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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4화 (4/229)

4화.

방금 전까지 줄리엣이 망신당하기를 고대하던 구경꾼들은 일제히 얼어붙었다.

침묵을 깨뜨린 것은 프리실라 공녀의 비명이었다.

“…… 줄리엣 모나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프리실라 공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지, 지금 칼라일 공작의 총애를 믿고 이렇게 오만방자하게 나오는 건가요?"

“네.”

“뭐…… 뭐라고?”

“네, 맞아요. 공작가를 믿고 함부로 구는 건데요."

줄리엣이 예쁘게 활짝 웃었다.

프리실라는 대경실색했다.

황녀처럼 떠받들려 살아온 프리 실라에게 이 같은 모욕은 처음이었다.

“줄리엣 모나드! 어떻게, 사람의 호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프리실라는 방금 전 제가 저질렀던 일은 까맣게 잊고 눈물을 글썽였다.

온갖 방법으로 칼라일 공작의 연인들에게 망신 주기를 즐기던 프리실라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러나 줄리엣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대꾸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저는 공녀님의 호의를 돌려 드린 것뿐인걸요.”

"그…!”

말문이 막힌 프리실라가 줄리엣을 노려보았다.

본인이 저지른 무례를 그대로 돌려주었을 뿐인데, 정작 본인이 당하는 것에는 면역력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기가 막혀서!”

한동안 씨근거렸지만 프리실라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프리실라는 결국 자리를 피하는 것을 택했다.

"고, 공녀님!”

어쩔 줄 몰라 하던 귀부인 몇몇이 황급히 프리실라를 뒤쫓아 갔다.

줄리엣은 느긋하게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간 억지에 가까운 프리실라의 패악이 먹혔던 이유는 간단하다.

과거 레녹스 칼라일의 연인들이 신분이 낮고 사교계의 법도에 어두웠기 때문이다.

프리실라의 신분에 겁먹은 그녀들은 공작에게 달려가 울면서 일러바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혹은 그의 관심을 잃을까 봐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고 당하기만 하거나.

두 가지 다 줄리엣에게는 해당사항 없는 이야기였다.

‘머리채라도 잡을 줄 알았더니..'

어떻게 나오는 똑같이 해 줄 작정이었는데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줄리엣은 힐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구경꾼들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회피했다.

"크흠!”

괜히 헛기침하며 딴청을 부리더니 곧 흩어져 버렸다.

줄리엣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보란 듯이 활짝 웃어 보였다.

사실 사람들이 공작의 연인들을 조롱하고 비웃을 수 있었던 것은 레녹스 칼라일이 철저히 무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줄리엣 모나드가 사교계에서 얼마든지 안하무인으로 굴어도 그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란 뜻이기도 했다.

어지간히 멍청하지 않고서야 공작가를 적으로 돌리고 싶진 않을 테니까.

그런데 있었다. 그만큼 눈치 없는 인간이.

줄리엣이 막 예배당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바깥 복도에서 기다리던 누군가 줄리엣의 팔목을 거세게 낚아챘다.

“칼라일 공작의 계집 취향이 천박하다고 떠들던데, 알 만하군.”

빈정거림에 줄리엣은 잡힌 팔을 뿌리쳐 빼내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카스퍼 백작님.”

프리실라 공녀의 약혼자인 카스퍼 백작이었다.

"하! 발뺌할 생각인가?”

바싹 다가온 카스퍼 백작이 이 죽거렸다.

"나도 다 들은 게 있다고."

그러니까, 뭘?

예배당 밖 복도에는 방금 전처럼 구경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주위에 보는 눈이 별로 없다는 것을 확인한 카스퍼 백작이 목소리를 잔뜩 낮춰 속삭였다.

"듣자 하니 요사스러운 환술을 쓴다지?”

줄리엣은 어이없어 픽 웃고 말았다.

어디서 그녀의 이능에 대해 어설피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딱히 비밀도 아닌데.'

줄리엣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소문이 어떤 식으로 와전되었는지 짐작이 갔다.

“그걸로 공작을 꾀어냈나? 응?”

요사스러운 환술이라.

문득 줄리엣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 틈에 제 팔목을 더듬고 있는 손가락의 감촉이 징그러웠다.

“그게 아니면…… 다른 쪽 재주가 뛰어나신가?”

줄리엣은 어렵지 않게 카스퍼백작의 탁한 눈에서 저열한 욕망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북부에서도 몇 번 겪었던 일이다. 워낙 예전 일이지만, 이보다 노골적인 추파를 던져 대는 작자들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그 인간들이 어떻게 되었더라?’

별안간 의문이 든 줄리엣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 추근댔던 남자들을 다시 본 기억이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북부 사교계는 수도보다 좁은 편인데.'

