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3화 (3/229)

3화.

*

줄리엣을 태운 공작가의 마차는 금방 수도의 대신전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신전 앞은 화려한 마차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1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더불어 신전이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날이기도 했다.

줄리엣은 일부러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렸다.

“금방 다녀올게요."

시중드는 하녀도 없이 혼자 걷는 줄리엣을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덕분에 줄리엣은 방해 없이 찬찬히 예배당을 구경할 수 있었다.

소원을 적은 종이와 헌금을 내면 신전에서는 그 가문의 이름으로 촛불을 밝혀 주는데, 헌금의 액수가 많을수록 초의 크기가 크고 화려했다.

얄팍한 상술이지만 체면에 목숨거는 귀족들은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새해 소원을 빌고 간 듯 제단 주위에 상당히 많은 촛불들이 놓여 있었다.

덕분에 둥근 돔 천장 아래 선새하얀 대리석 여신상은 후광을 두른 것처럼 보였다.

줄리엣은 금화가 든 손지갑을 꺼낸 뒤에야 자신이 딱히 소원을 생각해 두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하나.'

줄리엣이 멍하니 여신상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맞죠?”

“저 여자가요?”

"그 칼라일 공작의……?"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쏟아지는 시선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레녹스 칼라일은 사교계 따위에는 철저히 무관심했지만 제국의 귀족들은 그에게 관심이 많았다.

미혼의 젊은 공작.

심지어 그는 부유한 권력자였다.

북부의 공작이 수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1년에 딱 한 번.

황궁의 신년 연회뿐이었다.

그는 언제나 연회에 아름다운 파트너를 대동하고 나타났는데, 매해 다른 파트너를 동반하곤 했다. 길어 봤자 3개월을 넘기지 못했지만 그 여자들은 ‘칼라일공작의 연인'이라고 불렸다.

그의 시한부 연인들은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거기에는 칼라일 공작의 취향과 무심한 태도도 한몫했다.

공작의 연인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지만 의외로 신분이 낮았다.

눈부신 미인이지만 신분이 낮고 다소 교양이 부족한 공작의 연인들은 사교계 사람들의 입맛에 꼭 맞는 먹잇감이었다.

사람들은 공작의 새 연인이 등장하면 외모는 어떻고 취향은 얼마나 천박한지, 또 얼마나 순진 한지 비웃기에 바빴다.

하지만 사교계 사람들이 가장 떠들기 좋아하는 화제는 따로 있었다.

공작에게서

이별을 통보받은

이후 그녀들은 과연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

“아니, 모나드 양이 아니십니까?”

아니나 다를까.

줄리엣이 어린 사제에게 금화를 건네며 초를 켜 줄 것을 부탁하자마자 사람들이 몰려와 그녀를 둘러싸고 인사를 건네 왔다.

“모나드 양, 수도에는 언제 도착하셨습니까?"

“공작께서는 잘 지내시지요?"

“저번에 티파티 초대장을 보냈는데, 받으셨나 모르겠네요.”

“계속 거절하시면 섭섭해요.”

작게 심호흡한 뒤 돌아선 줄리 엣은 생긋 웃으며 적당히 응대했다.

“조금 바빠서요. 초대는 고맙지만 거절할게요.”

웃는 낯이었지만 명확히 선을 긋는 태도였다.

어차피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들이다.

줄리엣은 그들이 자신을 두고 뒤에서 뭐라고 떠들어 대는지 잘 알고 있었다.

"불쌍하게도.”

“정말 자기가 공작 부인이라도 될 거라고 믿는 모양이죠?"

몇 년 전, 줄리엣 모나드가 처음으로 칼라일 공작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그녀가 그때까지 공작을 거쳐 간 과거 연인들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일단 줄리엣 모나드는 유서 깊은 백작가의 외동딸이었다.

비록 모나드가는 과거 개국공신 가문이었다는 걸 빼고는 내세울 것 하나 없는 가문이었지만 과거 공작의 연인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높은 신분이었다.

게다가 그때까지 칼라일 공작의 연인들은 하나같이 눈이 번쩍 뜨이는 화려한 타입의 미인이었다.

