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172)

건국제 당일.

대공님이 건국제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팸플릿을 가져와 내 앞에 내밀었다.

“여기서 당장 하고 싶은 게 있느냐?”

건국제는 5년에 한 번 간격으로 열리는 큰 행사였기에, 다양한 이벤트들이 많았다.

‘저녁에 폐태자랑 잠깐 놀아야 하지만.’

그 외의 시간은 전부 가족들과 보내고 싶었다.

“도토리 이건 어떠냐?”

벨리알이 의욕 넘치게 팸플릿 하나를 꺼내 보였다.

“황궁 마상시합 격투! 황궁 정식 결투 시합! 올해 건국제에서 내가 다 쓸어버리고 올게.”

“피 튀는 거 싫어.”

“아니, 피는 안 튀겨. 가끔 목이 부러지는 사고가 벌어지긴 하지만…….”

“그거나 저거나!”

하여튼 벨리알은 여전히 싸움에 미쳐 있다.

“그래, 형. 아직도 나나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몰라?”

쥬테페는 벨리알을 비웃으며 내게 팸플릿 하나를 꺼냈다.

“나나, 이건 어때?”

“…….”

“딱 우리 수준에 맞지 않아?”

쥬테페가 꺼낸 건 황궁 살롱에서 주최하는 학술 토론 행사였다.

“내가 봤을 때 첫날 가장 도움이 되는 행사야. 장차 도움이 될 귀족 인맥들이 모여 있는 데다, 슬라데이체에 고용할 인재들을 미리 봐둘 수도 있어.”

“쥬테페, 너도 멀었다.”

대공님은 쥬테페에게서 팸플릿을 빼앗았다.

쥬테페가 억울한 듯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5년에 한 번 열리는 행사이니만큼 가장 효율적으로 이득을 취할-”

“그게 문제라는 거다. 넌 나나의 마음을 파악하는 데 게을렀다.”

대공님이 오만한 눈으로 팸플릿 하나를 들었다.

“나나, 이건 어떠냐? 네가 가장 좋아할 행사 같구나.”

“아니, 이건-”

나는 눈이 반짝해서 대공님이 건네준 팸플릿을 훑어봤다.

어린이 장난감 박람회.

그림에 있는 인형과 장난감들을 보니, 내가 좋아했던 것들이다.

문제가 있다면.

“……영유아용 장난감 박람회잖아요?”

“뭐가 다른가?”

“전 이제 10살이라구요!”

여기 이 딸랑이를 봐. 솔직히 슬라데이체에 올 때부터 딸랑이 흔들 나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 제 나이뻘 애들을 위한 박람회도 있잖아요.”

영유아 대상만 있나 싶어서 다른 팸플릿을 찾아보니 있었다. 그러자 대공님이 눈썹을 좁혔다.

“벌써 이런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가 됐나? 아직 너무 어린데.”

“뭐가 어려요. 그리고 장난감이 아니라 공부를 좀 할 때죠.”

물론 난 알아서 공부까지 철저히 잘하는 훌륭한 공녀긴 하다.

“……그런가?”

대공님은 어쩐지 슬픈 눈빛으로 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나나, 빨리 자라지 않아도 된다. 이 아빠는 네가 조금 더 천천히 자랐으면 좋겠구나.”

나는 대공님의 쓰다듬을 기분 좋게 받으며 배시시 웃었다.

“아빠 마음은 알지만, 그래도 저는 빨리 자라고 싶어요.”

“왜?”

“그거야 어른이 되고 싶으니까요.”

그동안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어른이 된 적이 없었다.

‘항상 그 전에 죽었으니까.’

그래서 가족이 생긴 이번만큼은 꼭!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러자 아빠의 눈빛이 더 슬퍼졌다.

“……어른이 되어서 하고 싶은 거라도 있느냐?”

“어른이 된다면 뭐, 글쎄요. 남들이 하는 걸 다 하고 살지 않을까요?”

사실 어른이 되는 것에 집중하느라 어른이 되면 뭘 할지 크게 고민하진 않았다.

쥬테페가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남들 하는 것?”

“많잖아. 뭐…… 연애를 한-”

벨리알이 벌떡 일어났다.

“연애?!”

“왜, 왜 그렇게 놀래? 할 수도 있지.”

생각해 보니 나는 이번엔 좋은 가정을 꾸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 내 생각을 꿰뚫어 본 것인지, 벨리알이 막무가내로 외쳤다.

“무조건 안 돼!”

“뭐가 안 돼?”

“아, 아무튼 안 돼! 쪼, 쪼그만 도토리가 벌써부터 연애 생각이나 하고 있어!”

