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172)

서늘한 공기가 연회장을 감쌌다.

“칼릭스 황자와 슬라데이체가 지금 도착했다고?”

황후에게 밀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멀리 떨어져 있던 이오카르 황제가 입을 열었다.

“들라 하라.”

“……폐하.”

황후가 휙 황제를 돌아봤다.

“왜 그러나? 기다리던 손님이 왔으니 오게 해야 할 것 아닌가.”

황제는 황후를 응시했다.

“그 전에 황후는 먼저 해명해야 할 문제가 있을 텐데.”

황후의 안색이 다시 한번 하얗게 질렸다.

“해명이라니요?”

“그러면 해명할 일이 아닌가?”

이오카르 황제는 아무 일 아닌 것처럼 태평하게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일치율 0%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에스테반 황태자가 황족이 아니었던 건가?’

‘그러면 설마 황후가 밖에서 낳아온 자식이 지금까지 황태자 노릇을 했다는…….’

‘그러면 에스테반 황태자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제국민 모두 에스테반을 황태자로 알고 있었다.

이 자리의 귀족들마저도 충격을 이루 말할 수 없는데, 그동안 황태자로 알고 있던 제국민들의 충격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해명할 일이 아니지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기절할 법한 일인데도, 세라피나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사소한 오류를 바로잡아야 할 뿐입니다.”

세라피나는 주위의 귀족들을 고고하게 돌아보며 말했다.

“황태자는 사전에 이런 문제를 대비하기 위해 일치율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는 결과가 정상적으로 나왔습니다.”

그녀는 검사를 진행한 황궁 시종들을 불같이 꾸짖었다.

“황궁 시종장!”

황궁 시종장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반응했다.

“예, 예. 황후 폐하!”

“도대체 일 처리를 어찌했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오류가 나오는 것이냐?”

황후의 분노에 시종장을 비롯해 황궁 시종 모두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지금 당장 문제를 해결하고 검사를 다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황후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칼릭스 황자와 슬라데이체 공녀가 다음 검사를 받기 전까지 문제가 없도록 하라. 알았느냐?”

급히 부름을 받고 달려온 황실 마법사가 마도구를 확인했다.

모두가 심장을 졸이며 그 과정을 주시했다. 그중 황후가 가장 뚫어져라 그 모습을 살폈다.

‘황후 폐하께선 정말 떳떳하신가 보군.’

‘진짜 마도구에 오류가 났던 것인가? 어쩌다 저런 심각한 오류가…….’

다행히 황실 마법사가 낸 결론은 황후가 바라던 대로였다.

“확인 결과, 황후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마도구에 결함이 있었습니다.”

황후가 날카롭게 물었다.

“도대체 어쩌다 그런 문제가 벌어졌단 말이냐?”

“검사 당시 의문의 기운이 섞인 듯싶습니다.”

“어허, 이토록 중요한 문제에 그런 사특한 일이 벌어지다니.”

세라피나가 바랐던 대로 완벽한 변명이다.

‘이 정도면 재검하여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잘 풀리게 된 것은 아니었다.

한번 생긴 의혹을 완벽히 뒤집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앞으로 오늘의 일이 평생 세라피나의 흠으로 남게 되리라.

‘리미에, 감히 내 일을 망쳤겠다.’

기존에 마도구 검사를 할 때는 그런 문제가 없었으니, 리미에의 수작이 틀림없다.

‘이번 일만 처리하고 나면 그 보잘것없는 목숨을 단번에 끊어주지.’

“그렇다면 마도구를 다시 살핀 후 검증하는 것으로-”

그 순간, 칼릭스 황자와 슬라데이체 공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야 검증식에 등장하다니, 무슨 염치로-’

몇몇 귀족은 황실 행사에 무단 지각한 두 사람을 안 좋게 보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은 모조리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화려한 황실 샹들리에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이 그림처럼 근사했기 때문이다.

특히 아름답기로 유명한 나나와 달리 칼릭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었기에 그 충격이 더 했다.

‘이오카르 폐하와 똑같이 생겼다는 것이 사실이군.’

‘얼굴에서 빛이 나. 정말 말도 안 되는 외모군.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잘생겼지?’

두 사람은 귀족들이 자리를 비켜 만들어준 길을 따라 황족들 앞에 섰다.

“제국의 영광인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황후가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역시 방금 전 일치율 문제가 컸어.’

아무리 오류로 결정이 났다 하더라도, 사람의 의심은 쉬이 지울 수 없다.

‘칼릭스 황자에게 호의적인 시선이 훨씬 늘었어.’

세라피나는 싸늘한 시선으로 두 사람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오랜만이구나. 그런데 공녀답지 않게 황실의 행사에 늦었어.”

세라피나의 시선이 나나를 향했다.

“나나 마시멜로 슬라데이체.”

나나가 예법에 맞게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공녀의 이번 행동은 황실모독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공녀의 죄를 인정하느냐?”

사랑스럽게 흘러내린 분홍색 머리카락과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드레스 차림, 하얗고 고운 얼굴. 찬란하게 반짝이는 금안.

까다로운 세라피나조차 흠잡을 구석을 찾기 어려울 만큼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다.

‘하긴, 나 역시 그러했지.’

그래서 저 아이가 제 손 위를 벗어나는 걸 알면서 애써 무시했다.

‘진작 처리했어야 했는데.’

하나 이제부터 철저하게 짓밟아버리면 된다.

“예, 황후 폐하.”

나나가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번 검증식이 황실에 얼마나 중요한 행사였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고 늦은 제 죄는 부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지요.”

“그걸 아는데 그리하였느냐?”

“하나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나나와 황후의 시선이 마주쳤다.

황후는 방금 전 일치율이 0%가 떴던 순간보다 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왜 저리 당당하지?’

황후가 작정하고 따지면, 웬만한 일로는 넘어갈 수 없다. 그리고 나나도 충분히 그걸 알고 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로스칼 호수에서 사라졌던 이유가 뭐지?’

세라피나가 놓치고 있던 단 한 가지.

“도대체 무엇이기에-”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치잉-

칼릭스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손잡이는 오랜 시간 방치된 고물처럼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칼날만큼은 심상치 않은 빛으로 번뜩였다.

“무엄하십니다!”

황후의 세력인 황궁 시종장이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칼릭스에게 소리쳤다.

“황제 폐하 앞에서 허락 없이 검을 드시다니요! 법도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일입니다.”

“그만!”

하지만 먼저 나선 것은 황후였다.

“예법을 논의할 일이 아니다.”

황후가 파르르 떨리는 입매를 감추지 못하고 칼릭스를 바라봤다.

외면하고 싶어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결과가 두 가지나 있었다.

“저 검이, 내가 생각하고 있던 그 검이 확실하냐?”

“물론입니다.”

칼릭스는 무심하게 검을 황제와 황후의 앞에 올려뒀다.

검신에 새겨진 이름이 반짝였다.

 [에스칼라임]

에스칼라임, 초대 황제가 제국을 건국하며 사용했다던 전설적인 검.

오로지 초대 황제에게만 손을 허락했다는, 전쟁 중에 사라져 제국이 애타게 찾던 신물.

“제국의 검증식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제국의 명예를 위해 신검 에스칼라임을 회수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 그래. 아주 훌륭한 일을 해냈구나.”

귀족들 사이로 자연스러운 경탄이 새어 나왔다.

‘이 신검을 트집 잡을 수 있는 명분은 없겠지.’

나나는 속으로 씩 웃었다.

‘리미에가 신검 에스칼라임을 갖고 있었을 줄이야.’

덕분에 다른 문제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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