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관은 고민하는 성기사들에게 소리쳤다.
“제 얘기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대신관의 노한 목소리에서 정결한 신성력의 힘이 느껴졌다.
성기사들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머뭇거렸다.
“하, 하오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제 말을 무시하고 슬라데이체와 싸우려 하는 것입니까?”
대신관이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의 적은 마왕입니다. 어찌 진정한 적을 두고 서로 손을 잡아야 할 동료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것입니까?”
“…….”
“성기사단이 만들어진 이유를 떠올리십시오. 우리가 무엇 때문에 검을 들게 되었는지.”
교황이 갑작스럽게 쓰러진 이후, 신전은 많은 혼란에 휩싸였다.
그때 파가 갈려 붕괴 직전까지 갈 뻔했던 신전을 화합시키고 이끈 사람이 바로 대신관 헬리오스였다.
특히 교황이 공공연하게 그를 다음 대 교황으로 말하고 다녔기에, 역대 다른 대신관보다 특별했다.
“아닙니다, 대신관님!”
그때 마기에 피해를 입고 쓰러져 있던 성기사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지금 대신관님께서 그 자리에 계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겁니다. 대신관님께서는 지금 가짜에게 속고 계신 겁니다.”
“제가 말입니까?”
“예. 우리가 성녀라고 믿고 따랐던 성녀 나나가 마왕이 보낸 마녀였습니다.”
대신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나 성녀에 대해서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마왕이 보낸 마녀가 아닙니다.”
“하지만 마왕이 계시를 통해 직접 이야기했습니다. 저희가 가장 사랑했던 마녀가 저희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지금 마왕이 하는 말을 그대로 다 믿었단 말입니까? 성기사가 되어서 마왕이 어떤 존재인지도 잘 모르는 겁니까?”
항상 자애로웠던 대신관의 날카로운 반응에 성기사가 당황하여 말을 멈췄다.
근처의 성기사들이 끼어들었다.
“저희도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나 성녀가 데려왔던 칼릭스 황자가 마족이었습니다!”
“맞습니다. 거기다 진짜 성녀가 나타나자마자 제대로 말도 하지 않고 도망쳤습니다. 그게 바로 가짜란 증거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교황님! 깨어난 교황님께서 가짜와 슬라데이체의 실체에 대해 고발해 주셨습니다.”
“교황…… 교황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단 말입니까?”
대신관이 주먹을 꽉 쥐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성기사들이 빠르게 대답했다.
“예. 교황님께서 모든 진실을 얘기해 주셨습니다. 당장은 저희의 말을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믿어주셔야 합니다.”
“그러면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대신관이 입술을 깨물며 괴로운 표정으로 성기사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에게 나타났다던 그 진짜 성녀는 누구였습니까?”
“그분은…….”
성기사들은 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스럽게 성녀의 존함을 말했다.
“성녀 리미에 님이셨습니다.”
“마왕의 수작을 주신님께 예언받고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 저희 앞에 나타나 주셨습니다.”
성기사들은 이제 대신관이 자신들을 도와 슬라데이체를 징죄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성기사들을 바라보는 대신관의 표정은 마주치기 어려울 정도로 차갑고 냉혹했다.
“이제 변명은 다 끝났습니까?”
“변명이라니요. 대신관님!”
대신관의 말에 성기사들이 경악했다.
“대신관님이 이런 식이면 저희는…… 대신관님까지도 신전의 배신자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슬라데이체 대공가와 손을 잡고 움직였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는데, 설마 대신관님까지 제국의 배신자였습니까?”
처음에는 성기사들도 슬라데이체와 함께 도착한 대신관을 의심하지 못했다.
대신관은 그만큼 성역과도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대신관에게도 의문스러운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신관님께서 진정한 신관이셨다면 어째서 가짜 성녀에게 속은 거지? 대신관님께서도 한통속이셔서 그랬던 거 아닌가?”
“그러고 보면 대신관님께서 유독 가짜 성녀를 아끼곤 했습니다. 오늘도 가짜 성녀의 가문인 슬라데이체의 편을 들고 계시지 않습니까.”
“설마 교황님께서 쓰러지신 것도…….”
대신관의 금안이 맹렬하게 빛났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금욕적이고 단정한 얼굴 위로 슬픈 기색이 서렸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제 말을 들으실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당장 저를 데려가서 변절자로 처형하시지요.”
성기사들이 예상한 대신관의 반응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대신관이 눈썹을 까딱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뭣들 하십니까. 교황님의 사고부터 모든 것이 다 제 책임이라 생각하신다면 나나 성녀가 아니라 당장 저부터 없애야 하지 않습니까?”
“저, 저희가 언제 그렇게까지 말했습니까.”
“맞습니다. 그저 대신관님께서 저희의 말을 의심하기만 하고 슬라데이체의 편을 드시기에…….”
성기사들은 대신관 옆에 있는 슬라데이체 일가를 살폈다.
슬라데이체 대공가를 비롯해서 슬라데이체 기사들은 조용히 서서 성기사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무슨 행동을 할지 보고 판단하겠다는 것처럼.
성기사들의 머릿속에 거대한 혼란이 찾아왔다.
‘헬리오스 대신관님이 마족의 편일 리 없다. 대신관님께서 잘못 알고 계신 것이든, 교황님께서 뭔가를 착각하신 게 아닐까?’
