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72)

이번엔 객관식 문제였는데 문제가 200개가 넘어갔다.

‘이거 언제 다 풀어…….’

난 낑낑대며 펜을 움직였다.

애기의 몸이라서 손이 작아 펜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다행히도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예술부터 시작해서 기본 상식, 수학, 사회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쥬테페가 집어준 문제들이 도움이 되었다.

시간이 다 되고 시험 감독관이 내 시험지를 거두어 갔다.

객관식이라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채점이 진행되었는데, 동그라미가 늘어갈수록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대, 대단합니다.”

“이게 어딜 봐서 네다섯의 아이가 풀 수 있는 경지입니까.”

몇 개 틀린 게 있었지만, 대부분의 문제를 맞혔다.

여기서 끝나려면 좋으련만.

“이번 시험은 무효입니다.”

부의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말에, 좌중이 찬물이 부어진 듯 조용해졌다.

“다들 말씀하신 대로 이게 어떻게 어린아이가 풀 수 있는 경지입니까. 1차 시험도, 2차 시험도. 공녀님의 문제 풀이는 지나치게 빨랐지요. 꼭, 외운 걸 즉석에서 적어내는 것처럼.”

확실히……

일리가 없지는 않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래서 의회는 시험 문제 유출을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아니기를 바랐지요. 설마, 공녀님이 그런 일을 하셨을까. 아직 어린데 나쁜 편법을 사용하셨을까.”

부의회장은 안타깝다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그렇게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공녀님 측에서 문제를 훔쳤다는 증거를!”

그 말에 사람들의 소란이 커졌고 한순간에 시선이 쏟아져 내렸다.

난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아냐. 나난 그로지 아나쏘(아냐. 나나 그러지 않았어).”

난 혼란스러운 얼굴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부의회장은 당당하게 말했다.

“공녀님이 아끼는 하녀가 있죠, 소피아라고 했나요? 해당 하녀는 이번 주 주말이 비번이었습니다.”

부의회장이 손뼉을 치자 한 하인이 일정표를 가지고 왔다.

거기에는 소피아가 이번 주 주말에 비번이었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감히 의회 사람과 접촉하여 문제를 빼돌렸습니다. 오늘 아침, 레이먼 자작이 제게 와 고백하더군요. 자신의 시종이 지금까지 공녀님에게 협조하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나오십시오, 자작.”

그러자 의회 사람인 레이먼 자작과 그의 시종이 나왔다.

레이먼 자작은 부끄럽다는 듯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고, 시종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처음에는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소피아 하녀가 약속한 보상이 너무 달콤해…….”

“시종이 뒤에서 이런 짓을 하는 걸 막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누가 봐도 속을 만한 진실한 연기였다.

‘생각보다 제법이네?’

완벽한 함정이었다.

내가 결백하다면, 소피아가 날 조종한 게 된다.

‘소피아는 처벌받고, 난 하녀에게 휘둘린 무능한 입양아가 되겠지.’

소피아가 처벌을 받지 않도록 감싸주면, 내가 주범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한다.

내 평판은 순식간에 곤두박질칠 것이다.

물론 조사 끝에 나중에 내 결백이 밝혀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

내 평판이 회복되는 것보단, 평판이 떨어진 날 부의회장이 쫓아내는 게 빠를 거고.

“공녀님. 이 일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 겁니까? 아니면 저 하녀가 공녀님에게 시험 문제를 유출해 주겠다며 다가왔습니까?”

부의회장이 나를 설득하겠다는 듯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솔직히 대답해 주신다면, 하녀의 처벌에 감안하도록 하겠습니다.”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함정.

피식.

난 부의회장을 보며 그만 볼 수 있게 비웃었다.

부의회장이 내 웃음을 보고 움찔거렸을 때였다.

“저 하녀가 주말에 문제를 빼돌렸다고?”

대공님이 입을 열었다.

“저 하녀가 분명합니다. 제가 저번 주 주말에 만난 건 확실히 저 하녀였습니다!”

