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쏘아진 빛이 마리엘을 휘감고 있던 넝쿨을 한순간에 허물었다.
갑작스러운 빛에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감았다가 리미에가 다시 눈을 떴다.
눈앞을 살핀 리미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감히 내게 이딴 수작질을 부려?”
리미에의 시야를 가리자마자 마리엘이 검은 넝쿨을 허물어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마력이 사라진 척 연기했던 건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 방금 전 리미에에게 쏟아지던 그 빛은 너무 강했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주먹을 쥐었다가 핀 리미에가 숲 한가운데를 보았다.
“꼭 이렇게 무의미한 살생을 하게 만들다니. 어리석은 것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
리미에의 금안이 섬뜩하게 빛났다.
“어차피 도망쳐 봐야 이 숲에선 벗어날 수 없어.”
리미에는 도망친 마리엘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그렇게까지 피를 보고 싶다면 어디 한번 발악해 보세요. 시간을 끌어봐야 당신의 상황만 더 힘들어질 뿐이니까.”
리미에가 타락한 힘을 시공간의 숲을 향해 휘둘렀다. 거대한 힘이 포악하게 숲을 덮쳤다.
“꽤 깊은 곳에 숨은 모양이네요.”
인근을 제힘으로 쓸어버린 리미에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때였다.
“크윽!”
파아앗-
땅바닥 위에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마법진을 그려냈다.
그리고 그 마법진은 리미에의 온몸을 덮쳤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몰아닥친 공격이었다.
“숲이 아니라 땅속에 있었나?!”
마리엘은 숲속으로 도망치지 않고 땅속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것이다.
“이미 늦었어.”
리미에는 급히 제 마기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이미 새하얀 빛이 리미에를 급습했다.
“나도 네가 보는 앞에서 도망치기 어렵다는 건 알고 있었거든.”
마리엘은 얼굴 근처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헐떡이는 호흡을 골랐다.
“고작 마법으로는 내 힘을 막을 수 없어. 도대체 어떻게 나를 이렇게 만든 거지?”
리미에는 마리엘을 노려보며 힘을 쥐어짜려 했다.
하지만 힘을 일으키려 하면 할수록 영롱한 빛에 휩싸여 사그라들 뿐이었다.
리미에가 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마리엘을 노려봤다.
“지금, 이거. 네 힘이 아니구나?”
리미에는 살점을 긁어내는 듯한 목소리로 악에 받쳐 물었다.
“어떻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존재가 힘을 사용할 수 있지?”
“그게 지금 중요해?”
“입 닥치고 당장 대답해! 어떻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 애가 힘을 사용하는지!”
표독스러운 외침에도 마리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너나 조용히 해.”
마리엘은 근처에 있는 나무를 짚고 겨우 일어났다.
“마왕의 힘을 빌려 내 딸을 죽이려 한 주제에 말이 많아.”
벌레처럼 바닥을 기고 있던 리미에가 마리엘을 보고 이를 아득 깨물었다.
“대단해. 이렇게 내 계획이 실패할 줄이야. 솔직히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아주 재밌어.”
리미에는 고통에 떨고 있는 와중에도 마리엘을 향한 살의를 숨기지 않았다.
“어디 한번 그 몸으로 열심히 도망쳐봐. 네가 언제까지 네 아이를 지킬 수 있을지 기대되네.”
“도망?”
“그럼 나와 맞서기라도 하게?”
리미에의 입가에서 흐르는 피가 조금씩 멎었다.
“너도 알고 있잖아. 지금 네가 사용하고 있는 네 아이의 힘도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
“그 정도 힘으로 날 죽이는 건 불가능해.”
하지만 마리엘은 리미에의 예상과 달리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동정하는 눈으로 리미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넌 정말 불쌍한 애구나.”
“뭐?”
“네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겠어. 누구에게 제대로 사랑받은 적도 없거나, 사랑받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르고 살아왔겠지.”
마리엘이 바닥에 쓰러진 리미에를 향해 걸어갔다. 리미에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떤 수작을 부리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헛수고야.”
“난 내 아이의 목숨을 두고 거래하는 짓 따위 안 해. 그만큼 소중하니까.”
마리엘의 녹금안이 서늘하게 빛났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내 목숨도 바칠 수 있어.”
이미 다 소진해 버린 마리엘의 녹금색 마력이 강렬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생채기가 났던 피부가 회복되며 광채가 났다. 특히 녹금안은 신이 내린 번개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어디서 나온…….”
마리엘이 리미에의 앞에 섰다.
그녀는 리미에를 심판하러 온 천사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내 모든 수명을 바쳐도 이 정도가 한계인가.”
하지만 마리엘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마리엘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지. 남은 건 내 딸과 가족들이 잘해줄 거라 믿는 수밖에.”
마리엘은 리미에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아직 빛에 묶여 있던 리미에가 원한에 차 소리쳤다.
“무슨 수를 써도 네가 오늘 내 거래를 거절한 걸 후회하게 하겠어.”
“알아서 해.”
“네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네 딸, 그 딸이 최악의 인생을 살다가 죽도록 하겠다.”
마리엘은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웃으며 마법을 발동시켰다.
“네가 내 딸에게 당할 거라곤 생각 안 해?”
녹금색 마력이 리미에를 휘감자, 몸부림치던 리미에의 몸이 물에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풀썩, 리미에가 사라지는 걸 본 마리엘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 엄마는 여기까지인가 봐.”
마리엘은 두 손으로 제 배를 소중히 감싸 안았다.
“그래도 걱정 마. 엄마가 목숨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널 지킬 테니까.”
그렇게 시공간의 숲 전체에 어둠이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