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레일라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당신은 나를 사랑했던 적 없어.”
레일라의 목소리에서 증오가 들끓었다.
‘짐은…….’
레일라는 죽기 직전까지 황제를 거부했다. 그래서 그녀의 증오는, 황제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새삼 저 감정을 마주하게 돼서일까.
아니면 시간이 지난 뒤 만난 지금은 조금 달라질 것이라 생각해서일까.
레일라는 황제를 노려보며 그의 목을 졸랐다.
“당신이 나를 사랑했다면 그딴 식으로 행동할 리 없으니까.”
“커, 커억-”
“그런데 감히 나를 살려내려 해?”
이곳이 현실이 아니어서일까.
레일라의 힘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강했다.
“지, 짐은-”
황제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무슨 말이든 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고통은 황제에게 몹시 낯선 것이었다.
“그, 그만둬. 레일라.”
“왜 그리 약한 소리를 하지?”
레일라가 눈을 번뜩였다.
“나를 짓밟을 땐 그리 아무렇지 않더니. 당신이 짓밟히니 견디기 힘든가?”
단순히 목만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당신은 그랬지. 항상 가장 위에 서 있어서, 다른 이들의 고통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어.”
황제는 온몸이 쥐어 짜이는 것 같은 고통에 휩싸였다.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뭔가 잘못됐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레일라.
새처럼 가냘프고 연약한 레일라.
그의 레일라는 이렇게 무도하고 잔인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니 나를 그렇게 죽이고도, 나를 되살린다는 개소리를 지껄인 거고.”
“너를 죽인 건 짐이 아니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황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는 칼릭스, 그 아이를 낳다가 죽은 것 아니냐.”
“…….”
“짐은 너를 죽게 했던 그 아이를 죽이지도 않았고, 황태자 자리를 주어 황제가 될 수 있게도 해주었다.”
목을 조르던 레일라의 손이 멈추었다.
“너를 잃고 난 뒤 짐의 세상은 지옥뿐이었다. 매 순간이 후회와 슬픔뿐이었어.”
황제는 미약한 희망을 품고 레일라에게 호소했다.
“짐을 용서해라.”
레일라가 말없이 황제의 목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짐을 용서해 주는 것이냐?”
황제는 손자국이 남은 제 목덜미를 쓸며 물었다.
“레일라. 이제 짐을-”
“내가 왜 당신 같은 것을 보고 화를 냈을까.”
레일라는 픽 웃었다.
“칼릭스가 나를 죽였다고?”
“그래. 그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네 숨이 끊어지는 일도 없었을 거고…….”
“정말 몰랐던 거구나.”
황제는 레일라의 목소리에 가슴이 선득해졌다.
온몸이 비틀리는 고통을 느꼈을 때보다 더 고통스러운 기분이었다.
“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나는 칼릭스를 낳다 죽은 게 아니에요.”
“헛소리. 의원이 분명 그렇게-”
“정말 그렇게 말했나요?”
레일라는 고요하게 황제를 바라봤다.
“물론 당시의 나는 무척 몸이 약했어요. 아이를 낳다가 죽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황제는 불안한 마음에 귀를 막았다.
“그만, 그만!”
“하지만 나는 기적적으로 그 아이를 낳을 수 있었죠. 사실 난 칼릭스가 끔찍했어요. 당신이랑 똑같이 생긴 당신 아이였으니까.”
“그만둬! 이제 충분히 들었으니!”
“귀를 막으면 들리지 않나요? 어차피 당신 눈으로 다 본 일이잖아.”
하지만 레일라의 달콤한 목소리는 귓가에 찌를 듯이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니! 짐은 보지 못했다.”
황제가 목을 긁어대며 윽박질렀다.
그때 검은 공간 속에서 익숙한 방이 나타났다.
레일라가 갇혀 있던 구석진 황궁.
호사스러운 침실에서 레일라가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그때 내가 다 죽어간다는 소식에 당신이 달려왔죠.”
레일라는 잔잔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나를 보고 안도했죠. 물론 난 그런 게 조금도 고맙지 않았지만.”
황제는 레일라의 품 안에 있는 아기를 바라봤다. 레일라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아기를 보고 있었다.
‘레일라, 그 아기가 끔찍해?’
‘그래요, 끔찍해요. 그러면 안 끔찍할 줄 알았나요?’
‘그러면 없애줄까?’
레일라는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황제를 올려다봤다.
‘너를 고통스럽게 한 원인을 없애주겠다. 어차피 짐을 닮은 아이는 필요 없기도 하고.’
황제가 레일라의 품에서 아기를 빼앗았다. 레일라는 고통에 잠겨 쌕쌕거리는 숨을 토해냈다.