“시종이 말한 생김새와 저 하녀의 생김새가 일치합니다. 자작에 찾아와 의회 주변을 둘러보았다던 하녀입니다.”

자작과 자작의 시종이 나서자, 부의회장이 그것 보라는 듯 의기양양하게 턱을 들어 보였다.

바보.

“그건 말도 안 된다.”

반박은 대공님의 입에서 나왔다. 대공님의 미간이 펴질 새가 없었다.

“저 하녀는 당일 계속 대공성 안에 있었거늘.”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그 하녀는 당일, 비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대공의 말에 파란이 일었다.

“소퍄 지베 간다고 했눈데 나나가 자바쏘. 대곤미믄 돈하책 재몁게 읽그니까 구래서 소퍄하테 따라오라고 우겨쏘(소피아가 집에 간다고 했는데, 나나가 잡았어. 대공님은 동화책 재미없게 읽으니까. 그래서 소피아한테 따라오라고 우겼어).”

얼떨떨하게 서 있던 소피아도 자신의 결백을 차분하게 주장했다.

“맞습니다. 저는 그날 비번이었지만 공녀님의 명에 따라 비공식적으로 공녀님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저를 목격한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겁니다.”

소피아가 대공님 옆에 서 있는 호위 기사들을 바라보자 두 호위 기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공녀님의 시중을 든 건 사실입니다. 당시에 대공님 방을 호위 중이었기에 확인했습니다.”

“아!”

좌중에 섞여 있던 가신이 생각났다는 듯 손을 들며 발언했다.

“저도 그날 대공님의 집무를 돕기 위해 방문했다가 해당 하녀가 공녀님의 시중을 들고 있는 걸 목격했습니다.”

“저도 기억합니다! 얼굴이 낮에 익더라니, 그때 그 하녀로군요.”

사람들이 혼란이 가중된 목소리로 서로를 바라보며 말을 하나씩 얹었다.

“그러면 저 증인은 누구입니까? 레이먼 자작의 증언은 대체-”

그 질문에 부의회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내 편으로 돌아섰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였다.

“군데 소퍄 비번 이룬 오또케 아라쏘요(그런데 소피아 비번일은 어떻게 알았어요)?”

난 순진한 척 물었다.

“부으회잔이란 자자기란 하인두 소퍄항테 간심 마나? 나난 소퍄 비버닐 안 무러보면 몰라. 오또케 알지(부의회장이랑 자작이랑 하인도 소피아한테 관심 많아? 나나는 소피아 비번일 안 물어보면 몰라. 어떻게 알지)?”

그러니까 함정을 파려면 제대로 팠어야지.

잘 알아보고.

난 울먹였다.

“먼지 몰게찌만 나나가 잔몬한 고야? 나나가 훙쳐쏘? 구치만 나난 조 사란들 모르눈데(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나가 잘못한 거야? 나나가 훔쳤어? 그치만, 나나는 저 사람들 모르는데)…….”

부의회장 옆에 선 자작과 하인을 보며 말하자, 순식간에 얼굴이 새파래졌다.

“나나가 먄해. 나나 소퍄 대곤밈랑 이쏘는데 부으회잔 말햔 나뿐 찌 오또케 했눈지 모르게쏘(나나가 미안해. 나나 소피아, 대공님이랑 있었는데 부의회장이 말한 나쁜 짓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

완전히 끝이었다.

내가 울먹이자, 내게 호의적인 슬라데이체 사람들이 부의회장을 한꺼번에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3차 시험을 망친 것도 못해, 모함이라니요?”

“저 어린 공녀님에게 무슨 파렴치한 행동입니까?”

난 눈물을 닦는 척하다 부의회장과 시선이 마주쳤다.

메롱.

살짝 혀를 내밀고, 다시 소매로 눈을 훔쳤다.

사람들은 부의회장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동시에, 내 결백이 밝혀짐으로써 난 3차 시험까지도 자력으로 통과한 천재가 되었다.

‘고마워. 내 3차 시험을 부각시켜 줘서.’

입 모양으로 부의회장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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