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33/172)

달빛이 서늘하게 칼릭스을 비췄다. 달빛 아래의 칼릭스는 지옥에서 온 악마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폐태자 칼릭스.”

세라피나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주먹을 쥐었다. 꽉 쥔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네가 이곳엔 무슨 일이지?”

칼릭스는 대답 대신 황후를 보며 입꼬리를 들어 픽 웃었다.

황후가 눈썹을 찌푸렸다.

“내 말이 들리지 않나?”

“우리가 서로 대화할 사이였나?”

증오가 흘러넘치는 황후와 달리 칼릭스는 시큰둥하기만 했다.

황후는 저 반응이 더 짜증스러웠다.

“그래. 그런 사이는 아니지. 그래도 할 말이 있으니 날 찾아온 것 아닌가?”

“슬라데이체 공녀.”

칼릭스가 황후를 향해 한 발자국 걸어왔다.

“어디가 그렇게 거슬렸지?”

“네 알 바 아니다.”

“그래도 당신, 당신 사람 하나만큼은 아끼지 않았나?”

칼릭스와 황후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훌쩍 자라 청년이 된 칼릭스는 황후가 고개를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커졌다.

‘위압감이.’

이건 이오카르 황제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분위기다.

“날 먼저 배신한 건 공녀일 텐데.”

“먼저 함정을 판 건 당신이었어. 그래놓고 배신이라니.”

쿵!

칼릭스는 황후 옆에 있는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하얀 대리석 벽이 검게 물들었다.

“당신 같지 않은 소리인데.”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알 만큼은 알지.”

칼릭스의 담담한 푸른 눈동자가 황후의 심장을 할퀴었다.

그때 끄으윽, 하고 신음이 들렸다.

“화, 황후 폐하!”

황후 뒤에 있던 두 시녀가 그림자에 목이 졸리는 것처럼 비틀거렸다.

“어린 난 당신이 원하는 거래에 맞췄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그 어린 날의 거래가 언제까지 먹힐 것이라 생각하나?”

황후의 두 눈에 어린 칼릭스가 떠올랐다.

처음 만난 그 순간, 겨우 말이나 뗐을까 싶은 어린 칼릭스는 황후를 보며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바라시는 게 무엇입니까?’

제 배로 낳은 에스테반과 비슷한 나이의 폐태자.

‘죽은 듯이 살라. 내가 독을 먹여도, 네 주위의 모든 것을 앗아도 아무것도 모르는 듯, 그렇게 살라.’

‘…….’

‘그렇다면 황제 폐하와 무리해서까지 싸우며 너를 해치지 않으마.’

아무런 힘도 없었던 폐태자는 황후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둘의 거래였다.

황후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그래서, 네가 날 해치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나는 당신 따위에 관심 없어.”

황후 아래의 그림자가 그녀를 잡아먹을 것처럼 넘실거렸다.

“내가 원하는 건 한 가지야.”

“그 공녀가 그리 소중하더냐?”

“당신 따위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새삼 황후의 눈에는 소름 끼치도록 무심한 칼릭스의 두 눈이 들어왔다.

“그러니 조심해.”

담담하다고 생각했던 두 눈.

“입 닥치고 원하던 대로 권력이나 탐내고 살아.”

그 눈이 완전히 미쳐버린 황제보다 더 미쳐버린 광자의 눈처럼 보였다.

“당신이 아끼는 게 죄다 망가지기 전에.”

칼릭스가 황후의 목을 조를 듯이 큰 손을 덮었다가 털었다. 자국 하나 남지 않았지만 황후는 모멸감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네, 네가 감히…….”

뒤에서 황후의 시녀가 컥컥 괴로운 기침을 토했다.

칼릭스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하지만 망가진 황궁의 벽이 그가 환상이 아니었음을 말했다.

“폐태자, 폐태자 칼릭스.”

황후는 신비롭게 빛나는 달빛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너는 황제와 똑같구나.”

지겨울 정도로 이기적이고, 맹목적으로 한 가지만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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