‘……지금 그 아이를 죽이시겠다고요? 폐하의 아이인데?’
‘그것이 중요한가?’
황제는 한 손으로 아기를 든 채, 한 손에는 칼을 들었다.
‘어차피 아기는 또 낳으면 그만이다. 네가 끔찍하지 않을 아기가 나올 때까지.’
아기는 죽기 직전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황제가 두 눈을 감고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만! 어차피 다 끝난 일 아닌가!”
“그래도 다 보셔야죠. 최소한 누가 저를 죽였는지는 제대로 아셔야 할 것 아니에요?”
이오카르가 부정하려 애썼지만, 방 안의 상황은 계속 이어졌다.
황제가 바닥에 내려놓은 아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안 돼!’
그러나 아기 대신 레일라가 검에 맞았다. 황제의 두 눈이 커졌다.
‘-레일라!’
황제가 검상을 입은 레일라를 끌어안으며 의원을 불렀다. 하지만 레일라는 아기를 꼭 끌어안은 채 목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이럴 수는 없다. 어떻게 짐의 손으로 레일라를…….’
그때 황제의 눈에 보인 건 멀쩡히 잠자고 있는 아기였다. 황제는 분란의 원인이던 아기를 죽이려 했다.
‘너만 아니었다면!’
그 순간 검은 저주가 올라와 황제의 검을 가로막았다. 저주는 아기가 죽을 수 없도록 막았다.
절망하던 황제가 쓰러졌다.
그렇게 깨어난 황제는 의원에게 물었다.
‘레일라는, 레일라는 어떻게 되었지?’
‘폐하. 그분께서는 검에 다친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여-’
‘똑바로 얘기하라. 레일라가 어떻게 죽었다고?’
황제의 살기 어린 눈빛에 의원은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레일라 님께서는 황자를 낳다 돌아가셨습니다.’
‘……도대체 어째서지?’
‘아무래도 황자 전하의 몸에 이상한 저주가 레일라 님의 몸에 이상을 일으킨 듯합니다.’
그리고 며칠 뒤, 귀족들의 앞에서 칼릭스의 저주가 선명히 드러났다.
이오카르 황제는 칼릭스가 폐태자가 되는 광경을 보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저건 저 의원의 죄다. 짐은 그저 의원의 말을 믿었던 것밖에 없어.”
“그래 봐야 내가 당신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짐은, 짐은 그저!”
황제가 악다구니를 쓰듯 소리쳤다. 하지만 레일라는 그런 황제를 보며 비웃었다.
“그렇게 믿고 싶으면 믿든가. 여태 그래왔듯이.”
눈앞에 있던 레일라의 모습이 안개처럼 뿌옇게 사라졌다.
“레일라, 아니다. 짐이 널 죽인 게 아니다.”
황제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호소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레일라가 아이를 낳은 것만 아니었다면 검상 한 번에 죽는 일도 없었을 거다.’
숨이 죄이는 고통이 들었다.
‘방금 본 것은 거짓이다. 어찌 레일라에게 검을 휘둘렀겠는가. 중간에 검을 멈추었겠지.’
황제는 제 두 손을 바라봤다. 손이 썩은 것처럼 흘러내렸다.
“왜, 왜 내 손이-”
“폐하, 지금 그 모습, 폐하와 참 잘 어울리십니다.”
그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누구보다 황제와 오랜 시간을 보냈던 사람.
세라피나 황후였다.
황후는 초라했던 마지막과 달리 무척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나 폐하의 지옥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 하지?”
황제의 반발에 황후는 오싹할 정도로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도 마왕과 거래한 자의 최후에 대해 잘 알고 계시지요?”
제국은 마왕과의 전쟁에서 가장 앞에 섰던 용사가 세운 나라였다. 당연히 마왕에 대한 기록은 그 어느 곳보다 많았다.
“마왕과 거래한 자에겐 지옥뿐입니다.”
황후의 보라색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졌다.
“그러니 벌써 고통스러워하시면 곤란해요.”
* * *
교황이 등장한 순간부터 대신관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역시 약점이 될 줄 알았어.’
교황을 계속 살려두는 건 리미에에게도 까다로운 일이었다.
리미에의 마기에 사로잡힌 교황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헤, 헬리오스……!
대신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행동 똑바로 해요.”
금세 여유를 되찾은 리미에가 대신관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그러다 제가 실수로 겨우 살아 있는 교황님을 마왕님께 바쳐버릴지도 모르잖아요.”
마왕의 제물이 되는 것은, 주신의 신관에게 가장 끔찍한 형벌이다.
