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기 성녀가 악당을 구원한다는데요 153화 (153/172)

교황은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불미스러운 사고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제국민 모두가 교황의 안녕을 빌기도 했다.

“교황님께선 원래 잠들어 계시지 않으셨나?”

“설마 정신을 차리신 건가?”

“그러고 보니 저 영상, 마도구의 색을 보니 지금 실시간으로 나오고 있는 영상이오!”

영상 마도구는 영상 중에 나오는 색으로 녹음된 영상인지, 실시간 영상인지 알 수 있다.

-제국민 모두 제가 불미스러운 사고로 정신을 잃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교황은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기대한 것처럼 기다렸다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부끄럽게도 이제야 저는 그 습격의 진실에 대해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황은 수심에 젖은 눈으로 고개를 내렸다.

-그 일의 배후는 슬라데이체 대공가였습니다. 슬라데이체 대공가는 마왕이 세계의 멸망을 위해 심어둔 마족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멀찍이 서 있는 슬라데이체 대공가를 바라봤다.

“스, 슬라데이체가 마왕이 심어둔 함정이었다고?”

“그러고 보니 슬라데이체 대공의 혈족들만이 마족의 힘인 마기를 쓸 수 있다지 않았나. 아무리 마족과 다르다고 해도 그건 인간의 힘이 아니었으니…….”

일대에 파란이 일었다.

‘정말 인간이 아닐지도.’

‘어쩐지 가까이만 다가가도 느낌이 다르다 했어. 인간으로서는 나올 수 없는 분위기였잖아.’

슬라데이체의 상징인 은발의 붉은 눈동자.

다른 인간은 가질 수 없는 마기.

태생부터 다른 것처럼 뛰어난 무력과 재능, 아름다움까지.

슬라데이체를 찬양하던 업적들은 순식간에 인간을 위협하는 함정으로 둔갑했다.

“그러면 설마, 슬라데이체에서 그간 마물로부터 인간을 수호한다고 지켰던 것부터가 함정이었던 건가?”

“그래서 마물이 끊이지 않고 나왔던 거지!”

“그래도 슬라데이체 대공령 기사들이 마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걸 직접 본 적도 있는데 저 말만 듣고 넘어가는 건…….”

“지금 말하고 있는 분이 보통 사람인가? 교황님이시네! 그것도 의식불명의 상태셨던 교황님이시라고. 자네도 신전에서 교황님을 해친 흉수를 찾던 걸 보지 않았나.”

슬라데이체를 옹호하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교황이라는 지위에서 나온 권위에 모두 굴복했다.

특히 이번 대 교황은 신뢰의 상징이라고 불릴 만큼 대단한 사람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슬라데이체 대공가는 성녀 자리까지 찬탈하며 인간의 세력을 차지해 가고 있었습니다.

영상구 너머로 보이는 교황의 안색은 모진 수모를 겪은 것처럼 생기가 없어 보였다.

그 병약한 모습마저 사람들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아마 리미에 성녀가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진실을 밝히지도 못했을 겁니다.

성녀, 리미에.

교황이 한 마지막 말이 결정적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교황이 내뱉은 말이다.

그 누가 진실성을 따질 수 있겠는가?

슬라데이체를 향하던 시선 모두가 나나를 향했다.

마물을 처치하는 기적을 통해 직접 성녀로 불렸던 나나 마시멜로 슬라데이체.

마시멜로 상단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사람들을 구호하며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던 슬라데이체의 공녀.

나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점점 적의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마왕이 이상한 소리를 하기도 했지.’

‘나는 너희가 가장 사랑하던 자의 손으로 너희를 파멸시킬 것이다.’

‘너희는 가장 끔찍한 배신으로 지옥을 겪게 되리라.’

슬라데이체 공녀가 했던 선행.

그 모든 것이 마왕을 위한 수작이었다면?

‘당장 교황님이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도 절대 믿지 않았겠지.’

‘오히려 성녀님을 음해하는 수작이라 생각했을 텐데.’

하필 나나의 옆에는 그녀와 연인이라던 칼릭스 황자가 마족의 모습으로 있었다.

‘이 모든 게 우연일 수 있나?’

슬라데이체 대공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다들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모양이군.”

대공은 불쾌한 얼굴로 주위를 압박했다. 위압적인 지배자의 기세에 제국민들은 움츠러들었다.

“그러면 내 딸이 마왕이 보낸 마녀라는 말인가?”

군중 속 한 사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 그것은 슬라데이체 대공 각하도 잘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슬라데이체 대공가에서 정말 교황님을 습격한 게 맞습니까?”

대공의 손에는 아직 검이 들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격분한 대공이 검을 들어 끝을 볼까 두려워했다.

그때 모두를 대표해서, 성녀 리미에가 나섰다.

“그러면 아니라는 건가요?”

리미에의 용기 있는 행동에 모두가 감탄했다.

“교황님께선 이 사건의 피해자세요. 지금 교황님의 증언을 모두 부정할 셈인가요?”

슬라데이체 대공은 제국에서 무력으로는 견줄 수 없는 자였다.

그나마 상대가 되었던 바이칼로스 공작마저 슬라데이체 대공과 붙어 그대로 무너지지 않았던가.

‘역시 성녀님은 다르단 건가?’

‘교황님의 말대로 슬라데이체가 마왕의 세력이라면 우리는…….’

대공은 일말의 여지도 없다는 듯 딱 잘라서 말했다.

“교황이 하도 오래 잠들어 있다 보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지.”

“지금 교황님을 무시하시는 건가요?”

