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다른 생각을 하자. 다른 생각..'
줄리엣은 의식적으로 즐거운 일들을 상상하려 노력했다.
반짝거리고, 예쁘고, 화려한 것.
그래서 다시 줄리엣은 자신의 유리 구두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저택과 공작성에 남겨 두고 나온 드레스와 장신구들을.
그녀는 그에게 선물 받은 그 모든 물건들은 전부 고스란히 남겨두고 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 모든 드레스를 불사르거나 해서 없애 버리고 싶었지만….'
줄리엣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들은 엄연한 칼라일가의 재산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수도의 저택 몇 채 값은 우스울 테니 두고 오는 것이 맞았다.
'예뻤지, 그 목걸이.'
줄리엣은 빙그레 웃었다.
이라면 두고 온 연인의 생각에.
마음씨 고운 동화 속 여주인공눈물짓겠지만 기껏 생각한다는 것이 저택에 두고 나온 값비싼 보석들이라니.
‘엄청 속물이었네, 나..'
하지만 줄리엣은 어차피 본인이 착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줄리엣은 문득 궁금해졌다.
비어 버린 그의 옆자리는 언제 채워질까?
줄리엣이 그의 과거 연인들의 자리를 쉽게 대체했듯, 레녹스는 금방 그녀를 잊게 될 것이다. 그러면 공작의 새 연인이 한때 자신의 것이었던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게 되겠지.
다만 한 가지.
줄리엣은 그가 제게 주었던 물건들을 얼굴 모르는 그의 새 연인이 사용할지 모른다는 것만은 싫었다.
물론 레녹스는 신경 쓰지 않겠지만.
설령 그가 정말 새 연인에게 줄 리엣이 두고 간 패물들을 줘 버린다고 해도 그녀에게는 권리가 없었다.
그래서 줄리엣은 마지막으로 소원을 빌었다.
그 목걸이가 얼굴 모르는 여자의 목을 장식하게 되지 않기를.
그뿐이었다.
‘쪽지라도 남겨 놓을 걸 그랬나.’
내 목걸이, 다른 사람 주지 말고 차라리 팔아 달라고? 줄리엣은 조금 웃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시간이 정말 없었다. 천천히 마음을 정리하고 침착하게 웃으며 작별할 말을 고를 시간 말이다.
그러니까 미리 준비하지 그랬어.
어리석고 어리석은, 줄리엣 모나드, 이게 네가 원했던 결말이 이잖아.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잖아. 결국은 이렇게 도망치듯 떠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줄리엣은 쓰게 웃었다.
조금 시간 여유를 두고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면 그는 별 감흥없이 떠나겠다는 말에 그러마 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미련 없이 그녀에게 먼저 작별 인사를 건넸을지도 모른다.
'바보 같아.’
그동안 그녀는 너무 많은 시간을 스스로를 속이면서 살았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도 된다.
는 착각과 덧없는 기대를 품고.
하지만 그는 끝까지 레녹스 칼라일이었다. 그는 변하지 않았고, 상처받지 않겠노라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줄리엣은 결국 먼저 지쳐 버렸다.
그는 아니었겠지만, 그의 곁에 머무는 7년 내내 그녀는 이별을 준비했다. 어제는 이만큼. 오늘은 또 이만큼.
이곳이 만약 칼라일 영지였다면 이렇게 쉽게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이별을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했다.
줄리엣은 담담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열차가 오고 있나 궁금해서 또다시 어두운 주변을 힐끗 살펴보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주변이 지나치게 고요했다.
분명 역사 안에는 그녀 외에도 열차를 타기 위해 기다리던 승객이 몇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해졌더라?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렇게 직감한 줄리엣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
뚜벅뚜벅.
어둠 저편에서 어쩐지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와 줄리엣은 멈칫했다.
그리고 곧이어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훤칠한 남자였다.
평소와는 달리 흐트러진 옷매무새, 성질대로 풀어헤친 앞섶. 어딜 갔는지 타이는 보이지도 않았다.
급히 말이라도 몰고 달려왔는지, 반듯한 이마 위로 검은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느라 탄탄한 가슴팍이 오르내리는 것을 옷 위로도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느긋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
분명, 그녀가 아는 남자였다.
“.....… 레녹스?”
세상에 저렇게 웃는 남자는 단 한 사람, 레녹스 칼라일 뿐이니까.
“이렇게 야반도주를 감행할 정도로 날 싫어하는 줄은 몰랐는데.”
“여길, 어떻게 ……."
