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15화 (15/229)

15화.

“대뜸 헤어져 달라고 하더니.

이유가 고작 이런 거였나?"

줄리엣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어깨를 움켜쥔 남자의 입매가 잔인하게 비틀렸다.

“하지만 내 애를 가지고 도망치 려거든 내게 들키지도 말았어야지.”

“……그래서 여기까지 쫓아오신 건가요?”

잔인한 언사에 줄리엣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역시. 그럼 그렇지.

줄리엣은 아주 잠시나마 실낱같은 기대를 품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대체 뭘 기대했을까?

그녀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제가 공작가 핏줄을 훔쳐서 달아났을까 봐요?”

레녹스 칼라일이라는 남자에게 핏줄이 어떤 의미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아홉 살짜리 어린 가주를 전쟁터로 내몬 것은 다름 아닌 탐욕스러운 친족들이었으니까.

당장 그의 친어머니 역시 선대 공작이었던 그의 아버지를 속이고 그를 낳지 않았던가.

줄리엣은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그녀가 여기서 그의 아이를 가진 게 맞는다고 고개를 끄덕인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언젠가 그의 아이를 데리고 찾아온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어딘가로 끌려가 ‘처리 되는 걸까?

애초에 레녹스 칼라일은 공작가의 후계자 따위에는 관심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결혼에 연연해하는 대신 가볍고 짧은 관계만을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칼라일 공작의 아이라고 주장하며 공작가를 찾아오는 자들이 꽤 많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공작가에서 붉은 눈, 검은 머리를 가진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공작가를 찾아온 아이와 여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떤 사람들은 여우같은 줄리엣모나드가 그의 아이들을 처리한 게 분명하다고 떠들었다.

하지만 줄리엣이야말로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가장 궁금해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아뇨, 나는 아무것도 안 훔쳤어요.”

줄리엣은 맥없이 고개를 떨구며 차분히 대답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말은 그녀를 더욱 절망케 했다.

레녹스 칼라일은 싱긋 웃는 얼굴로 빈정거렸다.

“그럼 어떤 놈 새끼지?"

"레녹스!”

수치심으로 줄리엣의 얼굴이 확달아올랐다.

줄리엣은 순간적으로 눈물이 그 렁해진 것을 들키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줄리엣?”

“이거 놔.”

그녀의 연인은 자신이 말도 없이 도망쳐 버리는 바람에 생각보다 화가 많이 난 걸지도 모르겠다. 손에 쥔 것이 차고 넘쳐 버릴지언정 놓쳐 본 적이 없는 남자니까.

‘하지만 그걸 애정으로 착각하지 않을 분별력은 있어.'

기르던 개가 목줄을 끊고 도망쳤다면 비슷한 비유일까?

그건 괘씸함이나 복수심에 가깝지 애정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줄리엣이 그를 화나게 한 것이 그녀가 이런 취급을 받을 정당한 이유는 되지 못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줄리엣은 깊이 절망했다. 고작 이런 취급을 받으려고 7년을 그의 곁에 남아 있던 것이 아니었다.

레녹스 칼라일은 절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겠지만…….

“좋아. 믿어 주지."

그런데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 그녀를 기묘한 시선으로 물고 러미 내려다보던 남자가 불쑥 말했다.

“대신 이쯤하고 같이 돌아가.

결혼이든 뭐든,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까.”

줄리엣의 표정이 일순 아연해졌다.

“....…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젠장, 결혼이든 소꿉놀이는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담담히 말을 반복하는 그의 표정은 태연했다.

그러나 레녹스는 속으로는 초조하게 이를 사리물었다.

“그러니까 돌아가지.”

제발.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전에 없이 부드러운 태도였다.

레녹스는 잔뜩 신경이 곤두선 나머지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여자에게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신전은 그를 파문했다.

결혼식을 올리려면 한바탕 또 난리를 피울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까짓 거 전쟁이 필요하다면 하면 그만이다.

그는 북부의 공작이었다. 무패의 군사와 검은 황금의 땅. 황제도 북부를 꺾지 못하는데 신전이라고 다를 게 뭔가?

그는 신을 믿지 않았다. 하물며 신의 종이랍시고 헛소리를 떠들어 대는 노망난 늙은이들쯤이야.

줄리엣이 다시 달아나지 않는다.

면 뭐든 상관없었다.

일단 내뱉고 나니 모든 상황이 명쾌해졌다.

“결혼…… 이라고요.”

“그래.”

