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흩뿌리며 방 안을 날아다니는 푸른 나비 한 마리.
줄리엣의 나비를 발견한 순간 레녹스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동시에 싸늘하게 피가 식었다.
“전하!”
뒤늦게 그를 뒤쫓아 올라온 사람들이 활짝 열린 방문 앞에 모여들었다.
레녹스는 아무 말 없이 테이블위에 있던 페이퍼 나이프를 집어들었다.
콰직.
그의 손을 벗어난 단도는 화장대 거울 주위를 나풀거리던 나비의 날개를 단번에 꿰뚫었다.
푸른 나비는 꼭 살아 있는 생물이었던 것처럼 파르르 날개를 흔들다가 이내 바스스 빛 가루를 흩뿌리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이게 어찌된……….”
부랴부랴 뒤따라온 사용인들은 방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아직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주인님, 저희는 분명 아가씨가 귀택하셔서 마차에서 내리시는 걸 봤습니다.”
“예, 그리고 돌아오셔서 2층의 이 방으로 올라가시는 것도 똑똑히 봤….….”
아차.
나비가 소멸함과 동시에 환술에서 풀려난 사용인들은 그제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사색이 되었다.
그들은 분명 줄리엣이 귀가한 것을 보았다지만 처음부터 그것은 마물의 환술에 걸려있었던 것 줄리엣의 능력은 그가 제일 잘 알았다.
이계의 마물을 소환해 그녀가 보게 하는 환시.
선택한 대상으로 하여금 환상을 보기 드문 능력이었지만 줄리엣의 실력은 아직 자유자재로 마물을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가 알기로 줄리엣이 한 번에 환술을 걸 수 있는 대상은 한두명 정도였다.
줄리엣의 능력은 사람을 홀릴 정도로 위력적이었지만 공공연한 장소에서 사용하기에는 마력의 소모도 컸고 제약 조건이 많았다.
그러니까 마부 하나 속여 넘기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겠지만 이 공작가 저택의 그 많은 사용 인들을 모두 동시에 속여 넘길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줄리엣은 성공했고 유유히 그에게서 달아나 버렸다.
그 의미는 자명했다. 줄리엣이 능력이 성장한 것을 숨긴 것이다.
그를 속이고 거짓으로 웃음 지었다. 달아날 계획을 세운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모나드 백작가에는 가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새 연락을 취했는지, 집사가 조용히 보고했다.
레녹스는 감정 없는 눈으로 화장대에 상자째 얌전히 놓인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줄리엣에게 오늘 아침 보냈던 그 목걸이였다.
덩그러니 남겨진 목걸이가 의미심장했다.
깨끗이 정돈된 방 안에는 그간 제가 그녀에게 선물했던 장신구와 옷가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착각할 정도로 온전한 모양새였다.
문득 그는 한 가지 의문점을 떠올렸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줄리엣에게 붙여 둔 호위인 케인은 소드마스터였다.
어떻게 그녀가 케인의 눈까지 속였단 말인가?
“케인.”
“……예.”
“뭔가 먹었나?”
“예?”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했던 케인은 이내 공작의 물음을 이해하고는 몸 둘 바를 몰랐다.
"낮에 아가씨께서 음료를 …….”
“약을 탔군.”
의 안전을 위한 거였지 그녀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붙여 놓은 게 아니었으니까.
하물며 무뚝뚝한 케인은 음료를 건넨다고 받아 마실 위인이 아니었다.
“면목없습니다. 이런 실수를.…….”
상황을 모두 파악한 케인이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레녹스 칼라일의 분노는 오롯이 한 사람만을 겨냥했다.
“아주 작정을 했군."
악문 잇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더 이상 줄리엣이 이런 짓을 벌이는 이유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계획한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에게 말도 없이 실피움을 사들인 것부터 나비를 능숙히 다루게 되었으면서도 숨긴 것까지 전부 분노를 부채질했다.
