리 엄마 드레스도 예쁜걸. 내일 보여 줄게.”
그런데 옆에서 짐을 챙기던 의상실 주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어, 모나드 백작 부인의 드레스라면, 혹시 연한 수레국화색인가요?"
“맞아요. 어떻게 아세요?”
“백작 부인의 안목은 훌륭하시죠. 분명 아가씨께도 잘 어울릴 거예요.”
가만히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파티마는 입을 비죽거렸다.
'재미없어.'
어느 날부터 줄리엣은 퍽 재미없는 친구가 되어 버렸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줄리엣은 파티마가 수도로 이사와서 사귄 첫 번째 친구였다.
파티마의 아버지는 유서 깊은 가문들과 친분을 쌓고 싶어 했고, 모나드 백작가는 제국의 개국공신 가문이었다. 때마침 모나 드 백작가에는 파티마와 동갑인 외동딸이 있었고, 그게 줄리엣이었다.
아버지의 당부대로, 파티마는 줄리엣을 집으로 자주 불러서 놀았다.
평소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얄미운 오빠 놈이 줄리엣이 오는 날이면 괜히 기웃거리는 게 꼴보기 싫기는 했지만 줄리엣의 방문은 그걸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정확히는 파티마가 새 드레스를 고르는 동안, 줄리엣이 부러운 눈으로 훔쳐보면서 드레스 장식을 몰래 만지작거리는 걸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랬는데.….
‘언제부터였더라?'
줄리엣이 변한 것은 3년 전쯤이었다.
열다섯 살 무렵, 줄리엣이 크게 다친 일이 있었다. 그 사고로 줄리엣은 거의 죽을 뻔했다.
그 이후로 줄리엣은 이상해졌다.
처음에는 병상에 오래 누워 있어서 기운이 없어진 것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가끔 보면 그녀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더 이상 파티마를 부러워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드레스 고르는 걸 도와 달라는 핑계로 기껏 초대하면 줄리엣은 책이나 들여다보고 뭔가 쓰느라 바빴다.
'그래 봤자 가난한 백작가 주제에.’
파티마는 입을 비죽거렸다.
글랜필드 백작가는 돈을 벌어 백작위를 산 신흥 귀족이었다.
파티마는 자랑하기를 좋아했지만, 좀 자라고 보니 사교계 사람들은 글랜필드가를 졸부라며 은근히 업신여겼다. 반면 가난하지만 유서 깊은 모나드 백작가에는 애쓰지 않아도 파티의 초대장이 꾸준히 들어왔다.
파티마는 그게 내심 언짢았다.
“내일 무도회에 프리실라 공녀님의 귀한 손님이 온대.”
“그래? 프리실라 공녀가?”
줄리엣이 짐을 챙기며 성의 없이 대꾸했다.
프리실라 공녀는 황제의 조카딸로 사교계에서는 공주 대접을 받았다.
그런 그녀에게 관심 없어 보이는 줄리엣이 얄미워 파티마는 입을 삐죽였다.
"하긴, 넌 누가 오든 관심 없지?”
“응?”
“넌 이미 잘생긴 약혼자가 있잖아.”
순간 줄리엣이 멈칫하더니 굉장히 뜨악한 표정으로 파티마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생각해?”
“뭐가?”
“내 약혼자가 잘생겼어?"
줄리엣의 약혼자, 빈센테는 후작가의 차남으로, 저 나이 또래에서는 훤칠한 외모로 주목을 많이 받았다.
“…… 너 요즘 짜증나. 알아?"
파티마는 줄리엣을 향해 인상을 쓰며 쏘아붙였다.
하여간, 감사할 줄을 모른다니까.
줄리엣은 그런 파티마를 물끄러미 보다가 달래듯이 말했다. 또박또박 단호하게.
"파티마, 너는 나중에 빈센테보다 훨씬 높은 사람과 결혼하게 될 거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아.”
“흥.”
줄리엣은 웃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지만 파티마는 그걸로도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 집 마차 빌려줄까?”
* * *
글랜필드가의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줄리엣은 유리창에 비치는 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젖살이 남은 흰 뺨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앳된 인상이었다.
사실 줄리엣은 앞으로 일어날 미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파티마에게 말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더.
파티마는 미래에 황자비가 되겠지만, 줄리엣은 불과 스물다섯살에 죽는다. 그것도 그녀가 절 절하게 짝사랑하던 남자의 손에.
‘아니, 그냥 죽기만 하면 다행이게.’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 처음 사는 삶이 아니었다.
줄리엣은 아주 오래 전 비참하게 죽었던 기억을 가지고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왔다.
줄리엣 모나드의 첫 번째 삶은 끔찍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줄리엣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정확히는 그녀의 숙부, 가스팔 남작이 그녀의 후견인이 되면서부터였다.
"이게 다 널 위한 결정이란다.
줄리엣”
첫 번째 삶에서 줄리엣은 다섯번 결혼했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조카를 위한답시고 후견인이 된 가스팔남작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미성년인 조카를 세도가와 결혼시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줄리엣은 숙부가 시키는 대로 면사포를 썼다.
그녀의 첫 남편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여든 넘은 노인이었다.
그나마 줄리엣의 첫 남편은 금방 죽었다.
줄리엣은 부유한 과부가 되었지만 가스팔 남작은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줄리엣의 미모와 출신이 돈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본격적으로 결혼 장사를 시작했다.
이후 줄리엣은 네 번 더 결혼했다.
돈과 권력을 빌려주고 명문가의 나이 어린 신부를 사는 자들이 제대로 된 인간일 리 없었다.
가스팔 남작이 조카를 팔아 권력자에게 아첨하는 동안, 줄리엣은 반복된 학대로 피폐해져 갔다.
타고난 아름다움은 독이었고 몸도 정신도 망가져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결국 견디다 못해 목숨을 끊으려던 순간,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은 어느 오만한 귀족이었다.
그에게 줄리엣을 구원하고자 한 의도는 딱히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스팔 남작과 그녀의 의다섯 번째 남편은 모두 북부의 의공작을 건드린 대가로 죽었다.
'그런 지옥에서 꺼내 준 남자에게 반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의 줄리엣은 지옥에서 살고 있지 않았다. 그를 만난 적도 없었다. 과거의 기억과는 달리 말이다.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고마워요.”
줄리엣은 손수 마차 문을 열고 폴짝 뛰어내렸다.
그녀는 수도 외곽의 아늑하고 고풍스러운 저택에서 살았다.
첫 번째 삶에서 줄리엣 모나드는 열다섯 살이 되기 전에 양친을 잃었다. 그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다녀 왔습니다.”
현관으로 들어서면서 줄리엣은 인사했다.
“어서 오렴, 줄리엣. 재밌게 놀았니?”
붉은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부인이 거실에 앉아 있다가 줄리엣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줄리엣의 어머니, 릴리안 모나 드 백작 부인이었다.
“네, 재밌었어요.”
줄리엣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지난겨울, 줄리엣은 열여덟 살 생일을 맞았고 성년이 되었다.
모두 멀쩡히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두 분그녀는 정해진 미래를 바꾸는데 성공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