벨리알이 펄쩍 뛰자, 옆에서 잠잠한 듯했던 쥬테페가 내 두 손을 붙잡으며 속사포처럼 말했다.

“성인이 되고 난 뒤엔 네 연애에 간섭할 마음은 없지만 통계 자료를 봤을 때 첫 연애에서는 쓰레기 같은 상대를 만날 확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너도 정상은 아니구나.

이제 보니 눈빛이 살짝 돌아 있었다.

“다, 다들 왜 이래. 내가 평생 연애도 안 해보고 살아야 해? 그쵸, 아빠?”

나는 희망에 차 대공님을 바라봤다. 이미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본 대공님은 다르겠지!

“……나나.”

허망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던 대공님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 아빠는 어떤 것도 허락할 수 없다.”

“그러니까 뭘요?”

“너는 연애하기엔 너무 어려.”

“지금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요?”

“아무튼 안 된다.”

뭐야, 이 사람들!

그때 벨리알이 눈을 시뻘겋게 뜨며 득달같이 물었다.

“그래서, 도토리. 그 상대가 누구야?”

“상대라니?”

“분명 누구를 생각하고 말한 거잖아! 도토리 네가 생각하고 있던 그놈 누구야, 누구.”

당장 그 이름을 들으며 모가지라도 딸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런 상대 없어.”

“혹시 그 폐태자 놈 아냐? 어쩐지 처음 들을 때부터 기분이 나쁘더라니. 그놈이 내 순진한 도토리를 홀랑 꼬셔다가…….”

“폐태자? 감히 그놈이, 나나를?”

연이어 대공님이 이중창처럼 되물었다. 어쩐지 대공님 곁에서 풍기는 오오라가 더 심해지는 것 같다.

나는 더 큰일이 나기 전 열심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직 상대 같은 거 없어! 그냥 해본 말이야?”

“정말이냐, 나나?”

어쩐지 방금 전보다 대공님의 눈빛이 더 슬퍼 보였다. 비 맞은 대형견 같은 모습에 마음이 아파졌다.

“네, 진짜예요. 전하랑 저는 그냥 친구예요, 친구! 이제 더 이상 오해하지 말아요! 알았죠?”

그때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던 쥬테페가 천사처럼 웃었다.

“나나가 그렇다면 우리 믿어줘요. 나나가 언제 우리를 속인 적 있어요, 그치?”

“으, 응.”

나는 웬일인지 멀쩡해 보이는 쥬테페의 모습이 떨떠름했다.

‘이제 좀 안정을 찾은 건가?’

방금 전만 해도 눈빛이 심상치 않았는데.

“그러면 됐어.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마음이 편하다.”

쥬테페가 상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다렸다는 듯이 각서를 꺼냈다.

[연애 금지 각서]

나나 마시멜로 슬라데이체는 온 가족의 허락을 받지 않는 한 성인이 되기 전까지 남성과 교제하지 않기로 다짐합니다.

“……이건 뭐야?”

“오빠의 마음으로 혹시 몰라서 준비했던 거야. 이런 날이 오게 될 줄 나도 몰랐네.”

쥬테페는 사근사근 설명했다.

“어려운 건 없고, 여기 서명만 하면 돼. 아직 연애할 마음도 없고, 상대도 없으니까 상관없지?”

쥬테페는 나를 홀릴 듯 친절하게 설명해 주며 손에 펜까지 쥐여주었다.

“잠깐, 그런데 내가 이걸 해야 하는 이유가 뭐야?”

막 서명하기 직전 나는 흠칫 놀라 쥬테페를 다시 봤다. 천사처럼 성스럽던 얼굴이 사기꾼처럼 음흉하게 보였다.

“이 사기꾼. 원래 이런 서명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 나도 다 알거든?”

내가 펜을 집어 던지자 쥬테페가 쳇, 하고 혀를 찼다.

“다들 자꾸 그렇게 피곤하게 하면 나 진짜 연애할 거야.”

그렇게 평소처럼 상황을 마무리 지으려던 차였다.

저택을 지키는 기사가 대공님을 찾아왔다.

“주군. 잠시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가족끼리 있을 땐 방해하지 말라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워낙 중요한 일이라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사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급한 소식을 전했다.

“바이칼로스의 가신이 찾아왔습니다.”

“무슨 이유로?”

“그…….”

기사는 말을 잠시 머뭇거렸다.

“에이든 바이칼로스 공자가 공녀님에게 청혼서를 보냈습니다.”

콰드득-

그 순간, 대공저의 벽 하나가 갑자기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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