그러나 줄리엣은 기쁨과 놀라움으로 미소 짓지도,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북부의 안주인 자리를 주겠다는데도, 그녀는 어쩐지 공허한 눈으로 레녹스를 망연히 올려다 볼 뿐이었다.

“그럼 아이는요?"

“마음대로 해.”

레녹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제 핏줄에게 그 저주스러운 가문을 물려준다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다. 게다가 애들은 성가시고 짜증스럽다. 하지만 그녀를 닮은 아이라면 참아 볼 만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레녹스는 충격을 받은 듯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줄리엣을 내려다보았다.

아이가 있다면 다시는 이번처럼 쉽게 도망치지 못하겠지. 줄리엣은 유독 작은 동물 같은 생명체.

에는 약했으니까.

충동적으로 말한 것뿐이었지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기분이 나아졌다.

“정말, 끝까지…….”

줄리엣의 꽃잎 같은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

“잔인하시네요.”

“.……누가?" ”

“대체 어디까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어야 만족하세요?"

잔인하다고?

레녹스 칼라일은 귀를 의심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봄바람처럼 다정히 품에 안겨 오다가 반나절 만에 돌변해서 그를 속이고 달아난 것은 그녀였다.

먼저 그의 손을 놓아 버리고, 저를 버리고 떠난 것은 줄리엣모나드였다.

지금 잔인하게 구는 게 누군데?

레녹스는 그렇게 쏘아붙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줄리엣?”

줄리엣이 어떤 전조도 없이 후드득 눈물을 쏟아낸 것이다.

마치 한계점에 다다른 사람처럼. 잔을 넘치게 하는 물 한 방울처럼.

줄리엣은 울음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그것이 프러포즈를 받은 여자가 보일 법한 기쁨의 눈물이 아니란 정도는 그도 알았다.

놀란 남자가 뒤늦게 그녀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어쩐지 공허한 목소리로 줄리엣이 중얼거렸다.

“돌아가면요?”

"뭐?"

“지금 제가 전하를 따라 돌아가면 뭐가 달라지나요?"

'뭐가 달라지느냐고?' 뜻밖의 물음에 레녹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줄리엣은 한 번도 그런 것을 묻지 않았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모호한 것.

그러나 달라질 건 없다. 그가 달라지는 걸 원치 않았으니까.

레녹스는 줄리엣 모나드라는 여자를 잘 알았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부드러운 피부, 달콤한 한숨, 떨리는 속눈썹, 보조개 같은것.

레녹스는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줄리엣은 애정을 구걸하지 않았다. 일일이 그를 구속하거나 보채는 일도 없었다.

"아무것도.”

그들의 관계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바라는 바였다.

줄리엣 모나드는 여전히 그의 연인으로 남을 것이며 그들은 함께 북부의 공작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결혼이든 아이든, 줄리엣이 다시는 이렇게 도망치지 못하도록 좀 더 튼튼한 새장을 준비해야겠지만 어쨌든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지금 당장,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다면-

“레녹스.”

그러나 줄리엣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저는 이제 그만할래요.”

“..….… 줄리엣?”

“더 이상 전하를 사랑하지 않아요.”

언제나 버려지게 될까 전전긍긍하는 것 따위.

“이젠 지긋지긋해."

삐이이이.

바로 그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차가 플랫폼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줄리엣은 고개를 저으며 저를 부축하듯 끌어안고 있던 남자의 의가슴을 떠밀었다.

“저는 알아요. 세상 어딘가에는 당신 같은 남자를 무릎 꿇리고 겸손을 가르칠 여자가 있겠죠."

파르륵.

그가 본능적으로 줄리엣을 향해 다시 손을 뻗기도 전에 갑자기 눈이 아릴 정도로 빛나는 날개를 가진 나비들이 나타났다.

푸른 나비 떼의 날갯짓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스치고 온통 흔들어 놓았다.

마치 어떤 것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게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레녹스의 시야를 메웠다.

그사이 여자는 그에게서 멀어져 멈춰선 열차 쪽으로 비척비척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게 저는 아닐 거예요.”

그 자리에 굳어 버린 남자의 눈을 마주보며 줄리엣의 입술이 완벽히 미소 지었다.

“아까 말했죠, 난 아무것도 안훔쳤다고, 그건 거짓말 아니었어요.”

줄리엣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어떤 것에도 상처받지 않고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남자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바로 지금 그녀의 손안에 있었다.

줄리엣은 태연히 아무것도 없는 제 아랫배로 손을 가져갔다.

“왜냐면 이거, 당신 애 아니야.

줄리엣은 말갛게 웃으며 마지막으로 거짓말했다.

잊혀진 줄리엣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