“그런다고 너 따위가 진짜 공작부인이라도 될 줄 알아?"

딴생각을 하느라 줄리엣이 잠자코 있자 백작은 기세등등해졌다.

그녀가 겁먹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주제를 알아야지. 레녹스 칼라 일은 그렇게 만만한 인간이 아니라고. 어차피 너 따위는 공작이 변심하면 끝이야. 알아?"

'아, 드디어 본심이 나오셨군.' 줄리엣은 고개를 들었다.

‘그런다고 너 따위가 공작 부인이라도 될 것 같아?'라는 말.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차라리 프리실라 공녀는 이해하기 쉽다. 프리실라의 욕망은 투명하고 단순하니까.

애초에 이 사람들은 그녀에게 원한을 가질 만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공연히 줄리엣을 깎아내리고 시비를 걸어오는 것은 레녹스 칼라일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칼라일 공작은 무섭지만 아무런 힘없는 여자를 품평하는 것은 쉬우니까.

'겁쟁이들.’

줄리엣은 싸늘하게 비웃었다.

감히 칼라일 공작을 깎아내릴 용기는 없는 주제에 만만한 대상에게 굴절된 분노를 투영하는 것이다.

사실은 누구보다도 칼라일 공작을 열렬히 사모하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쳐다보면 어쩔 건데? 공작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이르기라도 할 건가? 응?”

카스퍼 백작이 이죽거렸다. 마 마치 줄리엣이 그러지 않을 거란걸 알기라도 한다는 투였다.

줄리엣은 그를 지그시 보다가 물었다.

“백작님, 제가 부러우세요?"

"뭐?"

“그런데 어쩌죠? 제가 알기로 공작 전하께서는 남색에 취미 없으세요.”

“그게 무슨…….”

카스퍼 백작은 줄리엣의 말을 을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멍청히 눈을 끔뻑였다.

"뭐, 그게 아니라도 많이 노력 하셔야겠지만요.”

줄리엣이 대놓고 그를 위아래로 훑어본 다음 싱긋 덧붙였다.

그제야 알아들은 카스퍼 백작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런, 미친 계집이 ………!"

그러나 줄리엣의 뺨을 내리칠 것처럼 손을 들어 올리던 카스퍼백작은 갑자기 목이 졸리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커억!”

어느새 멀찍이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들이 본 것은 그저 카스퍼 백작이 줄리엣 모나드를 향해 우악스레 손을 번쩍 치켜올리는 장면 뿐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

어디선가 푸른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팔랑이며 날아올랐지만 그것을 눈치챈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쿠당탕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카스퍼 백작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사람들은 눈을 의심했다.

가장 먼저 카스퍼 백작에게 다가간 것은 제일 가까이 있던 줄리엣이었다.

"어머, 백작님?”

놀란 표정의 줄리엣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결백해 보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녀는 카스퍼 백작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댄 적 없지 않은가.

누가 봐도 카스퍼 백작이 혼자 나자빠진 모양새였다.

“세상에, 괜찮으세요?”

줄리엣은 다정하게도 카스퍼 백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들 눈에는 영락없는 도움의 손길로 보였겠으나…….

“허억!

“허어어억!"

카스퍼 백작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기겁하며 뒤로 물러나려 애썼다. 그래 봐야 바닥을 기었을 뿐이지만.

마치 일으켜 주려는 듯 다가간 줄리엣은 카스퍼 백작의 멱살을 꽉 틀어쥐었다.

“카스퍼 백작님.”

그리고 붉은 입술로 주변에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직하게 백작의 귓가에 속삭였다.

"닥치고 듣기나 하세요. 제가 백작님이라면 입을 조심할 거예요.”

줄리엣의 구두가 카스퍼 백작의 오른쪽 손등을 지그시 밟고 있었지만 겁에 질리다 못해 혼이 나간 카스퍼 백작은 그조차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사실, 백작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이 건방진 계집에게 버르장머리를 가르치려 했을 뿐이다.

그런데 별안간 어디서 푸른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그의 이마를 스쳤다.

그리고, 그리고…….

끄으윽.

백작은 흘러나오는 신음을 틀어 막았다.

조금 전 그녀가 입을 닥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공포로 턱이 덜덜 떨려 왔다.

그 기이한 푸른 나비가 백작의 머리를 건드린 순간,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하고 거대한 존재의 이미지가 '흘러 들어왔다.'

“이번엔 이 정도로 넘어가지만 혹시 모르잖아요? 다음에 또 어떤 '미친년이'줄리엣은 그 단어의 발음이 재밌다는 듯이 생긋 웃었다.

“-심사가 뒤틀리면, 그땐 진짜 환술을 걸어서 한밤중 지붕에서 뛰어내리게 될지도 몰라요.”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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