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잊혀진 줄리엣-2화 (2/229)

2화.

1. 헤어지는 이유.

레녹스 칼라일은 유서 깊은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났다.

북부를 다스리는 칼라일 공작가는 막대한 부와 권세를 자랑했지만 피로 얼룩진 암투가 끊이지 않는 가문이었다.

후계자로 태어난 소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을 때, 그는 아홉 살이었다.

선대 공작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죽자 탐욕스러운 친척들이 어린 후계자를 말에 태워 전쟁터로 쫓아 버렸던 것이다.

오합지졸 군대는 금방 도망쳤 쳤고, 아홉 살짜리 소년 가주는 전장에서 사라졌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10년 뒤, 붉은 눈의 남자가 무패의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기 전까지는.

공작령을 떠났던 소년은 전쟁영웅이 되어 돌아왔다.

꼭 10년만의 귀환이었다.

그의 군대는 자비를 몰랐고 손쉽게 북부의 공작성을 탈환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레녹스 칼라 일의 정통성이나 자격을 의심하지 못했다.

그것은 공작가 특유의 검은 머리칼과 붉은 눈 때문만은 아니었다. 감히 의문을 제기할 만한 친척들은 모두 그의 손에 목이 잘린 뒤였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아무도 젊은 칼라일공작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레녹스 칼라 일이 이처럼 짜증을 느끼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뭐라고 했지?"

“헤어져 달라고 말씀드렸어요.”

레녹스는 눈앞의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결치는 연갈색 긴 머리칼과 영민하게 반짝이는 푸른 눈. 장식 없이 얇은 네글리제 하나만을 걸치고도 그녀의 자세는 여왕처럼 곧았다.

짧은 침묵 끝에 레녹스 칼라일이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했다.

“줄리엣 모나드.”

그녀는 칼라일 공작의 공식적인 연인이었다.

“지금 장난하나?”

서슬 퍼런 기세에 움츠러들 만도 하지만 줄리엣은 겁을 먹기는 커녕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하게 눈을 깜박이기까지 했다.

“그럴 리가요, 전하."

“그럼 집어치우고 다시 말해.

좀 더 그럴듯한 걸로."

“하지만 이미 말씀드린걸요. 제가 바라는 건 그뿐이에요."

태연히 답하는 줄리엣의 표정은 평소처럼 차분했다. 마치 잔잔한 수면처럼.

반대로 레녹스의 눈매는 사나워졌다. 그들이 북부 영지의 공작성을 떠나 수도의 저택에 도착한 것이 고작 사흘 전의 일이었다.

매해 그랬듯, 황궁에서 열리는 신년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게이트를 두 개나 통과하는 여정이었지만 공작가의 가신들과 기사단까지 포함한 상당한 규모의 행차였다.

칼라일 공작의 연인으로 알려져 있는 줄리엣 역시 그와 함께 수도를 방문했다.

"전하를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7년 전 말했던 것처럼 줄리엣은 그를 성가시게 한 적이 없었다.

애정과 관심을 구걸하지도 않았고 눈물을 흩뿌리며 매달리지도 않았다.

그것이 그가 아는 줄리엣 모나 드였다.

단 한 번도 줄리엣은 그가 줄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늘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하필 북부를 벗어나기 무섭게 이 타이밍에 한다는 말이..

"헤어져 주세요.”

감히 자신을 떠나겠다고?

레녹스는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불쾌해졌다.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의 감정에도 무심한 남자답게, 그는 자신이 화가 난 이유 따위에는 관심 없었다.

다만 그는 줄리엣이 갑자기 돌변해서 어린애처럼 억지를 쓰는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유가 뭐야.”

"이유도 말해야 하나요?”

“줄리엣.”

"약속하셨잖아요. 뭐든 들어주시겠다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레녹스가 더 참지 못하고 줄리 엣의 팔을 붙들었다. 그때였다.

똑똑.

“전하, 엘리엇입니다."

가벼운 노크가 두 사람을 방해 했다.

“죄송합니다만, 아래층에 손님이와 있습니다.”

침실 문을 두드린 것은 공작의 비서인 엘리엇이었다. 그리고 줄리엣은 레녹스가 멈칫한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레녹스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

마치 장난치는 어린애처럼 줄리 엣은 뒤로 물러나 뒷짐을 지고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너”

"가 보세요. 손님이 기다리시잖아요.”

레녹스는 싸늘히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잠시뿐이었다.

오랜만에 북부 영지를 떠나 수도에 방문한 것이라 처리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었다. 그는 하루 종일 바쁠 예정이었다.

결국 레녹스는 마지못해 말했다.

"…… 오후에, 다시 얘기하지.”

“네, 나중에요.”

줄리엣은 끝까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공작을 배웅했다.

덜컹.

그러나 공작이 침실을 나가고 침실 문이 소리 내어 닫힌 바로 다음 순간.

미소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줄리엣은 그 자리에 무너지듯 풀썩주저앉아 버렸다.

“.……괜찮아, 괜찮아. 잘한 거야.”

