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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11화 (11/229)

11화.

***

작년 여름. 그들이 북부 영지의 여름 별궁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무렵이었다.

낯선 여자 하나가 그를 찾아왔다. 그의 아이라고 주장하는 남자아이를 하나 데리고.

“내 애라고?”

낯선 여자는 그렇게 주장했다.

“그래요!”

평소라면 그를 찾아오기도 전에 경비병들에게 가로막혔을 것이다.

그러나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잠시 들른 행궁이라 기강이 다소 해이해져 있었다.

휴가 동안 뭘 하고 싶으냐고 그가 묻자 줄리엣은 호수에서 배를 타 보고 싶다고 했다.

사흘 내내 침실에서만 시간을 보냈던 참이라 그는 별생각 없이 그러자고 했다.

보기 드물게 환하게 웃은 줄리 엣이 들떠서 외출 준비를 하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하필이면 얼빠진 신참 경비병이 얼결에 낯선 여자를 줄리엣으로 착각하고 들여보낸 것이다.

그는 나른한 흑표범처럼 침상위에 누워 불청객을 맞았다.

“공작님의 아들이 맞아요. 보세요.”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 무슨 여배우의 하녀였다는 여자가 그렇게 말했다.

여자는 인형처럼 잔뜩 꾸민 사내아이를 장식품처럼 그에게 당당히 내보였다.

요란한 브로치가 달린 블라우스와 반바지, 모자를 쓴 남자아이는 열 살쯤 되어 보였다.

소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덜덜 떨면서 그와 눈도 맞추지 못했다.

레녹스는 심드렁히 감상을 말했다.

“일곱 살치곤 애가 좀 크군."

“그, 그거야…… 공작님의 아이니까요! 에릭은 공작님을 닮아서 훌륭한 기사가 될 거예요!"

잠시 당황하던 여자는 다시 의기양양하게 소년을 그의 앞으로 떠밀었다.

그리곤 보란 듯이 남자아이의 모자를 벗겼다.

“이 머리칼과 붉은 눈을 보시면 아시겠죠? 에릭은 공작님 아들이에요.”

레녹스는 잔뜩 겁먹은 남자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국 사람들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칼라일 공작가의 아이들은 하나 같이 검은 머리칼과 붉은 눈을 가지고 태어난다.

흰 비둘기의 핏방울처럼 섬뜩한 루비 레드.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피비린내 나는 가주 쟁탈전을 벌이면서도, 그 혈통의 정당성만은 훼손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얼굴조차 희미한 여자가 데려온 사내애는, 과연 붉은 눈과 검은 머리칼을 갖고 있었다.

“내 아들이라.”

“예?”

레녹스는 소년의 어깨를 짚고 빙긋 웃으며 엘리엇을 향해 말했다.

“그보다 엘리엇, 자네도 이리와서 좀 보지. 이 애가 내 아들이라는데?"

“저, 전하."

“어떤가, 자네가 보기엔 닮았나?"

레녹스 칼라일은 허리를 숙여 잔뜩 얼어 있는 남자아이와 눈을 맞췄다.

“이름이 에릭이라고?”

생각보다 훨씬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수려한 용모는 어린아이들에게도 효과가 좋았다. 그리고 긴장을 누그러뜨린 어린애가 얼결에 그를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레녹스의 손이 단번에 아이의 블라우스에 걸린 큼직한 브로치를 낚아챘다.

"그……!”

여자가 놀라서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파삭.

그의 손아귀에서 브로치가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남자아이가 가진 본래의 눈 색과 머리색이 드러났다.

“제법 머리를 썼군.”

레녹스가 산산이 가루가 된 브로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눈 색과 머리색을 바꿔 주는 싸구려 마도구였다.

가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미처 몇 걸음 채 걷기도 전에 레녹스 칼라일은 홀의 입구에서 멍하니 서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입구의 대리석 기둥에 한 손을 짚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

'……줄리엣?'

언제부터 거기 있었느냐고 물으려던 그는 멈칫했다.

줄리엣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끌려 나가는 여자와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향해 있었다.

“시, 실수하시는 겁니다 공작님!

이 애는 공작님 아들이에요!"

여자는 끌려 나가면서도 끝까지 외쳤다.

레녹스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오직 줄리엣을 보고 있었지만 줄리엣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줄리엣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끌려 나가는 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경비병에 의해 그들이 모두 끌려 나가고 홀에 웅웅 울리던 비명마저 잦아든 다음.