그에 반해 줄리엣 모나드는 붓으로 그려 낸 듯 섬세한 눈매가 우아한 미인이었다.

칼라일 공작의 취향을 똑똑히 기억하던 이들은 어리둥절했다.

죽은 모나드 백작 부부는 점잖은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외동딸인 줄리엣 역시 구설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반면 레녹스 칼라일은 어떠한가.

그는 온갖 소문과 가십을 몰고 다니는 북부의 공작이었다.

그런데 몰락한 명문가의 아가씨가 칼라일 공작의 손을 잡고 무도회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아무래도 공작의 취향이 바뀌었나 보군요.

"과연, 이번에는 얼마나 갈까요?”

당황도 잠시, 곧 사람들은 흥미로워하며 떠들어 댔다.

대상이 바뀌었을 뿐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리석게도 칼라일공작의 손을 잡는 순간부터 줄리 엣 모나드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신분이 높았던 만큼 몰락 역시 비참할 터였다. 줄리엣 모나드는 사교계 사람들이 물어뜯기 딱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저런, 불쌍하게도 꿈에 부풀었겠네.”

"죽은 백작 부부만 우습게 됐지.”

동정을 빙자한 조롱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줄리엣 모나드가 몇 달 만에 공작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인가를 두고 내기했다. 모두가 어리석은 백작 영애를 비웃으며 그녀의 몰락을 기대했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계절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도기대하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줄리엣 모나드는 여전히 북부에 머물렀고, 여전히 그녀는 공작의 연인이었다.

사람들은 실망했다.

물론 공작이 정말로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른다고 착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족이 아닌 제국 유일의 공작가. 그런 공작가의 안주인이 되기에 모나드 백작가는 턱없이 부족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를 대하는 칼라일 공작의 태도는 이전의 연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칼라일 공작이 그녀를 정말로 진지한 상대로 생각했거나 조금이라도 배려했다면 결혼 적령기의 귀족 영애를 아무런 공식적인지위도 없이 곁에 두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한껏 불만스러워진 사람들은 이제 줄리엣을 빈정거리며 노골적으로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백작 영애에게 요사스러운 재주가 있답니다.

"어쩜, 천박해라.”

“얌전한 척은 다 하더니, 그런 수로 공작을 피었나 보네요."

사람들은 그녀가 북부의 안주인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줄리엣 역시 그 생각에 동의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과는 달리, 줄리엣은 단 한 번도 자신이 그와 결혼하게 되리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레녹스 칼라일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언제든 필요 없어지는 순간이 오면 그녀는 가차 없이 버림받게 될 터였다.

"어머, 이게 누구야?"

갑자기 신전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한 무리의 사람을 이끌고 여자가 등장했다.

그녀는 줄리엣을 향해 쾌활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줄리엣 양."

“……프리실라 공녀님."

노골적인 적의가 느꼈지만 줄리 엣은 모르는 척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조카딸인 프리실라 공녀였다.

그녀는 딸이 없는 황실에서 황제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덕분에 프리실라 공녀는 사교계에서 황녀나 다름없는 지위를 누렸다.

그녀는 다른 의미로도 유명했는 데, 10년 전 레녹스 칼라일이 처음으로 황궁 연회에 참석했을 때 첫 춤을 췄던 상대가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조숙하기도 하셔라.'

그때 프리실라 공녀의 나이는 고작 열다섯 살이었을 텐데.

어쨌든 그날 이후 네 살 위의 북부 공작에게 반해 버린 공녀는 황제를 조르기 시작했다. 칼라일공작가에 청혼서를 넣어 달라고 말이다.

황제는 한동안 이 일로 골머리를 썩었다. 만약 레녹스 칼라일이 황제의 조카딸을 아내로 맞게 되면 안 그래도 위협적인 공작가에 날개를 달아 주는 격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거절당한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황실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프리실라의 고집 때문에 황가의 이름으로 청혼서를 넣었다는 소문이 파다 했었다.

그리고…….