홀로 남은 줄리엣은 두 손에 창백한 얼굴을 묻고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잔뜩 긴장했던 탓에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속눈썹 끝에 눈물이 맺혀 위태롭게 반짝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는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조차 사치였다.

호흡을 가다듬은 줄리엣은 하녀를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드레스룸으로 달려갔다.

**

공작가의 비서인 엘리엇은 손님을 배웅하고 돌아오다가 저택 본관에서 나오는 줄리엣과 마주쳤다.

단정한 외출용 드레스를 차려입은 줄리엣은 막 공작가의 마차에 오르려던 참이었다.

'이렇게 이른 시각에?’

“외출하십니까, 아가씨?”

"네, 신전에 다녀오려고요. 엘리 엇의 새해 운도 같이 빌어 줄게요.”

“감사합니다. 잘 다녀오시고요."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엘리엇은 이 차분한 아가씨를 꽤 높이 평가했다.

줄리엣 모나드는 영리하고 눈치가 빨랐지만 말수가 적고 신중한 성격이었다.

사실, 그 칼라일 공작의 연인으로 몇 년을 버텼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존경할 만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상대를 갈아치우던 공작에게 예외를 만든 것은 그녀가 유일했다.

줄리엣이 마차에 오르다 말고 엘리엇이 들고 있는 꽃 화분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뭐예요?"

"아, 이거요. 손님이 가져온 방문 선물입니다.”

새벽부터 저택을 방문했던 로만 후작은 아침 일찍 실례했다며 화분 하나를 선물로 주고 갔다.

선물치곤 소박하지만 로만 후작은 원예 애호가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줄리엣은 엘리엇이 들고 있는 보라색 꽃을 빤히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그러나 싶어서 화분을 내려다본 엘리엇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차..'

줄리엣 모나드는 까다로운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난하고 조용한 편이었다.

다만 한 가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는 보랏빛 달리아 꽃을 몹시 싫어했다.

생명력이 강한 달리아는 북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꽃이었다.

그러나 줄리엣이 유독 질색했기 때문에 북부의 공작성에서 보라 색 달리아는 금기나 다름없었다.

엘리엇은 바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바로 치우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냥 두세요."

“예?”

“전하의 집무실에 놓으면 잘 어울리겠네요.”

“예…?"

엘리엇은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줄리엣은 싱긋 웃더니 외출용 마차에 올라 타 떠나 버리고 말았다.

엘리엇은 멀어지는 마차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오늘따라 모나드 양이 좀 이상 하군.’

하지만 엘리엇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오늘 이상한 사람은 줄리엣 하나가 아니란 걸 말이다.

똑똑.

“전하, 엘리엇 입니다."

“들어와.”

집무실 안에는 공작 외에도 공작가의 기사 두 명이 더 있었다.

어쩐 일인지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던 두 기사는 엘리엇을 향해 대충 눈인사만 했다.

‘무슨 일이지?'

뿐만 아니라 테이블 위에는 서류들이 어지러웠고 한쪽에는 꼭 보석함처럼 생긴 납작한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엘리엇은 조용히 들고 온 화분을 협탁에 내려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칼라일 공작은 은엘리엇이 들고 온 화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안락의자에 비딱하게 몸을 묻은 공작의 시선은 집무실의 창밖을 향해 있었다.

엘리엇이 힐끗 창가를 곁눈질하자 마침 공작가의 마차 한 대가 저택을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줄리엣이 타고 외출한 바로 그 마차였다.

"엘리엇.”

"예, 전하.”

엘리엇은 공손히 대답하며 재빨리 머릿속으로 오늘 스케줄을 정리해 보았다.

오늘 일정에 관한 질문이 나올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수도에 행차한 덕분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공작은 전혀 예상 밖의 질문을 던졌다.

“지금 줄리엣의 호위가 누구지?”

"어……. 케인입니다.”

“그럼 케인 불러와.”

“예.”

반사적으로 대답은 했지만 엘리 엇은 조금 놀랐다.

갑자기 아가씨의 호위는 왜 찾으시지? 뭔가 호위에 문제가 있었나?

“그리고 지난 석 달간 줄리엣의 행적 정리해서 점심때까지 보고 해.”

"예?”

"어딜 갔었는지, 누굴 만났는지.

주고받은 서신 하나도 빠짐없이.

알겠나?"

“하지만 전하, 그건……….”

엘리엇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번엔 진짜로 이상한 명령이었다.

모나드 양의 행적을 조사하라고? 왜 직접 묻지 않으시고?

그러나 붉은 눈이 싸늘하게 그를 향하자 엘리엇은 잽싸게 고개를 조아렸다.

“두 번 말해야 하나?"

"아, 아닙니다.”

“세 시간 주지. 나가 봐.”

콰당.

순식간에 엘리엇은 집무실 밖으로 쫓겨났다.

엘리엇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매정하게 닫힌 문을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공작은 결코 무의미한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그런데 대뜸 행적을 조사하라니. 모나드 양이 뭔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닐까?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모나드양과 마주쳤을 때 외출하지 마시라고 붙잡는 건데.”

속으로 혀를 차며 엘리엇은 걸음을 재촉했다.

아무래도 즐거운 새해맞이는 물건너간 것 같았다.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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