칼라일 공작의 싸늘한 분노 앞에서 아무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안절부절못하며 주인의 안색을 살피던 엘리엇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수도 경비대에 연락을 넣을까 까요?”
“아니.”
소용없을 것이다.
줄리엣이 그를 잘 아는 것처럼 레녹스 칼라일 역시 줄리엣 모나 드를 알았다.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숨어 버릴 수 있었다.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어수선한 시기에는 몸을 숨기기도 좋지만 밖으로 몰래 빠져나가는 수단도 한정적이다.
하지만 줄리엣이 수도 밖으로 도망치는 것도 시간문제.
병력을 풀어 수도를 드나드는 모든 길을 차단하는 방법도 있지만, 섣불리 행동해 일을 그르치면 줄리엣은 오히려 더 깊숙이 숨을 것이다.
줄리엣이 작정하고 숨어 버린다.
면 영영 그녀를 놓쳐 버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마음먹으면 완벽히 제 흔적을 지우고 숨어 버릴 능력이 있으니.
“어찌할까요, 전하?”
엘리엇이 조심스레 물어 왔다.
레녹스 칼라일은 고개를 들었다.
“아직 수도를 벗어나진 못했겠지.”
레녹스는 그녀가 버려두고 간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잘그락.
다이아몬드가 그의 손 안에서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그가 입모양으로만 미소 지었다.
“책임은 그 다음에 묻겠다. 우선 찾아내.”
그는 줄리엣에게 알려 줄 생각이었다.
그 역시 집요하기로는 그녀 못지않다는 것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찾아. 머리카락 한 올까지 온전한 상태로.”
그 소란을 듣고 수도의 대신관이 부랴부랴 달려 나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공작!"
침입자들을 정면으로 맞닥뜨린 대신관이 분기탱천해서 외쳤다.
어찌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머리 위에 쓴 관이 비뚤어져 있었다.
"어떻게, 감히, 신성한 경내에 무기를 들고…….”
“서론이 길군.”
대신관이 달려 나왔을 때, 이 무뢰배들의 우두머리는 불경스럽게도 제단 위에 비딱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는 칼라일 공작이었다.
이 급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도, 대리석 제단 위에 올라앉은 칼라일 공작은 아무 장식 없이 밋밋한 제단을 왕좌처럼 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다, 당장 황제 폐하께 연락을 취해서….”
“소용없는 걸 알 텐데.”
끄응.
대신관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대신관도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칼라일 공작의 눈치 보느라 전전긍긍하는 황실이었다.
만약 신전에서 도움을 요청하면 황제는 은근슬쩍 그 요청을 모른 척 묵살할 가능성이 컸다.
칼라일 공작가는 신전과 사이가 게다가 다른 대귀족들과 달리, 나빴다.
사실, 제국에서 가장 넓은 영지를 가진 북부의 공작가에 신전은 아주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넓은 땅. 그리고 어마어마한 황금.
그러나 칼라일 가문의 사람들을 비롯한 북부인들은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불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종교에는 관심이 없었고, 호화로운 신전을 짓거나 막대한 헌금을 거둬 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칼라일 공작가와 신전의 관계는 레녹스 칼라일의 대에 와서 완전히 파탄 났다.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제 삼촌들을 도륙하고 가주 자리에 앉은 레녹스 칼라일은 공작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북부의 모든 신정을 폐쇄해 버렸다.
당연히 신전은 거세게 반발했고 칼라일 공작을 파문했다.
신전으로부터 파문되는 것은 정식으로 사제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할 수도 없게 된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더해 언젠가 태어날 공작가의 후계자에게 신전의 축복도 내려 주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물론 칼라일 공작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결혼은커녕 방종한 생활을 일삼지 않았던가.
애초에 제국의 주인인 황제조차 두려워하는 칼라일 공작인데, 신전이 뭘 어쩔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안하무인의 상대를 눈앞에 둔 대신관은 항의를 포기하고 조심스레 용건을 물었다.
“그래. 원하는 게 뭡니까, 공작?”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