“늦었지만 약혼 축하드려요, 공녀님.”

“괜찮아요. 시골 촌구석에 살다보면 소식이 느린 게 당연하죠."

말 속에 가시가 있었지만 줄리 엣은 엷게 미소 지었다.

이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다.

반년 전, 결국 프리실라는 황실의 친척인 카스퍼 백작과 약혼했다.

줄리엣은 프리실라 공녀의 옆에서 그녀를 노골적으로 훑어보는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못마땅한 표정이나 화려한 옷차림을 보아하니 저 남자가 카스퍼백작인 모양이었다.

프리실라 공녀에게 나쁜 선택지는 아니다.

카스퍼 백작은 기네스 후작의 양아들이었고, 그의 아버지가 죽으면 그가 기네스 후작이 될 테니까.

기네스 후작가는 제국 남부를 다스리는 대귀족이었다.

“아무튼 잘됐네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같이 소원빌어요!”

갑자기 프리실라 공녀가 줄리엣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리곤 절 친한 친구처럼 막무가내로 팔짱을 끼고는 줄리엣을 제단 쪽으로 데려갔다.

“오랜만이니까. 모나드 양을 위해서 내가 초를 켜 주고 싶어요.”

다정한 표정과 함께 프리실라는 금화 하나를 꺼냈다.

쨍그랑.

그리고 그 금화는 프리실라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머나.”

누가 봐도 고의적인 동작이었다.

“미안해요. 손이 미끄러졌네. 줄리엣, 좀 주워 줄래요?”

그렇게 말하면서 프리실라는 떨어뜨린 금화를 구두로 지그시 밟았다.

"괜찮죠, 줄리엣? 우린 친구니까.”

그제야 프리실라 공녀의 의도를 알아챈 사람들 사이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구경꾼들은 줄리엣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는 듯 팔짱을 꼈다.

줄리엣은 금화를 밟고 있는 프리실라의 구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프리실라가 공작의 연인들을 공개적으로 망신 줄 때 자주 써먹던 수법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압박하다가 결국은 그녀의 발치에 고개를 조아리게 하는 얕은 수작.

줄리엣은 얼굴을 붉히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프리실라 공녀는 줄리 엣 모나드가 누구인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가세가 기울었다지만 모나드 백작가는 제국의 개국공신 가문이었다. 지난 몇 년간 북부에 머물렀지만 줄리엣은 수도에서 자랐다. 이런 유치한 수법에는 질리게 익숙했다.

다들 그녀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거나 얼굴을 붉히며 망신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겠지만 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

줄리엣은 모멸감에 얼굴을 붉히는 대신 담담하게 웃었다.

그녀는 운 좋게 분에 넘치는 연인을 잡아 꿈에 부푼 순진한 소녀가 아니었다.

'이 정도에 울음을 터뜨릴 만큼 순진하지도 않고 말이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늘 줄리엣모나드는 기분이 나빴다.

“뭐해요? 어서요, 줄리엣.”

프리실라 공녀가 다시 재촉했 했다.

평소라면 귀찮은 걸 싫어하는 성격상 그냥 적당히 넘어가 줄수도 있었겠지만….…..

눈을 빛내는 프리실라를 물끄러미 마주보다가 줄리엣은 담담히 미소 지었다.

“제게 더 좋은 생각이 있어요, 공녀님.”

더 좋은 생각?

프리실라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오른 바로 그 순간이었다.

챙그랑. 챙그랑.

경쾌한 소리와 함께 줄리엣의 손에서 수많은 금화들이 우수수바닥에 떨어졌다.

프리실라가 경악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줄리엣은 아랑곳 않고 가지고 있던 금화를 모두 바닥에 쏟아버리고 나서야 말했다.

“아까 미처 축의금을 잊었지 뭐예요.”

"이, 이게 뭐하는 짓…….”

“약혼 축하드려요, 공녀님."

줄리엣이 태연히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조금 전 프리실라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제가 손이 미끄러워서요. 하지만 우린 친구니까. 고작 이런 걸로 화내지 않으실 거죠?"

순식간에 신전 안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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