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큰 고민에 빠졌다.
집무실 서류를 보고 있어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카밀라가 그런 나를 보며 물었다.
“공녀님,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아니야.”
“딱 봐도 고민이 있으신 표정인데요.”
“많이 티 나?”
“티가 그리 많이 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공녀님을 모신 세월이 얼마입니까?”
나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턱을 괸 채 말했다.
“아니, 우리 가족들이 좀 이상해서.”
“대공님과 벨리알 공자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카밀라가 최근 이상하기로 손꼽는 두 사람을 언급했다.
“아니. 전부 다.”
“아벨 공자님과 쥬테페 공자님도요?”
“그래. 다 이상해.”
솔직히 로스칼 호수에서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크게 각오하고 있었다.
‘남자랑 붙어만 있어도 다들 난리 났으니까.’
하지만 가족들의 반응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결혼?’
‘우리 도토리가 벌써 그런 나이가…… 저놈 새, 아니다.’
물론 다들 충격받은 반응을 보여줬다.
그렇지만 내가 바라던 반응과는 전혀 달랐다.
‘왜 다들 아무 말도 안 하냐고!’
아빠나 오빠들이나 네가 나이가 몇인데 벌써 결혼이냐고 제국을 뒤집어엎었으면 한참 전에 엎었을 사람들이다.
칼릭스에게 좀 미안한 말이지만, 차라리 아빠나 오빠들이 칼을 뽑았으면 덜 신경 쓰였을 거다.
‘도대체 뭘 숨기고 있길래 그런 거지?’
이 정도면 가족들이 공유하고 있는 비밀이 너무 궁금해서 조급해질 정도다.
‘거기서 끝났으면 말이나 안 해.’
로스칼 호수에 갔다 온 뒤 아빠는 내게 이상한 말을 남겼다.
‘미안하다.’
‘뭐가요?’
‘여러 가지로. 아빠라는 게 정작 중요할 때 소용이 없구나.’
아무래도 가족들이 사라진 사이 내가 황후를 상대한 일 때문인 것 같기는 한데.
그것치고도 이상하단 말이지.
그래서 난 가장 쉬운 벨리알을 노렸다.
‘벨리알, 나 칼릭스 만나러 나가도 돼?’
‘……그래.’
‘진짜, 진짜 단둘이 만나러 가도 돼? 밤늦게 들어와도 돼?’
‘…….’
‘막 뽀뽀도 한 번 하고 돌아온다? 그래도 돼?’
물론 벨리알은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긴 했지만 평소처럼 따라오지 않았다.
‘위험한 일만 하지 마.’
‘응? 다른 건 안 막아?’
‘나나. 도대체 벨리알 형을 뭘로 생각하는 거야.’
그러자 지나가던 쥬테페가 말했다.
‘그동안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 만나는 거 힘들었잖아.’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생각해 보니 그동안 우리가 다 큰 동생한테 너무 심했지. 너도 그동안 답답했다면서.’
‘그, 그건 그랬지만…….’
‘저번에 우리가 수작 부려서 화난 것도 있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잘 살았으면 좋겠어서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그동안 가족들에게 다 부탁했던 거다.
‘하지만 이상해!’
그런데도 이 떨떠름하고 신경 쓰이는 느낌은 뭐란 말인가!
“카밀라. 혹시 가족들이 로스칼 호수에서 뭘 보고 왔는지 들은 거 있어?”
그러자 카밀라는 단칼에 고개를 저었다.
“최근 가족분들께서 모여서 뭔가를 의논하고 계신 것 같긴 한데, 자세히 확인한 건 없습니다.”
“조용하니까 너무 수상한데.”
나는 끙끙 앓으며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아니면 수상한 행적 같은 건?”
“수상한 행적 말입니까?”
“뭐, 예를 들면, 아무도 모르게 암살 길드로 칼릭스에 대한 살인 청부를 한다거나…….”
“제가 아는 선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진짜 우리 집에서 다들 평화롭게 지내고 있단 말이야? 독 같은 걸 먹이지는 않고?”
현재 칼릭스는 황태자궁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우리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솔직히 나는 칼릭스가 이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엄청난 재앙이 벌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특히 벨리알과 칼릭스는…….
