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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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늑대들은 황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련된 안전 가옥으로 그를 안내했다.
제도의 시민들은 새해맞이 축제를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고, 덕분에 안전 가옥 주변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끼이익.
텅 비어 있는 집은 깨끗하고 황
“도노반이라는 자입니다. 아가씨를 찾아갔었다는 그놈이 확실합니다.”
레녹스 칼라일은 바닥에 꿇어앉은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어쩐지 좀 실망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인상의 젊은 남자였던 것이다.
조금 착잡해진 그가 명령했다.
“풀어 줘.”
재갈이 풀리자마자 도노반이라는 남자가 겁에 질려 소리쳤다.
"저……. 빚 때문에 절 잡아오신 게 아닙니까?”
두 사람의 얼굴에 아주 잠깐 당혹스러운 표정이 스쳤다.
레녹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도노반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
“줄리엣 모나드를 아나?"
“모, 모나드라면…… 그 백작영애 말씀이십니까?"
“줄리엣과 무슨 관계지?"
“그거야…. 아니, 잠깐. 과, 관계라뇨! 저는 그분과 만난 적도 없습니다!”
도노반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대충 자신이 무슨 상황에 놓였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럼 왜 줄리엣을 찾아갔지?"
"그, 그게…… 환자의 개인 정보는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어쩐지 난처한 얼굴로 도노반이 레녹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바로 뒤의 기사가 검 손잡이에 손을 얹자마자 도노반은 곧장 외쳤다.
“저희 어머니 때문입니다!”
* * *
겁에 질린 도노반은 빠르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도노반은 횡설수설했지만 레녹스와 공작가의 기사들은 대충 그의 말을 정리할 수 있었다.
폈다.
“줄리엣이 뭘 주문했지?”
“.....… 실피움입니다."
“실피움?”
“모, 몸에 나쁜 약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실피움은 다른 귀부 인들도 많이 복용하시니까요."
레녹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역시 잘 아는 약이었다.
실피움은 제국 남부에서 자라는 귀한 약초였다. 실피움의 뿌리 부분을 연하게 차로 우려 마시면 피임 효과가 있었다.
값이 비싸다는 단점을 제외하면 몸에 부작용이 없고 향이 좋아 널리 사용되는 피임약이었다.
레녹스는 그제야 이 남자가 백작저 앞을 서성거렸던 이유를 알수 있었다.
몰락 귀족이라도 모나드 백작가는 유서 깊은 귀족.
게다가 줄리엣 모나드는 결혼적령기의 미혼 아가씨.
행여나 줄리엣이 잘못 처방한 약을 먹고 무슨 일이 생겼다면라고 주문하셨습니다. 제 어머니는 그대로 약재를 보내드렸고 모나드 아가씨의 처방 기록은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노반은 여전히 머뭇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줄리엣이 주문했던 것이 그것뿐이면 이렇게까지 눈치를 볼 리가 없을 텐데.
뭔가 불길한 직감에 레녹스는 곧장 물었다.
“겨우살이가 어디에 쓰이는 약이지?”
“겨우살이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오히려 유산을 막아 주고 배속의 아이를 보호해 주는 좋은 약재지요. 문제는, 아가씨가 그것을 실피움 꽃과 같이 주문하셨다.
는 겁니다.”
……아이?
“실피움 꽃의 효능은 뿌리와는 완전 다릅니다. 보통 피임약으로 복용하는 실피움은 뿌리 부분인데, 실피움 꽃은 뿌리 부분보다 훨씬 독성이 강해서 아이를 지우는 데에 쓰입니다.”
실내의 공기가 급격히 얼어붙었다.
그러나 도노반의 충실한 설명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따로 복용하셨다면 문제가 없지만 만약 실피움과 겨우살이를 함께 복용하셨다면 유산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 그래서 혹 아이를 가지신 게 맞는다면 약을 쓰지 마시고 따로 검사를 받아 보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리려던 건데….”
도노반의 말은 다 이어지지 못말다 했다.
쾅.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녹스 칼라일이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주군!”
공작가의 기사들이 다급히 그를 뒤쫓았다.
그러나 레녹스는 그들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마당에 묶여 있던 검은 말에 올라탔다.
자정에 열리는 불꽃놀이 때문에 시가지는 텅 비어 있었다.
덕분에 공작저를 향해 미친 듯이 말을 달리면서 레녹스 칼라일은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할 수 있었다.
'줄리엣.’
설명할 수 있었다.
설명해야 했다.
"겨우살이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오히려 유산을 막아 주고 배속의 아이를 보호해 주는 좋은 약재지요."
"실피움 꽃은 뿌리 부분보다 훨씬 독성이 강해서 아이를 지우는 데에 쓰입니다.”
피임약.
실피움.
그리고 줄리엣.
그 불길하고 혼란스러운 단어들이 조합되었을 때, 단번에 그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