대신관이 망설이자 대공이 나섰다.
“대신관, 설마 저 말에 흔들리는 건 아니겠지?”
“…….”
“정 못하겠다면 빠져라. 하지만 방해하지는 마. 그럴 여유는 없으니까.”
대공의 말에 리미에가 살포시 웃었다.
“왜 교황님만 약점으로 잡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또 어떤 약점을 쥐고 있지?”
“당신 부인은 내 손에 죽었어요.”
“……네가?”
“거기까지는 몰랐나 보죠?”
대공이 억지로 살기를 억누르며 물었다.
“네가, 마리엘을 죽였다고?”
“당신 부인도 교황처럼 내 손에 있다고는 생각 안 했어요?”
리미에는 뻣뻣하게 굳은 대공을 보며 초조하게 침을 삼켰다.
‘시간을 조금만 더 끌면 돼.’
마왕을 봉인하는 봉인구는 이미 금이 가기 시작했다.
‘대신관의 힘이면 다시 봉인시킬 수 있는 작은 금이지.’
하지만 황제를 제물로 바쳐 만든 금이다. 시간을 끌수록 조금씩 봉인은 무너지고 있다.
‘봉인이 깨질수록 마왕님의 힘이 나오기 시작할 거다.’
그렇게 되면 리미에는 혼자서 저들을 막아낼 수 있으리라.
“웃기지도 않는 수작이군.”
대공이 손에 든 검에 힘을 주며 말했다.
“네게 내 아내의 영혼이 있다면, 어째서 교황처럼 꺼내지 않는 거지?”
“그렇게 확신하면 어디 한번 저를 없애 보시든가요.”
리미에는 무표정한 대공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랬다가 당신 부인의 영혼마저 버려지면 어찌하려고요? 그걸 감당할 수는 있-”
그때 얌전히 쓰러져 있던 황제가 발작하듯 일어나 봉인구를 향해 달려들었다.
리미에가 표정 관리도 하지 못하고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당신 소원이고 뭐고!”
“다 듣고 싶지 않다!”
황제가 악귀 같은 얼굴로 봉인구를 향해 머리를 찧었다. 피투성이였던 황제의 몸이 풀썩 쓰러졌다.
봉인을 깨던 제물이 사라지게 되었다.
리미에는 연결이 끊김과 동시에 급속도로 자신의 힘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황궁 근처를 막고 있던 검은 결계도 물감이 물에 녹듯이 스르륵 사라졌다.
“혼자 죽지 않겠어.”
리미에의 레몬색 눈동자가 사악하게 젖었다.
“내가 사랑받지 않는 세상 같은 거 모두-”
리미에가 자신 안에 있는 마지막 힘을 모두 끌어올리며 폭발시키려 했다.
“아니, 그렇게는 안 돼.”
잔인하게 들끓던 리미에의 마기를 향해 고아한 신성력이 쏘아졌다.
바닥에 있던 피와 어둠이 깨끗하게 사라지고, 고결한 신성력이 알현실을 가득 채웠다.
‘교황이!’
신성력에 정화된 마기가 힘을 잃었다. 억지로 붙잡고 있던 교황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제 다 끝났어.”
알현실로 나나가 들어왔다.
나나의 뒤로 성기사와 슬라데이체 기사들이 보였다.
“리미에, 넌 이제 끝났어.”
오로라색 신성력이 마왕의 봉인구를 정화하듯 말갛게 빛났다.
‘신성력이 더 강해졌어.’
마왕의 힘이 섞인 리미에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을 정도다. 리미에가 멍하니 나나를 바라봤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분명 제 계획은 완벽했다.
모두가 리미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고, 나나를 가짜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대체 어떠한가?
마지막 반항마저 모두 가로막혀 버렸다.
“원래 거긴 내 자리였어.”
이제 성기사들은 리미에를 마녀라 확신했다. 쏟아지는 적의 가득한 시선, 금방이라도 날아들 듯한 살기들.
“다 내 거였다고.”
리미에의 온몸이 빠르게 노화하기 시작했다. 리미에는 절규하듯 제 두 뺨을 감쌌다.
“다들 속고 있어. 넌 염치 없는 도둑에 불과한데.”
“그딴 소리 할 줄 알았다.”
나나의 뒤에서 나온 쥬테페가 혀를 끌끌 찼다.
“혹시나 오해할 제국민이 있을까 봐 올 때부터 계속 준비하고 있었지.”
그제야 리미에의 시선이 성기사가 아닌 슬라데이체 기사들을 향했다. 모두가 수상할 정도로 똑같은 수정구를 들고 있었다.
“제국 모두가 네 초라한 마지막을 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