‘상성이 안 좋지.’
하지만 의외로 모두가 칼릭스와 무난하게 지내고 있었다.
‘너, 검 좀 쓰더라.’
‘그래서?’
‘앞으로도 열심히 써라. 나한테 존대 같은 건 바라지 말고.’
당장 검으로 두들겨 패겠다고 난리 칠 줄 알았던 벨리알이 무난히 넘어간 게 가장 이상했다!
나는 책상을 쾅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명 뭔가 있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어.”
“공녀님의 촉이 그렇다면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요.”
슬라데이체 저택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카밀라가 차분히 대답했다.
“하지만 서로 마주쳐서 인사할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시지만, 싸우는 일은 없었습니다.”
“서로 무시하고 살기로 한 걸까?”
“어쩌면 그럴 수도요.”
“우리 가족이 그럴 것 같아?”
그러자 카밀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 그게 이상하다니까! 도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야…….”
마음이 복잡해졌다.
‘칼릭스한테 이 이야기를 상담할 수도 없고.’
원래 이런 고민 상담은 대신관 전문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 대신관한테는 연락 안 왔어?”
“예. 저번 검증식 때 걱정되신다고 연락을 하신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교황님의 일로 많이 바쁘신 것 같았습니다.”
“하긴, 요즘 신전이 참 바쁘지.”
역대급 가뭄이 들면서 신전에서 구휼 문제로 바쁘다고 듣긴 했다.
“대신관한테 조만간 만나러 가겠다고 편지 써야겠다. 시간 좀 비워줄래?”
오랜만에 대신관 얼굴을 봐야겠다.
* * *
대신관 헬리오스는 고생을 많이 한 게 역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가 날 보러 오고 웬일이냐.”
“내가 무슨 볼일이 있어야만 오는 사람이야?”
“그러면 다르냐?”
대신관이 삐딱하게 웃었다.
“항상 고민 있을 때만 찾아왔잖아. 시간 없으니까 용건부터 말해.”
“어허. 진짜 대신관 얼굴 보고 싶어서 온 거라니까.”
“……진짜로?”
대신관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진짜야. 누가 들으면 날 엄청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어.”
“남이야 그렇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라고.”
“자기 평판은 엄청 열심히 관리하면서! 성녀인 내 평판도 좀 생각해 달라구.”
대신관과 장난스럽게 떠들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나 오랜만에 대신관이 보고 싶어서 온 거 맞아.”
나는 대신관이 준비해 준 나나푸치노를 홀짝 마시며 말했다.
“그동안 나는 검증식으로, 대신관은 신전 일로 너무 바빴잖아. 그동안 별일 없었지?”
대신관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이내 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어쭈, 꼬맹이가 다 컸다고 날 걱정해 주는 거냐?”
하지만 그 장난스러운 말투에도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묻어나왔다.
언제나 매끄럽고 잘난 척하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길래.’
“장난치지 말고. 대신관도 알다시피 나 성녀야. 내 도움 필요 없겠어?”
내 걱정에 대신관은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헝클었다.
“어린애가 어른 걱정해 주는 거 아니다.”
“난 옛날부터 어른이었거든?”
“피후견인인 이상 넌 나한테 영원히 어린애야.”
“제국의 성녀라도?”
“제국의 성녀이기 전에 내 피후견인이었으니까.”
내가 눈을 흘기자 대신관이 태평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정 힘들면 너한테 말할 테니까 걱정 말-”
그때 신관 하나가 혼비백산하며 안으로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신관님 큰일 났습니다! 비상사태입니다. 아무래도-”
그때 들어온 신관이 나를 보며 눈치를 살폈다.
“저, 그러니까.”
“됐다. 말하지 않아도 어떤 문제인지 알겠으니까.”
대신관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네 문제를 알아서 잘 처리해 주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다음에 여유 되면 보자.”
급하게 일어난 대신관이 다른 신관을 따라 나갔다.
‘역시, 교황님 문제인 게 틀림없어.’
하지만 대신관은 내게 자신의 문제를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대로 넘어가기 싫어.’
