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8화 (8/229)

8화.

**

연회가 시작되고 춤곡이 네 번째 바뀌었다.

몇 번인가, 줄리엣 모나드를 알은체하는 사람들이 다가와 그녀에게 샴페인을 권하기도 했지만 줄리엣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요.”

레녹스는 그 광경을 조금 떨어진 발코니에서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낮에 신전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줄리엣의 주변에는 호기심어린 추파들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이 겸양은 아니었는지 연달아춤을 청하러 간 남자들이 빈손으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주변의 시선에는 아랑곳 않고 자리를 지키던 줄리엣이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딱 한 번 뿐이었다.

줄리엣 또래의 아가씨들이 연회장 한쪽에 모여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결혼 축하드려요!"

"아리따운 신부가 되실 거예요.”

반응을 보아하니, 결혼식을 앞 둔 예비 신부인 모양이었다.

줄리엣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수줍어하는 예비 신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레녹스 칼라일은 줄리엣이 대체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레녹스는 새삼스레 곱씹었다.

그가 지켜보는 동안, 줄리엣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붙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도 추파 아니면 조롱.

'그래서 혼자 저러고 서 있나?'

레녹스는 어쩐지 그녀가 엄마잃은 아이처럼 혼자 오도카니 서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연회 전 공작가의 비서인 엘리 엇이나 줄리엣의 호위를 맡고 있는 케인이 필사적으로 줄리엣 모나드를 변호하려 들던 게 떠올랐다.

심지어 주드는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며 줄리엣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번만 봐주면 안 되냐고 대놓고 묻기까지 했다.

"얼마 전에 아가씨랑 친한 하녀가 홀랑 결혼해서 떠나 버렸잖습니까. 그것 때문에 싱숭생숭해서 실수하신 게 아닐까요?"

레녹스는 고용주를 닮아 성격나쁜 부하들이 기겁해서 그녀를 감싸려 드는 게 꽤나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레녹스는 그들이 착각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사실 그는 줄리엣이 다른 남자와 놀아났다거나 하는 가능성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줄리엣을 믿어서라거나 그 스스로의 자존심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게 줄리엣 모나드답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레녹스는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상해진 것이 줄리엣 모나드가 아닌, 레녹스 칼라일일 가능성.

평소의 그였다면 번거롭게 연인의 행적 따위를 캐지 않았을 것이다.

이쯤에서 더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이 관계를 정리했어야 맞았다.

그런데도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새 정이라도 들었나?'

정이라.

사실, 그들의 관계는 끝나도 애초에 끝났어야 옳았다.

그는 쉽게 싫증내는 성격이었고 가볍고 짧은 관계를 선호했으니까.

감정이 질척해지기 전에 매정하게 끊어 내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그가 질리면 그 관계는 끝이 났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레녹스는 희미한 위화감을 눈치챘다.

북부의 공작성, 그의 침실에 누군가의 존재가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어스름한 새벽녘.

밤새 시달려 곤히 잠든 여자를 잠자리에 남겨 두고 침대를 먼저 빠져나오는 일상이 익숙해질 무렵.

그는 본능적으로 더 이상은 위험하다고 느꼈다.

그것을 보다 분명하게 자각한 것은 3년 전, 북부의 여름 축제무렵의 일이었다.

축제의 전통대로 여자가 레녹스의 이름 머리글자와 가문의 문장을 수놓은 정갈한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때 그는 미간을 찡그림과 동시에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여기까지군.'

그와 동시에 그의 일부는 조금 안도했던 것 같다.

'그럼 그렇지.'

조금 오래 걸렸을 뿐, 줄리엣모나드도 그를 거쳐 간 과거의 여자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이렇게 정성을 담은 선물을 내밀고 거절당하면 상처받고, 종내는 그 이상의 감정을 바라며 매달릴 게 뻔했다.

너무 오래 끌었으니 이제 끝낼 때도 되었다.

그런데 그가 이별의 말을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평소에는 말수도 적은 여자가 먼저 말했다.

“싫어하시죠, 이런 거?"

마치 그의 속을 뻔히 다 안다는 투였다.

그가 뭐라 대답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는 사이 그녀는 한아름 품에 안고 있던 여름 꽃처럼 말갛게 웃었다.

"버리셔도 괜찮아요. 누구 줘버리셔도 상관없어요.”

축제에서 만난 귀부인들이 하도 만들어 보라고 성화여서 어쩔 수 없이 가져왔다고 했다.

거절당할까 봐 민망해서 덧붙이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담담히 그 말만을 남긴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서버렸다.

여자는 정말로 제가 가져온 선물이 당연히 버려질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그 태연한 태도가 몹시도 이상해서, 그는 결국 그 손수건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말갛게 웃는 얼굴이 떠올라 서랍 깊숙이 넣고 잠가 버렸지만 그런 물건을 타인에게 준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가끔 그 자신보다도 그를 더 잘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고작 스물 몇 해를 산 주제에 줄리엣의 말과 행동은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초연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가끔은 그를 아주 오랫동안 알아 온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굴기도 했다.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게 그리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거다.

레녹스 칼라일은 그 모호한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잘라 내기에는 아쉬웠고 인정하기에는 애매했다.

그래서 섣불리 그녀를 놓아주지도 못했다.

오늘은 끝내야지. 내일은, 다음 계절에는, 그렇게 다짐한 것이 수년째.

여전히 그는 그 감정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 * *

“몸이 좋지 않아서 춤은 무리예요. 미안해요.”

좋은 말로 거절하는 것도 한두번이지.

그러나 다행히도 줄리엣이 더 이상의 범죄에 발을 들이기 전에 문제가 해결되었다.

"고, 공작 전하!”

술에 취한 척 기분 나쁜 눈빛을 던져 대던 남자는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 되었다.

군기 바짝 든 동작으로 꽁무니를 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등장만으로도 멍청이들을 쫓아내 버리는 남자를 본 줄리엣은 각했다.

이 상황이 꽤나 불공평하다고 생하기야, 이곳에 불공평한 게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는 북부의 공작이었고 전쟁영웅이었고 동시에 젊고 부유한 미혼 남자였다.

'그리고 나는 줄리엣 모나드지.'

줄리엣은 언제 서글픈 표정을 을지었냐는 듯 검은 머리의 남자를 향해 재빨리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 전하. 오셨네요."

그러나 남자는 그녀를 향해 마주 웃어 주지 않았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뭐.

줄리엣의 미소가 무색하게 남자의 시선은 냉담하기만 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시선이었다.

대리석 조각처럼 싸늘한 얼굴로 남자가 말했다.

“얘기 좀 하지."

잊혀진 줄리엣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