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72)

다음 날.

“공녀님!”

대공님의 보좌관 엘이 나를 찾았다.

엘은 오늘도 어김없이 평소 같은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재정 사무관을 대신해서 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여기 공녀님 몫으로 나온 겁니다.”

엘은 싱글벙글 즐거운 미소로, 흰 봉투를 내밀었다.

눈빛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뭐길래 그러지?’

쑥 뽑아보자 작은 통장이 나왔고, 통장을 열자.

“……?!”

마치 장난감 통장같이 느껴질 정도의 비현실적인 숫자가 적혀 있었다.

잔고가 아니라 통장 일련번호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0이 도대체 몇 개야?!’

“앞으로 공녀님께 배당될 예산입니다. 아무쪼록 잘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이건 너무 많아요!

하지만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엘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어, 어쩌지! 어쩌지!’

예산이라고 하지만 이걸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좀 알려주고 가셨어야죠!’

갑자기 내던져진 상황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을 때였다.

벨리알과 쥬테페가 날 찾아왔다.

“도토리. 왜 이렇게 늦어.”

“한참을 기다렸잖아.”

“움……. 구게…….”

가까이 다가온 벨리알은 내 손 위에 살포시 올려진 통장을 보고 말했다.

“음. 하긴 도토라 너도 시작할 때가 됐지.”

“모, 모?!”

“투자 연습.”

투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벨리알이 내 머리를 마구 흩뜨려 놓았다.

“솔직히 다 말아먹어도 돼. 내가 투자한 상단은 매번 망하니까.”

음, 벨리알.

‘그건…… 격려가 아니라, 그냥 안목이 없는 걸로 들리지만…….’

하지만 벨리알이 상처받을 테니 난 그냥 조용히 쓰다듬을 받기로 했다.

그나저나.

“곤데 벨랼 쥬뻬 며 쌀 안 댔는데 투쟈해(그런데 벨리알, 쥬테페, 몇 살 안 됐는데 투자해)?”

“우린 돈 쓰는 방법을 알아야 하니까. 원래 숙제로 일정 금액이 내려와. 최대한 불리는 게 목적이지.”

벨리알과 달리 투자 방면에서는 꽤 여유로워 보이는 쥬테페가 내 손에서 통장을 가져갔다.

쥬테페는 통장을 느긋하게 펼쳐보고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런데 액수가 적은데.”

뭐?! 저 액수가 적다고?!

벨리알도 서둘러 쥬테페의 손에서 내 통장을 확인해 갔다.

그리고 얼굴을 굳혔다.

“뭐야. 지금 도토리가 어리다고 무시한 건가.”

“엄연히 슬라데이체의 딸인데 이 정도의 액수는 너무 적은걸…….”

벨리알이 허리춤에 있는 검을 만지작거리고, 쥬테페의 무표정에 천사 같은 미소가 깃들 즈음.

난 서둘러 두 사람에게 뺏긴 내 통장을 다시 확인했다.

그 사이에 숫자가 달라진 건 아니었다.

“이, 이게 머가 저거(이, 이게 뭐가 적어)!”

아니, 명색에 투자 연습한다면서 물가는 모르면 어떡해!

“이 도니면 별잔, 아니! 저태또 사 쑤 이쏘(이 돈이면 별장, 아니! 저택도 살 수 있어)!”

하지만 손을 붕붕 젓는 소시민인 나와 달리 쥬테페와 벨리알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게……. 별장, 저택이면 푼돈이잖아.”

-라고 말하는 벨리알과.

“고작 그 정도 돈으로 투자하겠다고 하는데 받아주겠다고 하는 곳은 사기야. 그러다간 형처럼 되는 거니까 기억해.”

걱정하는 건지, 벨리알을 욕하는 건지 모를 것 같은 쥬테페와…….

‘내가 돈에 너무 집착하는 걸까.’

아니면 저 두 사람이 너무 돈의 소중함을 모르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통장을 내려다보다 난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비볐다.

[나나 마시멜로 슬라데이체.]

난 그걸 보자마자 마음이 편해졌다.

‘착오구나!’

난 서둘러 벨리알과 쥬테페에게 통장을 내밀었다.

“이고 나나꼬 아냐!”

“뭐?”

“뭐?”

난 통장에 적힌 이름을 콕콕 가리켰다.

‘난 나나지만, 난 미들네임이 없으니까.’

그래. 그래. 생각해 보니 너무 이상했어. 이곳이 슬라데이체고 하지만 네 살에게 이렇게 큰돈을 덥석덥석 맡기는 건 무리가 있지.

“이르미 비스태소 오해 샌교나 바(이름이 비슷해서 오해 생겼나 봐).”

갑자기 큰돈이 있었다 사라진 셈이 되었지만 오히려 마음은 편했다! 난 역시 소시민으로 사는 게 편한 거 같아!

그 이름을 내려다본 벨리알이 눈썹을 찌푸렸다.

“어, 그러-“

하지만 입 밖에 말을 내뱉은 건 쥬테페가 더 빨랐다.

“아니야. 이거 너 거 맞아.”

“잉?”

“어?”

벨리알도, 나도 놀라서 쥬테페를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워하는 벨리알을 흘긋 본 쥬테페는 해명하려 입술을 잠깐 달싹거렸다가 미소를 지었다.

“난 가문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하니까. 형은 처음 들을 거야. 하지만 나나 마시멜로는 네 이름이 맞아. 그렇게 서류상에 통과되었어.”

쥬테페는 그렇게 말하며 눈썹을 까딱였다.

“넌 네 이름도 모르는구나?”

들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아요!

‘억울하다!’

날 놀리는 쥬테페를 통통 두드리려 할 때 벨리알의 굳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벨랼?”

벨리알이 멈칫하며 굳어 있었다.

내 말도 듣지 않고 ‘마시멜로 슬라데이체……’ 하고 중얼거렸다.

“벨랼? 갠차나?”

다시 한번 부르자 벨리알은 흠칫 놀라 나를 바라봤다.

“아니야, 아무것도.”

벨리알은 뭔가 생각난 듯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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