귀신이라도 본 듯, 창백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던 줄리엣은 문득 그의 왼손이 붕대로 감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지간히 급했는지, 대충 감아놓은 손에서 붉은 피가 번지고 있었다.
아.
줄리엣은 그가 어떻게 자신을 찾아냈는지 단번에 깨닫고는 경악했다.
그녀가 미처 고려하지 않았던 사안이지만 사실은 공작가와 신전의 관계를 생각하면 고의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던 거지만 수도의 대신전에는 신비한 힘을 가진 성유물이 존재했다.
아르고스의 눈동자.
'그 성유물을 사용했구나.'
줄리엣은 경악했다.
직접 제 손을 긋고 피를 내서 그녀의 흔적을 추적한 것이다.
"좋아.”
줄리엣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그는 왼손을 품 안에 찔러 넣어 감췄다.
“그렇게 싫다는데 굳이 강요할 필요는 없지.”
태연히 웃던 레녹스 칼라일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성큼 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남자가 싸늘하게 물었다.
“하지만 내 애는 어쩌고?”
"내?……아이라뇨?”
"배 속에 든 거, 내 애 아닌가?”
레녹스 칼라일은 간신히 화를 억누르는 중이었다.
그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인지 줄리엣 모나드에게 화가 난 것인지조차 모호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인적 없이 깜깜한 플랫폼에 홀로 덩그러니 선 여자의 실루엣을 보자마자 그는 깨달았다.
꼼꼼하게 챙겨 입은 옷차림, 그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과 금방이라도 도망 칠 듯 치맛자락을 움켜쥐는 동작까지.
뭐 하나 신경에 거슬리지 않는 게 없었다. 줄리엣 모나드의 모든 것이 그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싫어하시죠, 이런 거?"
문득 그를 잘 안다는 듯 여름 꽃처럼 웃던 여자가 떠올랐다.
애정이니 애틋함이니, 성가신 존재가 되기 전에 진즉 잘라 내버렸어야 옳았다.
안다.
이건 전혀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줄리엣 모나드는 그의 과거 연인들보다 훨씬 오래 곁에 머물렀다.
그녀가 먼저 이별을 고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줄리엣 모나드는 그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를 뒤쫓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순간적인 충동과 감정에 졌다.
이성을 거스르고 이 여자를 붙잡는 것을 택했다.
“좋아. 하지만 내 애는 어쩌고?"
"……아이라뇨?”
"배 속에 든 거, 내 애 아닌가?”
“그게 무슨…….”
내 애?
무심코 되물으려던 줄리엣은 멈칫했다.
설마.
“아니에요!"
줄리엣은 단번에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그제야 레녹스가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맙소사. 그는 그녀가 아이라도 가지고 도망친 줄 알았던 모양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줄리엣은 엄청난 오해 앞에 말문이 막혀서 멍하니 그를 보기만 했다. 그러자 남자의 표정이 더욱 차가워졌다.
“약사가 주문서를 가져왔어. 아이를 지우는 약을 주문했다더군.”
아.
그제야 줄리엣은 이 터무니없는 오해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애초에 언젠가 떠나게 될 것을 아는 그녀가 굳이 불행한 아이가 생기게 놔둘 리 없지 않은가?
그녀가 피임약으로 실피움 차를 꾸준히 복용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몇 달 전 주문한 겨우살이와 실피움 꽃은 줄리엣 자신을 위해 주문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얼마 전, 결혼해서 그녀의 곁을 떠난 하녀를 위해 줄리 엣이 은밀히 구입한 것이었다.
북부의 공작성에서 줄리엣의 시중을 들던 하녀는 사실 모나드백작가에서부터 그녀와 함께 지냈던 아이였다.
두 달 전쯤, 하녀는 아이를 가졌다고 울면서 줄리엣에게 털어 놓았다.
"아무래도 제가 아기를 가진 것 같아요, 아가씨.”
하녀의 약혼자는 뱃사람이었는데 얼마 전 배를 타고 나갔다가 행방불명되었다고 했다.
약혼자의 안전을 걱정하던 차에 하녀는 제가 임신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줄리엣은 하녀를 도닥이며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도와주겠다고 위로했다.
그래서 은밀히 아이를 지우는 실피움 꽃과 반대로 임부에게 좋은 겨우살이를 함께 주문했었다.
하지만 다행히 행방불명되었던 약혼자는 무사히 돌아왔고 하녀는 결혼해서 줄리엣의 곁을 떠났다. 지금은 멀리서 아이까지 낳고 잘 살고 있었다.
줄리엣은 패물을 넉넉히 들려 보내며 축하까지 해 줬다.
'하지만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지?’
막막함에 줄리엣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레녹스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