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172)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바이칼로스 공작의 회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리 황제 폐하라 하셔도 사사로운 복수를 빌미로 이 유서 깊은 바이칼로스 공작가를 짓밟을 권리는 없다.”

이번 결투가 황제가 보증한 것이니만큼 판의 크기가 다른 건 바이칼로스 공작도 인정했다.

하지만 공작가의 저택에 기사단을 끌고 와 침입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무엇보다 바이칼로스 공작가는 결투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겠다고 이미 약조했다. 상호 간의 협상이 완료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멋대로 대가를 집행하겠다고 나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다.”

바이칼로스 공작은 속이 바짝 탔지만 그럴수록 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며 당당하게 나섰다.

“황제 폐하의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건가?”

슬라데이체 대공이 기다렸다는 듯이 허리춤에 있는 검에 손을 얹었다. 붉은 눈동자가 살기로 번뜩였다.

“그렇다면 황제의 감찰관으로서 넘어가 줄 수 없겠군.”

황제의 감찰관은 수사 대상에 한해 황제와 동일한 권리를 지닌다.

대공에게 불복하는 건, 황실에 역심을 품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순간 움찔한 바이칼로스 공작이 서둘러 변명했다.

“바이칼로스는 제국의 적법한 귀족으로서 이번 사태에 의문을 표했을 뿐이다.”

“적법한 귀족?”

슬라데이체 대공은 그 말이 우습다는 듯 픽 웃었다.

“누가 바이칼로스가 적법한 귀족이라 했지?”

“대공, 아무리 결투에서 이겼다지만 바이칼로스의 모든 것을 부정할 수는…….”

“지금 이 시간부로 바이칼로스는 황실을 우롱한 죄인이 되었다. 당연히 적법한 귀족으로서의 보호는 받을 수 없지.”

슬라데이체 대공이 바이칼로스 공작의 눈앞에 황제의 칙서를 던져주었다.

바이칼로스 공작은 슬라데이체 대공이 버리듯 던져준 황제의 칙서를 뜯어보듯 살폈다.

[황실이 보증한 결투에 저주 같은 사특한 수단을 사용하여 승부를 조작하려 한 죄.]

[황실의 명예를 더럽히려 했다는 의도가 분명하여 슬라데이체 대공을 감찰관으로 삼아 죄인을 조사하게 명한다.]

약병을 바꿔치기하여, 벨리알에게 저주를 거는 것은 이미 황실에서 일하던 보야테 남작가의 죄로 뒤집어씌운 지 오래였다.

표면적으로 보야테 남작가는 바이칼로스 공작가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가문이었다.

‘어째서 바이칼로스의 죄가 된 거지?’

그사이 슬라데이체의 기사가 대공에게 다가와 물었다.

“주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부 짓밟고 들어가.”

“명을 받듭니다.”

대기하던 슬라데이체의 기사들이 바이칼로스 공작가의 저택으로 난입하기 시작했다.

“그, 그곳은 바이칼로스 공작가 대대로 내려져 오던 조각상……!”

“죄인들이 무엇을 숨겼을지 모르니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수사하라는 명이다. 거역하겠다면 피로 다스리겠다.”

영광스러운 바이칼로스의 상징인 가문의 문장이 떨어지고, 정성 들여 가꾼 정원이 기사들의 발아래 뭉개졌다.

멍하니 황제의 칙서를 바라보던 바이칼로스 공작이 칙서를 꽉 움켜쥐었다.

“황제 폐하를 뵈어야겠다. 보야테 남작가가 단독으로 벌인 죄에 오해가 생긴 게 틀림없으니.”

“아아, 보야테 남작가 말인가.”

슬라데이체 대공은 느른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라. 거기를 비롯해 조금이라도 연루된 곳은 전부 공평하게 수색 중이니.”

“……뭐?”

“페실리니, 토르베, 이앙카, 로페, 그 외에도 네가 생각하는 이름들은 전부 다 비슷한 상황일 거다.”

칙서를 붙잡은 바이칼로스 공작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황후다.’

방금 슬라데이체 대공의 입에서 나온 가문은 모두, 바이칼로스가 비밀 모임을 통해 부려온 가문이었다.

비밀 모임에 참여한 이들을 알 방법은 한 가지.

바로 비밀 모임에 참여하는 것뿐. 그리고 최근 갑작스레 참석한 사람이 있었다.

‘황후가 바이칼로스를 배신했어.’

쿠우웅-

슬라데이체의 기사들이 저택을 뒤엎는 소리가 들렸다.

몇백 년간 그 누구의 침입도 허락하지 않았던 유서 깊은 바이칼로스 공작가.

순간 바이칼로스 공작은 그토록 자랑스레 여기던 바이칼로스 공작가가 완전히 무너지는 듯한 환각을 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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