그제야 대신관은 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나 성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망간 것이 그 증거라 했습니까? 나나 성녀가 말을 했다면 믿기는 했을 겁니까? 그토록 오래 봐온 저 역시도 의심하는 판국에.”
“하지만 저희의 두 눈으로 본 것이 있기에…….”
“어떤 것을 보았습니까? 당신들이 본 것이 진실이라고 어찌 확신합니까?”
대신관의 몸에서 흘러나온 신성력이 좌중을 압도했다.
“정 당신들의 말이 그렇다면, 좋습니다.”
“예?”
“그 성녀 리미에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전투 중에 성녀 리미에 님이 다치실까 봐 잠시 다른 곳으로 대피를 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어디로?”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리미에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대답하지 못했다.
‘리미에 성녀님께서는 주신님의 뜻을 행하러 움직인다 하셨는데…….’
‘그래서 리미에 성녀님께서는 이 급한 상황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 거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대신관이 삐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그러면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당신들은 대신관인 제가 교황님을 두고 슬라데이체와 함께 어디를 갔다 온 것인지 알고는 있습니까?”
“그건…….”
근처에 있던 성기사들은 황태자 계승식에서 나나가 폭로했던 상황을 모두 목격했다.
황실의 무덤에서 황제는 금지된 부활 의식을 벌였고, 대신관과 슬라데이체 기사들이 그 의식을 막다가 갑자기 위험에 휩싸이던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영상에서는 대신관님께서 갑작스럽게 해를 입으시던 모습이 나왔는데…….”
지금 그들의 앞에 있는 대신관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멀쩡했다.
“맞습니다.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지요. 슬라데이체의 기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주지 않으셨다면 결코 빠져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대신관은 그 아찔한 순간을 떠올리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솔직히 대신관에게도 그때는 정말 예상하지 못한 위험의 연속이었다.
“……슬라데이체의 기사들이 대신관님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단 말입니까?”
“그러면 제가 왜 슬라데이체의 기사들과 함께 왔겠습니까?”
물론 그들이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건 그들의 노력만이 아니었다.
‘역시 공녀를 믿기를 잘했어. 이렇게 완벽하게 해주다니.’
‘……세라피나 황후? 설마 당신이 만든 함정이었던 건가?’
‘그랬다면 이렇게 그대들을 만나러 나오지도 않았겠지. 여기가 어디라고 어리석게 직접 들어와 있겠나.’
세라피나 황후는 자기가 들어왔던 길을 대신관에게 알려주었다.
‘부활 의식 에 문제가 생겼으니 대신관 자네라면 틀림없이 빠져나갈 틈을 만들 수 있을 터.’
‘대신관님, 정말입니까?’
‘예. 황후가 온 길의 결계가 무너져 있습니다. 저희 모두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왜 당신이…….’
‘당연히 그냥 그대들을 구해주는 것은 아니다. 조건이 있다.’
하지만 세라피나 황후가 내건 조건은 대신관이 예상하던 것과 달랐다.
‘저기 있는 제물들도 모두 데리고 빠져나가. 그들 역시 무고한 희생자이니 그대들이 구하는 데에 문제가 없을 터.’
‘당신은 무엇을 할 셈이지?’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이제 내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지.’
‘당신…… 살고 싶은 마음이 없군.’
‘그건 그대가 물어볼 일이 아닐 텐데. 그대는 그대의 일에 집중이나 해. 나는 내 일을 할 것이니.’
그렇게 대신관은 황후의 도움을 받아 황가의 무덤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고한 제국민들을 구하며 의외의 무기를 얻기도 했다.
이제 성기사들 사이에선 전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대신관님 말대로 리미에 성녀님을 찾아와 진실을 가려본 뒤 싸워도 늦지 않아.’
‘어차피 슬라데이체 기사들까지 도착한 이상 이 싸움에는 의미가 없다.’
대신관이 성기사들을 대신해 슬라데이체에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대공님, 신전에서 슬라데이체 대공가에 아주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 한 번이면 되라 것이라 생각하나?”
“이 모든 죄는 이 사태를 해결한 뒤 지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좀 멍청이들이 조용해졌나?”
그때 복도 끝에서 성기사들을 모조리 기절시키고 온 쥬테페가 대신관에게 다가왔다.
“저희 성기사들이 폐가 많았습니다.”
“걱정 마. 저깟 머저리들 처리하는 게 힘든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 것치고 쥬테페의 몸에는 상처가 언뜻 비쳤다. 성기사들을 죽이지 않고 상대하느라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그러면 모두 리미에부터 찾기로 결심한 건가?”
마지 못해 서 있던 성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쥬테페는 성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리미에가 어디 있는지 미리 봐뒀어. 리미에는 알현실로 갔어.”
목적지가 정해졌다.
대신관과 대공을 필두로 그들은 알현실로 움직였다.
“그런데 리미에가 사실 가짜고, 너희를 속인 마녀라면 어떻게 할 거야?”
쥬테페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짜 성녀에게 속아 진짜 성녀의 말을 듣지도 않고 죽이려던 너희의 죄는…… 목숨으로 갚아도 모자랄 텐데?”
“…….”
“꼭 죽으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죽어도 갚을 수 없는 죄란 게 그런 거 아닐까. 그러니 미리 어떻게 속죄할지 좀 생각해 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성기사들의 등골에 싸늘하게 식었다.
‘진짜 저 말이 맞으면 어떻게 하지?’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