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5화 (5/229)

5 화.

환술.

백작의 입이 딱 벌어졌다.

역시, 이 여자의 짓이었구나.

공작의 정부가 사악한 환술을 쓴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알아들었죠? 그럼 고개 끄덕여요.”

백작은 그저 넋 나간 표정으로 미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엣이 만족스럽게 웃고는 가뿐하게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배, 백작님!”

“무슨 일이십니까? 괜찮으십니까?”

"이, 이건, 말도 안 되는…….”

줄리엣이 유유히 자리를 뜨자 그제야 사람들이 몰려왔다.

카스퍼 백작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등 뒤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줄리엣은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바다가 갈라지듯 양쪽으로 우르르 길을 비켜 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심히 생각했다.

'가끔은 미친년 짓도 할 만한 것 같단 말이지.’

팔랑.

유유히 걷는 줄리엣의 뒤로, 어디선가 푸른 나비 한 마리가 나풀나풀 따라와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줄리엣은 나비가 제 손등에 내려앉는 것을 힐끔 보았다.

푸른 나비는 애교스럽게 줄리엣는 무시무시한 마물이었다.

본체는 차원 너머에 존재하는 사악하고 강대한 신격.

그것을 맨눈으로 보면 미쳐 버리기 때문에 사람의 눈을 현혹하는 나비의 형태를 빌린 것뿐이라고 했다.

이 나비들은 줄리엣이 원하는 상대에게 악몽을 선사했다.

그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괴물이나 장면을 보여 주고 희생자의 감정을 먹어 치웠다.

푸르스름한 빛 덩어리가 되어 그녀에게 다시 흡수되었다.

나비가 충분한 마력을 먹고 자라면 보다 다양한 환상을 조종할 수 있다.

하지만 방금 전 카스퍼 백작을 협박했던 것처럼 자는 중 지붕에서 뛰어내리라고 명령하는 것 같은 - 완전한 정신 지배는 아직 그녀에게 무리였다.

'게다가 소드마스터에게는 먹히지도 않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녀가 환술로 레녹스 칼라 일을 유혹한다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그런 게 가능했었다면 이런 신세가 되지도 않았겠지.'

그는 이미 10년 전부터 최연소 소드마스터로 유명했으니까 말이다.

* * *

“아가씨.”

청년은 공작가의 기사 중 하나인 주드였다.

주드 헤이온은 공작가의 가신들 중에서도 나이가 어린 편으로 기사단 내에서는 막내였다.

주드는 타고나길 누구에게나 붙임성 좋고 활달한 성격이었다.

붙임성이 좋다 못해 종종 불경스럽게도 주군의 연인인 줄리엣을 누이동생 대하듯 했지만.

주드는 잠시 주변을 휘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줄리엣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안에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없었어요.”

“그럼 왜 다들 아가씨만 보고 있죠?”

"글쎄요.”

줄리엣은 남 얘기를 하듯 딴청을 부렸지만 주드는 대충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드 헤이온은 줄리엣과 마찬가지로 제도의 귀족가 출신이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수도 사교계가 유치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고만고만했으니까.

"아가씨.”

의미심장하게 씩 웃던 주드는 줄리엣에게 마차 문을 열어 주는 대신 과장된 동작으로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칼라일 공작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다분히 주변을 의식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순식간에 주변의 이목이 집중된 것이 느껴졌다. 줄리엣은 가만히 그런 주드를 내려다보았다.

'…마차 안에서 줄 수도 있는 물건을 굳이 바깥에서 주다니.'

그것도 사람들의 시선이 잔뜩 쏠린 신전 앞, 공작가 문양이 새겨진 마차 앞에서.

주드가 줄리엣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귀족 출신인 주드는 ‘귀족스러운’ 치졸한 상황 대처에 익숙한 편이었다.

“전하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태양의 눈물입니다.”

주드가 주변에 다 들리도록 힘주어 발음하며 비로드 상자를 열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눈부시게 화려한 목걸이였다.

