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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9화 (9/229)

9화.

*

“아, ”

“아, 전하."

그제야 그를 발견했다는 듯 줄리엣이 해사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오셨네요.”

하루 종일 그를 바람맞힌 사람 치고는 꽤나 천진한 미소였다.

“.....… 얘기 좀 하지."

레녹스는 그녀를 야외 발코니로 잡아 끌었다. 줄리엣은 저항 없이 순순히 그를 따라왔다.

쌀쌀한 날씨에도 줄리엣은 어깨와 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짙푸른 드레스 차림이었다. 별빛을 뿌린 듯 선명한 푸른색이 매끄러운 피부를 돋보이게 했다.

그러나 그조차도 그의 신경에 거슬렸다.

레녹스는 무심코 생각했다.

분명 저 드레스와 함께 맞춘, 어깨에 걸치는 흰 모피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건 또 어디 두고 그냥 나온 것인지.

레녹스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의목선을 눈으로 훑었다.

줄리엣의 목을 장식한 반짝이는 목걸이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느다란 다이아몬드를 길게 두 줄로 겹친, 꽤나 호화로운 목걸이였다.

그녀의 드레스에도 어울렸고 몇 번인가 본 적 있는 목걸이였지만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오늘 아침 줄리엣에게 보

"오전에 목걸이를 보냈는데. 못받았나?"

“받았어요.”

“그런데?”

줄리엣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갸웃해 보였다. 그가 왜 이런 것을 묻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레녹스 칼라일은 일일이 연인의 선물에 신경 쓸 만큼 섬세하지도, 한가하지도 않은 남자였다.

“왜 착용하지 않았냐고 묻는 거야.”

제가 말하고 나서도 그 말이 어처구니없이 들렸다.

레녹스 칼라일은 한 번도 그런걸 물은 적 없었다. 자신이 이상한 것을 묻고 있다는 걸 레녹스역시 알았다.

마치 유치한 어린애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레녹스 칼라일은 어쩐지 초조해졌다.

그들 관계에서 주도권을 쥔 것은 항상 그였다. 그는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열위였던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레녹스는 지금 의심스러웠다. 그들 관계에서 한 번이라도 주도권이란 게 존재했던가?

그를 이상하게 만든 여자가 갑자기 싱긋 웃었다.

“목걸이, 무척 기뻤어요. 선물고마워요."

마치 토라진 어린애를 달래기라도 하는 투였다.

“하지만 너무 비싸고 귀한 물건이라 잃어버릴까 봐 겁나서 저택으로 돌려보낸 거예요. 오늘 연회에 입을 의상과 장신구는 벌써 몇 주 전에 골라 놨던 것이기도 하고요.”

줄리엣의 대답은 이치에 맞았다.

레녹스 칼라일은 그녀의 말에서 흠잡을 구석을 찾지 못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줄리엣의 차분한 태도가 오히려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하필 그는 몇 해 전 줄리엣이 제게 주었던 손수건을 떠올렸다.

이름자를 수놓아 건네주었던 그어요.”

"말해.”

“작년 제 생일에 뭘 주셨는지 기억하세요?”

작년 겨울?

레녹스는 줄리엣이 그 간단한이 그 질문을 왜 저렇게 망설이며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알제의 청금석.”

정확히는 청금석 광산이었다.

“……맞아요. 기억하시네요."

줄리엣은 말갛게 웃었다.

그러나 레녹스는 어쩐지 그게 그녀가 원한 대답이 아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도 전하께 드릴 게 있어요."

줄리엣의 손목에는 쥘부채 같은 것을 넣는 작은 비단 주머니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든 것은 부채가 아니었다.

“이거 돌려 드릴게요."

“이게 뭐지?”

그녀가 내민 것은 얇게 말린 두루마리 한 장이었다.

무심코 두루마리를 펼친 레녹스는 조금 놀랐다.

기억에 있는 물건이었다.

