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
여주인은 줄리엣을 멀리서 보고 한 폭의 그림 같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티 테이블 아래에서는 그녀의 다리가 조심성 없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줄리엣은 사락사락 속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기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마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티하우스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려서 걸어온 것은 줄리엣이 예상했던 사람이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아가씨.”
얼굴에 커다란 흉터가 있는 남자는 온몸이 무기인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줄리엣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그를 빤히 마주보다가 말했다.
“케인 경.”
"예, 아가씨.”
“아까 왜 자리 비웠어요?"
"....."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케인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 사이 줄리엣이 생긋 웃어 보였다.
“아까 주드 경이 그러던걸요.
케인 경에게 갑자기 일이 생겨서 대신 왔다고요. 왜 자리 비웠어요?"
“죄송합니다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줄리엣 모나드는 보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줄리엣은 적당히 납득하기는커녕, 본격적으로 턱을 괴고 물었다.
장난스레 눈을 빛내는 것이, 그냥 떠보는 게 아니라 이미 다 알면서 묻는 것 같기도 했다.
“전하가 부르시던가요?”
“...… 아닙니다.”
딱히 추궁하거나 따져 묻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케인은 줄리엣이 이제 그만 물어봐 줬으면 하고 바랐다.
원체 무뚝뚝한 인상이라 표도 나지 않았지만 그는 지금 몹시 난처했다.
케인 할은 자신이 거짓말에 서 투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말로 대화하는 것보다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에 더 능숙했다. 그는 원래 검투장 노예출신으로 전쟁터를 떠돌던 수준 급 용병대장이었다.
용병으로서는 드물게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그를 고용한 것은 북부의 칼라일 공작이었다.
칼라일 공작은 출신에 관계없이 유능한 자라면 누구든 고용했다.
운 좋게 칼라일 공작의 눈에 들어 지금은 공작가 기사들에게 실전 검술을 가르치고, 또 수도에 온 뒤로는 줄리엣의 호위를 맡고 있지만 따지자면 케인은 정식 기사도 아니었다.
평민은커녕 검투장에서 도망친 노예 출신이었다.
그리고 줄리엣 모나드는 그런 케인을 '경'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몇 시간 전 갑자기 케인을 호출한 칼라일 공작은 줄리엣 모나드에 대해 물었다.
최근 그녀가 어딜 다녀왔고, 누굴 만났고, 누구와 연락을 주고받았는지 물었다.
"평소와 다른 점은 없나?"
케인은 왜 공작이 그런 것을 묻는지는 몰랐지만 공작의 신경이 전에 없이 날카롭다는 것만은 알아챘다.
그래서 케인은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줄리엣 모나드를 최대한 변호했다.
아가씨는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고 계시며 수상한 점은 없었노라고.
그러나 그런 것을 곧이곧대로 줄리엣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연하다. 그의 주인은 칼라일공작이지 줄리엣 모나드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케인은 어쩐지 양심의 의가책을 느꼈다.
“전하가 뭐라고 물으시던가요?
내 얘기도 했어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케인은 더 이상 둘러대는 것을 포기하고 솔직히 거절했다.
“그렇구나.”
케인은 내심 줄리엣이 더 캐물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의외로 그녀는 바로 납득했다.
줄리엣은 다행히 더는 묻지 않았다.
별로 실망한 표정도 아니었다.
케인은 조심스럽게 줄리엣을 결눈질했다.
“으음.”
어쩐지 줄리엣은 그에게 흥미를 잃은 듯 보였다. 기분이 상한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잠시 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용하던 줄리엣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긋 웃으며 그에게 음료가 든 유리잔을 밀어 주었다.
"앉아서 드세요. 시원하고 달아요.”
"예.”
케인은 그녀가 권한 맞은편 자리에 앉아 유리잔을 받아 들었다.
때마침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던 티하우스의 여주인은 기겁했다.
맨손으로 소도 때려잡을 전직용병대장과 공작의 연인인 아가씨가 티 테이블에 마주앉아 사이 좋게 차를 들고 있었다.
상당히 기묘한 광경이었다.
극소수의 사람만 아는 사실이었지만, 케인 할은 독한 술을 별로 즐기지 않았다.
대신 달고 시원한 음료를 좋아했다. 외모와는 상반된 취향이었다.
줄리엣은 그 사실을 눈치챈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종종 홀로 즐기는 티타임에 케인을 끼워 주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케인은 이 시간을 꽤 좋아했다.
