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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줄리엣-1화 (프롤로그) (1/229)

잊혀진 줄리엣

---뉴톢이꺼★ 공금★ ㅅㅋㅌㄲ★

1 화.

0. 프롤로그.

머리끝까지 시트를 뒤집어 쓴 채, 줄리엣은 숨을 죽이고 반라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침대를 등지고 선 남자가 가운을 벗자 넓은 어깨와 탄탄한 등 근육이 새벽빛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흠잡을 데 없이 균형 잡힌 기사 다운 체격. 날렵한 육식 맹수를 연상시키는 허리와 비스듬히 드러난 수려한 옆얼굴까지.

몸 곳곳에 크고 작은 검상들이 눈에 띄었지만 그조차도 예술품처럼 완벽했다.

줄리엣은 잠시 넋을 잃고 멍하니 남자를 감상했다.

가운을 벗은 남자는 희고 각 잡힌 셔츠를 손수 몸에 걸쳤다.

고귀한 공작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습관이었지만, 생애의 반절을 전장에서 보낸 남자는 몸시중을 싫어해 스스로 옷을 입었다.

그래서 그가 침실에 끌어들이는 부류는 단 두 종류였다. 하룻밤의 연인이거나, 혹은 이용 가치가 있는 여자.

줄리엣은 후자에 속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며 줄리엣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때,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자조하던 줄리엣과 남자의 붉은 눈이 마주쳤다. 소매의 커프스단추를 채우던 공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가 깨웠나?”

그가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에게 밤새 시달린 다음날이면 줄리엣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지쳤다. 그래서 새벽에 눈뜨기는커녕 대낮까지 잠들곤 했다.

“....…아뇨, 전하."

줄리엣은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녀는 시트를 걷고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 들킨 이상 잠든 척은 별로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어젯밤 줄리엣은 아예 잠들지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지만 긴장한 탓에 피곤도 느껴지지 않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조심스레 대답한 줄리엣은 맨발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헝클어졌을 게 분명한 긴 머리를 대충 한쪽으로 늘어뜨렸다.

줄리엣은 제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공들여 꾸며도 태양 같은 그녀의 연인 앞에 서면 줄리 엣은 항상 초라해졌으니까.

화려한 드레스를 입으나 수수한 잠옷 차림이나 그의 눈에는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하지.”

“레녹스.”

줄리엣이 다급히 손을 뻗어 무심하게 돌아서려는 남자를 붙잡았다.

그녀에게 나중은 없었다. 지금 이 아니면 안 됐다.

레녹스 칼라일.

제국의 젊은 권력자, 북부의 지배자인 칼라일 공작은 줄리엣의 연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연인은 몹시 바쁜 사람이었다.

항상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기에 단둘이 있을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잠깐이면 돼요. 시간 뺏지 않을게요."

공작은 자신의 팔에 매달린 여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차갑고 비정한 붉은 눈, 무감정하고 싸늘한 시선에 줄리엣은 움찔했지만 손을 놓지도,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결국 짧은 침묵 끝에 허락이 떨어졌다.

“그러든지.”

줄리엣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공작은 테이블에 비딱하게 걸터앉았다.

그의 손이 협탁 위 은갑을 집어들었다. 길고 모양 좋은 손가락에 궐련 한 개비가 들렸다.

"말해.”

"저….”

줄리엣은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막상 이야기를 꺼내려니 막막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그러니까.....”

“선물?”

“네?”

"어차피 생일 선물 얘기 아닌가?"

“...…아.”

“아"

생일 선물?

뜻밖의 반응에 잠시 당황했던 줄리엣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것을.

칼라일 공작은 금전적으로는 한없이 관대한 연인이었지만 다정한 성격은 결코 아니었다.

부유하지만 바쁜 연인을 둔다는 것은 그의 무심함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녀의 생일만큼은 그가 유일하게 잊지 않는 기념일이었다.

1년에 단 하루.

줄리엣 모나드가 그에게 뭔가를 요구할 수 있는 날.

다음 순간, 줄리엣은 재빨리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제 생일 선물 얘기였어요.”

공작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신경 쓰는 대신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겼다.

그는 슬슬 이 대화가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귀찮음이 묻어나는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그조차도 묘하게 위험 한 분위기를 풍겼다.

“원하는 걸 말해.”

그러나 줄리엣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조금 웃었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7년 전에도 이 남자는 똑같이 말했었다.

"뭐든 원하는 걸 말해. 단, 결혼만 빼고."

한때는 그 거만한 태도에 심술이 나서 일부러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줄리엣의 연인은 정말로 갖지 못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무엇을 부탁하는 남자의 기준에는 귀찮고 성가신 어리광일 뿐이었다. 줄리엣은 영리했고, 그녀가 그것을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

줄리엣이 무엇을 요구하는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줄리엣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올해는 선물 말고 부탁을 하나 들어주셨으면 해요.”

“부탁?”

“네.”

줄리엣은 조금 망설이다 한마디를 덧붙였다.

“……꼭 들어주시겠다고, 먼저 약속해 주실래요?"

사뭇 진지한 줄리엣의 태도에 칼라일 공작의 입가에 처음으로 웃음기가 떠올랐다.

단단히 다물렸던 입매가 지독히도 매력적인 호선을 그렸다.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젊은 칼라일 공작의 거만 함을 지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황제조차 두려워 마지않는 북방의 공작이었다. 레녹스 칼라 일은 원한다면 왕좌라도 가질 수 있었다. 하물며 한낱 연인의 생일 소원쯤이야.

"좋아. 맹세하지.”

레녹스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은 어리광에 장단을 맞춰 준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줄리 엣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감사해요, 전하. 그러면…….”

줄리엣은 조용히 미소하며 일부러 조금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조금이라도 오래 연인의 얼굴을 을담아 두기 위해서.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요구는 레녹스 칼라 일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헤어져 주세요.”

“....…뭐?"

“전하.”

천사 같은 얼굴로 줄리엣이 환하게 웃었다.

“이제 그만해요, 우리."

잊혀진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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