“그동안 슬라데이체를 둘러싼 낭설이 이번뿐인 것 같나?”

대공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건조했다. 비인간적인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슬라데이체는 제국을 마수로부터 수호하는 와중에도 온갖 모함에 시달렸었다. 교황의 증거 없는 주장 따위는 이제 놀랍지도 않을 정도다.”

리미에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요. 직접 마왕이 고발한 상황인걸요.”

“그래서, 지금 마왕이 임명한 존재가 누구라던가? 마왕이 직접 이름이라도 말했던 모양이지?”

“말장난하지 말아요!”

리미에의 손이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설사 아니라 한들 이 중에 마왕의 마녀가 있는 건 분명해요. 만약 슬라데이체가 배신자가 아니라면, 직접 증명해 보세요.”

“……하, 증명?”

대공의 눈동자가 선득한 살기로 물들었다.

“지금 네 주제에 내게 증명을 요구한 건가? 그간 제국을 위해 온갖 헌신을 다 한 슬라데이체에게?”

“이것 보세요!”

대공이 무섭게 나올수록 그 앞에 있는 리미에는 마왕 앞에 서 있는 용사처럼 신성해 보였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곤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듯한 저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한 발언들.”

리미에가 눈물 섞인 목소리로 호소했다.

“마왕에 대항해 싸울 수 있는 같은 인류라고는 결코 믿을 수 없는 행동이에요.”

리미에의 눈가가 붉어지며 눈물 한 방울이 아련하게 뚝 떨어졌다.

“정말 제국 모두의 불안을 막기 위해서라도 협조해 주실 수는 없으셨나요?”

그녀의 호소에 슬라데이체의 기세에 눌려 있던 제국민들이 술렁거렸다.

“저, 정말 그런가?”

“정말 떳떳하다면 직접 나서서 해명하면 되는 거지. 꼭 저렇게 나올 필요는 없는데.”

“생각해 보면 슬라데이체는 늘 그랬어. 특별한 마기를 지닌 채 고상하게 틀어박혀 제국을 위해서 나서는 일은 적고, 돈만 벌어들였어. 그동안 신전 하나 들어가지 못했던 무도한 가문 아니었나?”

“성녀님께서 입양된 가문이라 이번에는 다를 줄 알았는데…….”

리미에는 기울어지는 대중들의 반응을 느끼며 긴 속눈썹을 깜빡였다.

“슬라데이체에 오해가 있다면, 성녀라는 제 이름을 걸고 모든 것을 약속하겠어요. 한 점의 불의 없이 공정하게 모든 것을 밝혀내겠다고.”

“그래서?”

대공이 빈정거리는 듯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리미에는 그런 대공의 반응을 보며 속으로 미소 지었다.

‘멍청한 슬라데이체.’

사람들은 슬라데이체를 배척한다.

그것은 비단 마족의 힘을 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기들이 가지지 못한 대단한 것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열등감은 쉽게 적의로 바꿀 수 있다.

‘아무리 당신들의 힘이 대단해도 이래서는 안 됐어.’

슬라데이체의 힘이 대단한 건 리미에도 인정한다.

하지만 혼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제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도 그들이 무사할 수 있을까?

“제가 슬라데이체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건 단 하나예요.”

리미에의 가련한 손가락이 가냘프게 떨리며 한 지점을 가리켰다.

“제가 없던 사이 성녀라 참칭하며 제국의 사랑을 받아왔던 슬라데이체의 공녀 나나.”

그동안 모두가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신의 이름 아래 재판받을 수 있게 해주세요.”

그리고 마왕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부터 모두가 의심만 하면서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질문.

“그녀가 진짜 마왕의 마녀가 아닌지 증명해야 하니까요. 그것만 들어주신다면 슬라데이체를 향한 의심을 풀 수 있도록 노력하겠어요.”

대공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물었다.

“지금 내 딸이 마녀라도 된다는 건가?”

슬라데이체 기사단은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칼을 뽑아 들었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근처에 있던 벨리알도 칼을 뽑아 들었다.

“교황이 네 뒤에 있으면 네 대가리를 아무도 안 깰 줄 아나 보지?”

그때 리미에가 왔던 방향으로 말을 탄 기사단이 우르르 달려와 도착했다.

“성기사단이다!”

“성기사단이 도착했어! 정말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이……!”

성기사단은 성스러운 주신의 문장이 새겨진 갑옷을 입고 모두 리미에의 앞에 무릎 꿇고 도열했다.

“성녀님의 부름에 도착했나이다.”

“성녀님, 분부를 내려주십시오.”

리미에는 성기사단을 뒤에 두고도 슬라데이체를 바로 공격하지 않았다.

“슬라데이체 대공님의 말대로 아직 진실이 다 밝혀진 것은 아니에요.”

리미에가 슬프다는 듯 고개를 작게 저었다.

“좋다. 신전의 입장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슬라데이체의 결단에 감사드려요.”

리미에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님과 슬라데이체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 풀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하겠어요.”

“알았다.”

콰아아아앙!

슬라데이체 대공이 리미에를 향해 마기를 휘둘렀다.

“성녀님을 보호하라!”

“성녀님의 안전이 우선이다!”

다행히 성기사단의 보호로 리미에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하지만 많이 놀랐던 리미에가 입술을 떨며 물었다.

“어째서……?”

“내 딸이 마녀라면, 나는 특별히 마왕을 하도록 하겠다.”

대공은 무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슬라데이체가 어떤 곳인지 보여주겠다!”

벨리알은 대공을 따라 검을 뽑아 들었다.

“다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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