누군가는 괜한 오지랖이라고 할 수 있지만 대신관은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다.
‘성녀라는 권력으로 우겨도 되긴 한데.’
그래도 최대한 자연스러운 게 좋다.
나는 밖으로 나가는 척하면서 익숙한 신관 하나를 붙잡았다.
“안녕, 엘록.”
대신관을 보필하는 신관 엘록이다.
“아, 성녀님! 오랜만입니다.”
“응, 보고 싶었는데 정신없어서 이제야 보내.”
“그럴 만하지요. 검증식이 여간 큰일이 아니니까요.”
나는 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엘록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그나저나 대신관한테 다 들었어. 어쩌면 좋아.”
“아…….”
그러자 엘록의 얼굴에 수심이 스쳤다.
“성녀님도 대신관님께 들으셨군요. 성녀님껜 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는데…….”
엘록의 혼란스러운 말에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나도 성녀인 이상 신전의 일을 모른 척 넘길 수 없는걸.”
“그렇긴 하군요.”
“워낙 일이 급해서 자세히 들은 건 아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어서 큰일이네.”
대신관이 저렇게 곤란해하는 걸 보면 마땅히 대안이 없는 일이다. 그러자 엘록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맞습니다. 대신관님의 신성력만이 교황님의 광증을 잠재울 수 있으니 큰일입니다. 그마저도 점점 효과가 없으시고요.”
교황의 광증?
‘이거였어.’
어쩐지 교황님이 눈을 뜬 이후부터 대신관의 행적이 무척 이상하다 싶었다.
‘왜 내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걸까?’
“내 신성력을 써도 효과가 없을까?”
“그거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일단 교황님이 어디 계신지 안내해 줄래?”
“예, 이쪽으로- 아니, 어디 계신지 모르고 계셨습니까?”
엘록이 큰 눈을 끔뻑였다.
“교황 예하께서 계신 곳은 모르신다는 건…….”
아무래도 거짓말이 들켜 버린 모양이다.
‘그래도 신관들은 대부분 순진해서 바로 먹혔네.’
나는 헤헤 웃었다.
“맞아, 사실 대신관한테 들은 거 없어.”
“서, 성녀님…….”
“하지만 교황님 문제라면 내 일이나 마찬가지지. 빨리 안내해 줘.”
엘록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어차피 다 걸린 거 지금 가는 게 좋겠어.”
나는 두 손을 허리춤에 올리며 상큼하게 웃었다.
때로는 대놓고 나서야 해결되는 일도 있는 법이다.
* * *
“크아아아!”
교황이 미친 사람처럼 발광하며 기물을 부수었다.
“교황님이 언제부터 날뛰시기 시작했지?”
“얼마 지나지 않으셨습니다.”
헬리오스는 철창 너머의 교황을 보며 다른 신관들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들어가서 내가 돌보겠다.”
“하지만 대신관님, 저번에 그러다 상처를 입으시지 않으셨…….”
“그래도 해야지.”
대신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 신성력으로 정신을 차리실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할 뿐이다. 다른 신관들은 모두 대책을 연구하고-”
“이봐, 대신관!”
그때 뒤에서 불쑥 익숙한 목소리가 청량하게 신전 내부에 울려 퍼졌다.
“왜 나한테 다 비밀로 했어!”
나나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대신관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대신관이 놀란 표정으로 나나를 바라봤다. 그러자 나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환자가 있는 곳에 성녀가 가야지. 어디 가야겠어?”
대신관은 멍한 표정으로 나나를 봤다.
나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창살 너머로 빼꼼 교황을 바라봤다.
“저분이 교황님이셔?”
나나의 금안이 교황을 확인했다.
“교황님께서….”
창살 안의 교황이 미친 말처럼 펄쩔펄쩍 뛰었다.
“…많이 활발하시네.”
* * *
슬라데이체 일가가 심각한 표정으로 원탁에 둘러앉았다.
벨리알이 쾅! 책상을 내려쳤다.
“언제까지 저놈이 우리 집에서 저러고 다니는 꼴을 봐줘야 합니까?”
당연히 슬라데이체는 칼릭스가 눈엣가시처럼 성에 거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