커다란 홀에는 줄리엣과 그, 두 사람만 남았다.

그제야, 줄리엣이 고개를 들었다.

잠시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줄리엣 역시 속을 알 수 없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말없이 보았을 뿐이다.

하얗게 질린 줄리엣의 얼굴에는 비난의 기색도, 놀란 기색도 없었다.

그저 그녀는 차분하고 고요한 푸른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

레녹스 칼라일에게는 그저 비웃을 가치조차 없는 해프닝이었다.

애초 칼라일가에는 그렇게 아이가 쉽게 생기지도 않았다. 전승대로, 먼 조상 중 인간이 아닌 것의 피가 섞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온갖 욕망에 미친 혈통인 것에 비해 사방팔방 방계가 뻗어 있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덕분에 공작가에는 사생아라는 개념이 생소했다.

하물며 그는 한 여자와 오랜 관계를 지속 한 적도 없었다. 유일한 예외는 오직 단 한 명, 줄리 엣 모나드 뿐이었다.

그러나 사기꾼들이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칼라일 공작가에 붉은 눈의 아이가 태어난다는 이야기만 믿고 돈을 뜯으러 오는 사기꾼들은 무수히 많았다.

그런데 그때 자신은 그러한 자초지종을 그녀에게 설명했던가,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줄리엣 역시 그를 쫓아와 설명을 요구하거나 하지 않았다.

'고작 뱃놀이 따위에 어린애처럼 들떴던 주제에.'

여자는 돌아간다는 그의 말에 이유도 묻지 않고 조용히 마차에 올랐다.

돌아오는 내내 말없이 창밖만 내다보던 여자를 곁에 두고도 그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젠장.

그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그런 식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고 줄리엣은 그에게 그 어떤 것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너무 오래, 그러한 관계가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어차피 끝날 관계.

성의 없는 이별의 말 한마디로 언제든지 떠나보낼 수 있는 여자.

오가는 것은 성가신 말들보다는 짧고 가벼운 입맞춤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던 거였을까.

그녀가 묻지 않았더라도 그녀를 붙잡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며 캐물었어야 했었던가?

레녹스는 너무 늦게 어떤 가능성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를 찾으러 왔던 줄리 엣은 여자의 거짓말이 탄로 나는 순간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줄리엣이 본 것은 그저 자신이 우는 아이와 여자를 끌어내라 명령한 그 장면 뿐일지도 모른다.

제 자식이 아니라 말하고 냉정히 돌아서는 남자의 뒷모습만 봤을지도 몰랐다.

남자가 아무 설명도 없이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떠나 버린 뒤 줄리엣은 그곳에 오랫동안 홀로 남아 있었다.

그 말수 적은 여자는 혼자 남아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친 듯 대로를 질주하는 말 위에서 그는 이를 사리물었다.

“그냥요.”

"떠나게 해 주세요.”

"그동안 꽤 잘하지 않았나요, 저?”

희미한 미소와 무언가를 숨기는 사람처럼 조급해 보이던 태도, 뭘 어쩌겠다는 생각조차 없었지만 그것만은 분명했다.

그는 줄리엣을 만나야 했다.

만나서 물어야 한다.

대체 무엇을 겁내서 도망쳤느냐 물어야 했다.

네가 상상했던 최악이 뭐든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설명해야 했다.

좋은 혈통의 흑마는 놀라운 속도로 단번에 먼 거리를 주파해 공작저에 도착했다.

저택에 도착하기 무섭게 레녹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말의 고삐를 놓고 뛰어내렸다.

그가 지시한 대로 북부로 떠날 채비를 하느라 저택의 앞마당은 마차와 짐을 나르는 하인들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주, 주인님?”

저택의 집사가 그를 알아보고 놀라 달려왔다.

“줄리엣은?”

“예?”

“줄리엣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아…… 아가씨라면 조금 전 별채에….”

레녹스는 기다리지도 않고 한달음에 별채로 향했다.

“주군!”

한발 늦게 그의 뒤를 쫓아온 기사들이 막 저택의 안뜰에 당도했을 때, 그는 이미 별관의 문을 열어젖히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참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쾅.

"줄리엣?”

그러나 그가 2층의 불 켜진 방문을 열었을 때 그녀의 방은 텅비어 있었다.

주인 없는 방.

푸르스름한 빛무리를 뿌리는 나비 한 마리가 나풀거리며 날아다닐 뿐이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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