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구슬을 바라본 아벨의 붉은 눈이 요동쳤다.
“신경 쓰이는 일?”
“일단 이 마도구, 아벨이 확인해도 대공비님이 만드신 마도구가 맞는 거지?”
“그렇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벨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걱정스러운 시선이 내 얼굴에 쏟아졌다.
“설마 샤를린 그 여자가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을-”
“그런 거 아니야.”
나는 우물쭈물 수정구슬을 아벨에게 내밀었다.
“어쩌다가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말할 수 없어. 나도 잘 모르는 일이라서.”
어쩌다가 정보 길드장의 기운과 반응했던 건지, 왜 갑자기 내 손에서 빛나게 됐는지.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
‘마도구의 오류면 어쩌지.’
방금 전까지 내 손에서 아무 반응 없던 수정구슬은, 아벨의 손에서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고작 느낌이라는 이유만으로 근거도 없이 네 말을 들어달란 거냐? 우리 원정대는 네 투정이나 들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투정 같은 게 아니에요. 기록을 보면 이번 마족은 한파를 몰고-’
‘그게 바로 투정이란 거다. 성녀님께서 이끄는 길에 너 따위가 의문을 제기하는 거기도 하고.’
옛날부터 사람들은 아무리 근거가 있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물며 이번 일은 근거도 없었다.
“잠깐이지만, 이 마도구가 내 손에 반응해서 빛을 발했어.”
경위를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었다. 논리적으로 내 말을 무시해도 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보 길드장에게 검토를 맡겨도 되긴 했지만.’
그래도 전문가인 아벨이 더 낫겠지.
“단순히 고장일 수도 있지만, 혹시나 대공비님 실종과 관련돼서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고마워, 레이디.”
아벨은 자상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를 믿고, 불안한 와중에도 얘기해 줬구나.”
아벨은 진작 내 불안을 간파하고 있던 듯 꿀처럼 달콤하기만 했다. 그 단단한 믿음에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서 괜한 소리를 한 걸 수도 있는걸.”
“아니야.”
아벨이 단호하게 말했다.
“세상에 우연히 벌어지는 일은 없어.”
수정구슬을 바라보는 아벨의 붉은 눈 위로 검붉은 마법진이 살짝 스쳤다.
“역시 레이디는…….”
“내가 뭐?”
아벨은 대답하는 대신 한 가지를 질문했다.
“혹시 이 마도구가 어떤 원리로 반응하는지 알아?”
“슬라데이체의 피에 반응하는 거 아냐?”
“아니. 피가 아니라 슬라데이체 특유의 마기를 판별하는 거야.”
“마기를?”
“단순히 손에 쥐는 것만으로 혈족인지 확인하는 건 매우 어렵거든. 그래서 마기를 연구했던 어머니답게, 다른 방식을 강구하신 거지.”
나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아벨의 손에 들린 마도구를 바라봤다.
‘시간 마법뿐만 아니라 마기에 대해서도 연구하셨구나.’
마침 샤를린이 이 마도구를 소개하면서 했던 말이 떠올라 아벨에게 물었다.
“그래서 더 좋은 마도구가 생각났다고 하셨던 건가?”
“그렇지. 왜냐하면 다른 강한 기운이 있을 때, 마기가 반응하지 못하는 일이 생겼거든.”
아벨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기를 품은 바람이 주변에 휘몰아치고, 아벨의 검은 머리가 우아하게 흩날렸다.
“그래서 어머니의 강한 마력을 타고난 나는, 다른 형제보다 반응이 약하게 나타나기도 했어.”
“그걸 지금 말해주는 이유가 따로 있어?”
“아니.”
아벨은 뒷걸음질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나를 보며 달콤하게 눈웃음쳤다.
“그저, 레이디가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 얘기하는 거야.”
따스한 온기가 나를 감싼다고 느낀 순간, 아벨이 나른한 미소를 흘리며 바람처럼 사라졌다.
‘분홍색 꽃?’
주위에 예쁜 분홍색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자세히 보니, 분홍색 꽃은 아벨의 메시지대로 피어나 있었다.
[레이디가 날 보고 싶어 할 때마다 바로 나타나 줄게. 자주 날 생각해 줘.]
“이게 뭐야.”
봄바람같이 부드러운 미풍이 살랑거렸다. 가볍게 흩날리는 분홍 꽃잎을 보자 얼굴에 나도 모르는 웃음이 마구 번졌다.
“하여튼 아벨은 참 신기하다니까.”
아벨은 한겨울 속에서 봄을 선물하고 슬라데이체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