줄리엣 모나드는 말수가 적었지만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드는 묘한 재주가 있는 아가씨였다.
그래서 케인은 주군인 칼라일공작이 그녀를 곁에 오래 두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 아닐까 하고 가끔 생각하고는 했다.
어느덧 잔을 다 비운 케인은 슬쩍 줄리엣의 눈치를 살폈다.
줄리엣은 그에게는 완전히 흥미를 잃은 듯 음료에는 손도 대지 않고 거리를 구경했다.
그러다가 케인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음료, 더 드릴까요?”
"예.”
그녀의 말대로 음료는 달고 시원했지만 케인은 어쩐지 맛을 느낄 수 없었다.
**
저녁.
레녹스 칼라일은 예정보다 조금 일찍 황궁의 연회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플로어로 내려가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위층의 인적 드문 발코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찾았습니다.”
그에게 다가온 검은 갑주의 기사, 하단이 조용히 보고했다.
공작가의 ‘늑대들'이란 가주의 명령에 따라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정예의 기사들이었다.
하딘은 그런 늑대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였다.
“제8지구에 사는 남자로, 이름은 도노반이라는 자입니다.”
백작가를 방문했었다는 수상한 남자를 찾아오라고 명령한 지 몇 시간 만에 공작가의 늑대들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신병을 확보해 왔다.
“예.”
검은 갑주의 남자가 조용히 물러간 뒤에도 레녹스는 발코니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아래층에서는 무도회가 시작됐다.
화려하게 차려입고 춤추며 플로 어를 누비는 사람들 가운데 한 여자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짙푸른 드레스 차림의 그녀는 는홀로 조용히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조명 아래 은빛으로 반짝이는 연갈색 머리칼, 고스란히 드러낸 우아한 목선과 둥근 어깨. 고혹할 만한 자태까지.
어울리지 않게 벽의 꽃 노릇을 하고 있는 여자는 오늘 하루 종일 그의 신경을 건드려 대던 바로 그 여자였다.
‘만약 연회장에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나타나지 않으면 백작저로 찾아가 직접 끌고 올 작정이었는데.’
줄리엣은 기특하게도 약속대로 황궁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솔직히 레녹스는 오늘 그녀에게 조금 감탄했다.
평소 입 안의 혀처럼 굴던 그의 연인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의 신경을 거스를 수 있었던 모양이다.
줄리엣 모나드는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연인이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그래서 편리했다.
이걸 사 달라 저걸 사 달라 조르지도 않았고 애정과 관심을 요구하며 징징거리지도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줄리엣이 단 한 번도 그에게 일방적인 감정을 강요한 적 없다는 점이었다.
줄리엣은 그에게 어떠한 감정의 보답도 요구하지 않았다.
사실 레녹스 칼라일이 연인에게 바라는 기준치는 그리 높지 않았다.
다소 부족한 교양이나 신분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다만 그는 언제든 깔끔하게 관계를 끊어 낼 수 있는 상대를 선호했다.
돈을 물처럼 써도 좋고 기함할만한 액수의 사치를 부려도 상관없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의 마지막이었다.
그가 원하는 시기에 관계를 깔끔하게 끝낼 것.
레녹스 칼라일은 첫사랑에 들뜬열다섯 살 소년이 아니었다.
한가하게 유치한 사랑 타령을 을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 따위는 딱 질색이었다.
필요에 따라 여자를 곁에 두긴 하지만 한 상대와 관계를 오래 지속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랬는데.
레녹스 칼라일은 빙긋 웃었다.
섬세한 눈매, 고집스러운 눈썹과 작은 코, 둥근 이마와 우아한 목선을 가진 줄리엣은 말수가 적고 눈치는 빨랐다.
그의 곁에 앉아서 재잘대기를 좋아하던 과거의 여자들과는 조금 달랐다.
사실 줄리엣은 그의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는 화려한 것을 좋아했지만 줄리엣 모나드는 귀족들이 환장하는 신전 벽화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듯 우아한 미인이었다.
애초에 그가 줄리엣 모나드를 연인으로 삼은 것은 꽤나 즉흥적인 변덕이었다.
하지만 줄리엣 모나드는 꾀꼬리처럼 고운 소리로 재잘대기는커녕 성가시게 뭘 먼저 요구하는 일조차 드물었다.
그래서 레녹스는 가끔은 그녀를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편리하다.' 라……….”
잊혀진 줄리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