태양의 눈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큼직한 노을색 다이아몬드를 메인으로, 다시 작고 투명한 무색 다이아몬드들이 그 주변을 촘촘히 둘러싸고 있었다.

그야말로 휘황찬란한 광채였다.

호화로운 목걸이는 대충 보기에도 무척 값비싸 보였다.

“세상에.”

“어쩜, 저 광채 좀 보세요."

줄리엣이 뭔가 반응하기도 전에 먼발치에서 아까부터 이쪽을 힐끔거리던 구경꾼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쑥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줄리 엣은 무신경하게 생각했다.

이제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부지런히 가서 저마다 제가 본 것에 대해 소문을 퍼뜨릴 것이다.

그러면 신년 연회가 열리는 저녁 무렵에는 온 수도 사람들이다 알게 되겠지.

오랜만에 수도를 방문한 공작의 연인이 다른 귀족들에게 얼마나 안하무인으로 굴었는지.

그리고 칼라일 공작이 그 버릇없는 애인에게 얼마나 사치스러운 목걸이를 선물했는지 말이다.

정작 줄리엣은 휘황찬란한 목걸이를 감흥 없는 눈으로 조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만 가요.”

“예.”

주드는 일부러 천천히 상자를 를닫은 다음에야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마차에 오르기 직전 술렁거리는 좌중을 한번 훑어봐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모퉁이를 막 벗어났을 때, 앞좌석에서 마부가 행선지를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줄리엣의 맞은편에 앉은 주드가 당연하다는 듯 그녀에게 물었다.

“저택으로 돌아가실 거죠?”

"아뇨.”

“예?”

“저는 모나드 백작저로 갈 거예요. 중간에 내려 주시겠어요?"

주드가 멍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는 사이, 마부는 수도 외곽 쪽 굳이 따지자면 줄리엣이 자기 집인 백작가로 가겠다는 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드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같이 안 돌아가십니까?"

"네. 그리고 이것도 다시 가져가세요.”

“예?”

계속 되묻기만 하는 자신이 좀 바보 같다고 느꼈는지, 주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뇨, 예뻐요.”

“그럼 왜요? 대놓고 말하긴 좀 그렇지만, 그거 좀 많이 비싼 겁니다. 특별히 모나드 양 생일 선물로 공수해 온….….."

그러나 대답 대신 줄리엣은 조용히 웃었다.

"마력석만큼은 아니라도 쓸 만하지.”

마력이 응축된 마력석보다는 낮지만, 크고 순도 높은 보석에는 미량의 마력이 들어 있었다.

그걸 처음 가르쳐 준 사람은 그 남자였다.

그녀는 납작한 비로드 상자에 놓인 목걸이를 잠시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서늘한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큼직한 다이아를 정교하게 세공한 목걸이는 확실히 예뻤다.

모르긴 몰라도 주드의 말대로 무척 값비싸고 귀한 물건일 것이다.

그러나 줄리엣은 이게 수도 저택 몇 채 값일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아마 공작가의 비서들 중 하나가 적당히 골라 왔을 것이다.

그 남자는 이 목걸이가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보지도 않고 백지 수표에 서명했겠지. 매해 그녀의 생일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줄리엣은 이 값비싼 선물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그 남자가 목걸이를 굳이 기사의 손에 안 그녀가 배운 게 있다면 그건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레녹스 칼라일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남자가 자존심을 꺾고 그녀에게 애정을 구하는 날은 영영오지 않을 것이다.

그 어리석은 교훈을 깨닫기 위해 줄리엣은 7년을 허비해야 했다.

달칵.

줄리엣의 손이 상자의 잠금장치를 닫았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같은 방식으로 답을 돌려줄 차례겠지.

줄리엣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주드에게 목걸이가 담긴 상자를 돌려주었다.

“이건 제가 받기로 한 생일 선물이 아니에요.”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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