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완벽한 황후라 칭송받았던 세라피나 황후.
“내, 내 준비가-”
황후라는 가면 아래에 숨어 있던 무자비한 표정이 선명히 드러났다.
악독한 눈빛과 대조될 정도로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고 떨리는 입술.
‘저런 표정은 처음이야.’
세라피나의 영롱한 보라색 눈동자가 마치 산산조각 난 도자기 같다.
“내 준비가 미숙했다. 하지만 황태자의 출생만큼은 확실하다.”
빛나는 금발로도 세라피나의 초라한 표정을 숨길 수 없게 했다.
세라피나가 실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악을 쓰듯 소리쳤다.
“고장! 그래, 마법사! 고장 났다고 하지 않았나!”
“예, 예. 그랬습니다.”
“내 관리 미숙으로 벌어진 일이다. 사과하겠다.”
“그렇게 하면 끝인가요?”
이상하게도 나는 세라피나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하지만 황후는 내 적이야.’
내가 반격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슬라데이체 전부를 묻어버렸을 것이다.
“황후 폐하의 실수로 에스테반 황자 전하가 아니라 칼릭스 황자 전하께 잘못된 결과가 나왔으면 다시 검사하지도 못하지 않았을까요?”
“에스테반은.”
황태자가 아닌 황자라는 표현에 미간을 좁혔던 황후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아니다. 공녀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래서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다시 한번 검증하더라도 마도구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황후가 눈썹을 꿈틀 들어 올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
하지만 황후는 내 제안에 승낙할 수밖에 없다.
“그리 하지. 마법사, 공녀 앞에서 다시 한번 마도구를 점검해 보거라. 어떤 문제가 있는지.”
“예, 알겠습니다.”
황후가 조바심이 느껴지는 초조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폐하, 그런다고 안 될 일이 갑자기 바뀌지는 않아요.’
솔직히 황후와 이렇게까지 틀어지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칼릭스와 친해지면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은 황후 자신이 저지른 대가일 뿐이다.
혈통 검증 마도구에 푸른빛이 떠오르며 눈을 감았던 마법사가 눈을 떴다.
마법사의 안색에 의혹이 가득 찼다. 마법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무엇하느냐?”
세라피나가 득달같이 물었다.
“한번 점검했던 마도구거늘, 어찌하여 바로 결과를 말하지 않느냐.”
“폐, 폐하. 이상합니다.”
마법사가 땀을 줄줄 흘리며 다시 한번 마력을 사용하여 마도구를 살폈다.
“……어째서, 이렇지…….”
마법사가 대답을 망설이고 회피할수록 주위의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폐하.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이 마도구에서 사특한 기운이 느껴졌는데.”
“…….”
“아무리 살펴봐도 멀쩡합니다. 방금 전 있었던 일이 착오였던 것처럼…….”
마법사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크하하하!”
그 순간 황제가 박수를 치며 광소했다.
“그래? 마도구에 오류가 없었다?”
황제는 아연하게 질려 쓰러질 것 같은 황후를 보다가 고개를 숙여 나를 바라봤다.
“이거 신기하구나. 그렇다면 에스테반이 내 자식이 아니란 소리냐?”
“마도구의 결과대로라면 그렇게 해석할 수 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세라피나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폐하, 저는 억울합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도구에 오류가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 지금은 아니라지 않느냐?”
“폐하!”
세라피나는 더는 모욕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면 제가 폐하를 두고 부정을 저질렀다는 겁니까?”
누구도 입 밖에 내지는 못했던 말이 당사자인 세라피나의 입에서 나왔다.
“그건 그동안 제국의 황후로서 헌신해 온 제 인생에 대한 모독입니다!”
세라피나는 이를 까득, 깨물며 피를 토할 듯이 외쳤다.
“단언컨대 전 단 한 번도 황후로서 떳떳하지 못한 짓을 저지른 적 없습니다!”
“지금 황후의 말만 믿고 모든 것을 결정하라 이건가?”
황제가 재밌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이 검증식도 황후가 원한 것 아닌가. 차라리 검증식 같은 절차 없이 모든 것을 황후의 뜻대로 결정하지 그랬나?”
“그, 그건…….”
사납게 노려보던 황후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폐하, 황후 폐하의 마음을 헤아려주세요.”
나는 사람들 앞에서 도리어 황후의 편을 들었다. 쓰러질 것처럼 부들부들 떨던 황후가 나를 홱 돌아봤다.
“너…….”
황후의 눈동자가 커졌다.
“걱정 마세요, 황후 폐하. 저는 황후 폐하를 믿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적대했던 내가 황후를 감싸주자 모두가 술렁거렸다.
하지만 그건 나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에스테반은 진짜 황자가 맞는걸.’
비록 황후가 판 함정 때문이라고는 하나, 에스테반이 이번 일에 휘말려 폐황자가 되어 처벌받는 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뭐, 황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황실 혈통을 검증하는 마도구라지만 이리 잦은 오류가 난 이상 그 신뢰성을 믿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황후를 감싸주는 척, 다시 황후가 마도구를 이용해 함정을 파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황제 폐하께서도 황후 폐하께서 부정을 저지를 분이 아니란 걸 믿으시잖아요.”
“흐음. 그렇다면 칼릭스.”
황제가 턱을 괸 채 이방인처럼 서 있는 칼릭스에게 물었다.
“어떤 결과에서든 네가 짐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 같구나. 에스칼라임만 봐도.”
“그렇겠지요.”
“네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냐?”
칼릭스는 절도 있게 가슴에 주먹을 올리며 무표정하게 답했다.
“제 모든 권리를 원합니다.”
“네 권리라면?”
“제가 폐해지지 않았다면 당연히 주어졌을 모든 권리 말입니다.”
폐황자, 칼릭스.
전 황후의 정통한 아들.
부정하지 못할 정도로 이오카르 황제를 빼닮은 수려한 외모.
초대 황제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완벽한 혈통까지.
칼릭스가 정당한 권리를 모조리 가지게 된다는 건, 에스테반이 누리던 모든 권력이 칼릭스에게 돌아간단 의미다.
“안 됩니다, 폐하!”
황후는 절망하며 무릎을 꿇었다.
“검증식에 오류가 발생한 것은 제 과실입니다.”
세라피나의 화려한 티아라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토록 아끼던 티아라지만 세라피나는 신경도 쓰지 않고 황제에게 애원했다.
“하나 에스테반은 전하의 아들이 확실합니다! 제 잘못으로 폐하의 아들을 내치지 말아주십시오!”
“…….”
“정 폐하께서 의심되신다면, 부디 폐하의 명으로 모든 검사를 다시 진행하시옵소서!”
“세라피나.”
황제가 황후의 이름을 불렀다. 세라피나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짐은 네 아들을 내치려는 게 아니다.”
“그, 그러시다면…….”
“본래 주인에게 자리를 돌려주는 것뿐이지.”
황제는 자애롭게 제게 고개를 숙인 황후의 뺨에 손을 댔다. 세라피나의 눈가로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게 어찌하여 제 아들의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까?”
황제가 허물어지는 세라피나를 외면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후는 검증식을 망친 책임을 물어 근신에 처한다. 그리고 황비로 하여금 황후의 역할을 대신하도록 한다.”
황후는 비틀거리듯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황후의 몰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