7년 전, 그들이 작성한 계약서였다.

혼전 계약서를 쓰는 것이야 흔한 일이지만 줄리엣은 그의 연인 이 되는 조건으로 계약서를 요구했다.

"전하께는 아무 의미가 없어도 제게는 의미가 있어요.”

혹여나 헤어진 뒤에 금전적 보상을 원하는 거라면 그것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줄리엣이 요구했던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이상한 조건이었다.

[갑과 을, 둘 중 하나가 더 이상 관계의 지속을 원치 않을 경우 원만한 합의를 통해 이별한다.]

"만약 다른 상대가 생기거나 다른 이유로 이별을 원하게 되면 헤어지는 거예요. 그게 제 조건 이에요.”

'원만한 합의라.'

그러니까, 좀 번거로운 방식이긴 했지만 그녀가 요구한 것은 둘 모두에게 깔끔한 이별이었다.

다소 어이없어하면서도 레녹스는 별 고민 없이 서명했었다. 그에게는 손해 볼 것 없는 조건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녀가 자신을 먼저 버리게 될 가능성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줄리엣 모나드.”

"화 나셨어요?”

줄리엣이 싱긋 웃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지쳐 보였다.

“전하께서는 잊으셨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레녹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붙잡는 것은 그였고, 이별을 말하는 것은 그녀였다.

그런데도 왜 정작 자신을 버리고 떠나겠다는 그녀가 더 체념하고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것인지.

"이유가 뭐야."

"그냥요. 떠나게 해 주세요."

"줄리엣."

"그동안 꽤 잘하지 않았나요, 저?"

"뭐?"

"전하가 싫어하시는건 아무것도 안 했어요. 아… 가끔 허락받지 않고 나비를 쓰긴 했지만."

"......."

"그래도 정말 많이, 노력했거든요. 울거나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그런데 저도 일주일 뒤면 스물다섯이고.”

줄리엣은 조용히 웃으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레녹스는 여전히 그 희고 가느다란 목선이 신경쓰였다.

“그러니까 이제는 남들처럼 조용히,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요.”

"평범하게?"

“네.”

그 단어가 귀에 거슬렸다. 마치 그의 곁에서는 평범하지 못해서 불행했다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러면 지금은 평범하지 않나?”

줄리엣이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더니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웃어?

싸늘한 그의 표정을 본 줄리엣은 웃음을 그쳤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전하는 평범하지 않으시잖아요."

그렇게 덧붙이는 줄리엣의 옆얼굴은 어쩐지 조금 처연했다.

“사실은, 한 번도 그런 적 없으시죠.”

연회장에서 흘러나온 불빛으로 살짝 내리깐 줄리엣의 속눈썹이 거짓말 같은 음영을 드리웠다.

레녹스는 줄리엣이 조금 전 연회장에서 또래 아가씨들을 멀찍

“네?”

평범하게, 남들처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레녹스는 차갑게 비웃었다.

웃기는 소리.

그는 신경질적으로 타이를 풀어 헤쳤다.

"더는 못 들어 주겠군.”

그는 곧장 줄리엣의 어깨를 감싸 안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에게 끌려 나온 줄리엣은 연회장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던 공작가의 마차를 보고서야 놀라 멈춰 섰다.

“전하!”

"파티는 끝이야.”

“레녹스! 잠깐만요, 아직 드릴 말이…….”

물론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줄리엣을 마차에 태운 뒤 문을 닫고 마부석에 앉아 있던 호위 기사에게 말했다.

“북부로 돌아간다.”

“레녹스!”

놀란 줄리엣이 마차 안에서 외쳤지만 그는 깔끔히 무시하고 마부에게 명령했다.

“저택에 도착하면 바로 돌아갈 채비를 하라고 일러라."

“예? 오늘 말입니까?"

“그래.”

레녹스는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검은 갑주를 입은 공작가의 늑대들이 묵묵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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