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아르고스의 백 개의 눈. 그걸 내놔.”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대신 관은 입을 딱 벌렸다.
아르고스의 백 개의 눈.
그것은 현재 수도의 대신전이 소유하고 있는 가장 고귀한 성물이었다.
이름 그대로 반경 수천 킬로미터 이내에서 원하는 것을 단번에 찾아내는 강력한 성유물은 대신 관급의 신성력에 필적했다.
“그, 그건 내 목이 떨어져도 절대 내놓을 수 없소! 아무리 북부의 공작이라도 성물을 강탈하는 건…..”
“잠시 빌리겠다고 했지 강탈하겠다고는 안했는데.”
그랬던가?
대신관은 뒤늦게 기억을 되짚어보고서야 자신이 목을 너무 빨리 포기했다는 걸 깨닫고 머쓱해졌다.
그러나 태연히 이어지는 칼라일공작의 말에 대신관의 얼굴은 다시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죽이고 빼앗는 것도 나쁘지 않군. 내가 인내심이 별로 없어서 말이야.”
히익.
신관의 곁에서 등불을 들고 서 있던 어린 사제가 소리 없이 기겁했다.
"어떡할 거지?”
“아니, 그래도 신전의 보물을 함부로 대여할 수는..…….”
“그걸 내놓으면 대가로 북부의 신전을 돌려주지."
…… 아르고스의 눈을 빌려주면 북부의 신전을 돌려주겠다고?
실로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대신관은 재빨리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겼다.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몰랐다.
칼라일 공작이 아르고스의 눈을 원한다는 것은 그가 지금 뭔가를 찾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람인지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신관은 칼라일 공작이 신전까지 돌려주면서 이토록 다급히 찾아야 하는 대상이 누구일지 궁금해졌다.
어쨌든 급한 것은 칼라일 공작쪽이니, 판돈을 더 올릴 만하다고 생각했다.
잘만 하면 공작으로부터 현금을 뜯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더 높은 교구의 ㅅ니관으로 승진할 수도 있고.
그렇게 속으로 계산을 마친 대신관은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공작, 신성한 성유물을 사사로이 사사로이 사용할 수는 없……."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군, 대신관.”
그러나 칼라일 공작은 말 한마디로 대신관의 야심찬 계획을 단번에 박살냈다.
조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지루하다는 듯 느릿한 동작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내가 언제 협상을 하자고 했나?"
어둠속에서 오만한 붉은 눈이 불경하게 번득였다.
***
수도 외곽의 역은 인적 없이 한 산했다.
그럴 만도 했다. 벌써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축제 분위기에 들뜬 사람들은 밤새 먹고 마시며 새해를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줄리엣은 조금 전 황궁 방향에서 불꽃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 그랬구나.”
나비 모습을 한 마물은 그녀에게만 들리는 파장으로 잔뜩 칭얼거렸다. 꼭 토라진 어린애라도 되는 것처럼.
무리한 일을 시켰다고 화를 낼줄 알았는데, 나비들의 불만 사항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제 계약자에게 자신들의 일부를 소멸시켜 버린 그 남자가 얼마나 무자비했는지 일러바쳤다.
날개가 단검에 꿰뚫리는 순간(그것. 남자. 인간. 싫어.)
그러나 줄리엣은 그 엄살을 다 알면서도 잠자코 들어 주었다.
이 사악하고 유치한 마물은 그것으로 만족했는지, 한참을 서툰인간의 언어로 어리광을 부리다 떠났다.
줄리엣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녀는 나비들이 경고했던 남자의 추격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잠시 후면 그녀는 수도에서 멀리 떠날 것이다. 그의 수하들이 아무리 유능하다고 한들 이렇게 촉박한 시간 안에 자신을 찾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줄리엣은 적막한 플랫폼에 홀로 앉아서 그저 열차가 언제쯤 올까 생각했다.
역사 안에도 앉을 자리가 있었지만 줄리엣은 일부러 바깥 플랫폼에 나와 열차를 기다렸다.
줄리엣은 발끝을 까딱거렸다.
그녀는 불과 몇 시간 전 황궁의 신년 연회에 참석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옷차림이었다.
어두운 색 블레이저와 흰 블라 우스,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 머리를 하나로 단정히 틀어 올리고 얼굴을 가릴 검은 베일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줄리엣은 열차 시간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하다가 자신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연회장을 누비던 굽이 높고 아름다운 구두 대신 그녀는 장식 없는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것이 무정한 연인도 추억도 아니고 저택에 두고 나온 아름다운 구두일 줄이야.
레녹스 칼라일은 퍽 너그러운 연인이었다. 먼저 조르지 않아도 호화로운 선물을 척척 잘도 안겨주었다. 아름다운 드레스와 보석으로 장식한 관 같은 것들. 어떤 것이라도 말만 하면 모두 제 것이 되었다.
'사실은 손톱만치도 관심도 없는 주제에.’
누구든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의 마음을 얻었다고 착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줄리엣은 처음부터 착각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버려질 질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치스러운 선물들은 그의 애정과는 철저히 무관했다.
애정이라니. 레녹스 칼라일은 그런 말랑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하를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을 거예요.”
뼈 있는 충고,
"공작님은 싫증을 아주 잘 내시거든요."
차라리 그 말투가 적대적이었다면 질투라고 무시해 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줄리엣은 그러지 않았다.
줄리엣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모나드 백작가의 이름이 아깝네요."
사람들은 신분 낮은 여자도 아니고, 귀족 영애의 신분으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그녀를 빈정거렸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의 연인이 된 후로는 이유 없는 적의가 익숙했다.
줄리엣은 빙그레 웃었다.
그들은 줄리엣이 못 들은 척 지나치거나 울먹거리는 걸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꺄악!”
그러기에는 줄리엣이 그렇게 착하지 못했다. 앉아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대신, 줄리엣은 항상 찻잔을 뒤엎어 버리는 걸 선택했다.
덕분에 칼라일 공작의 악명은 은더욱 높아졌지만 뭐 어떤가.
사람들이 빈정거리는 것과는 달리 줄리엣에게 그의 곁에서 버티는 일은 별거 아니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레녹스 칼라일의 연인이 되는 것은 그렇게나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지키는 것만큼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칼라일 공작에게는 굳이 그녀가 아니라도 됐다. 어차피 누구라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잠자리를 데울 수 있는 상대라면.
툭. 줄리엣은 손등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을 애써 무시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