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아르파드는 서류를 내던지고 한달음에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황후궁과 본궁 사이에는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이 있었다.
아르파드는 만개한 벚꽃 사이로 천천히 걸어오는 중인 아내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몇 번 훌쩍 뛴 그는 우아하게 정원을 가로지르는 아내의 앞에 착지했다.
“세상에!”
시녀들에게 간단한 소풍 바구니를 준비시켜서 천천히 걸어오던 힐리아는 예상치 못한 마중에 꽃처럼 웃었다.
“안 그래도 바쁠 텐데…….”
“당장 달려가고 싶은 걸 애써 참고 있었는데, 당신이 왔다잖아. 어떻게 가만히 있어.”
“그래서 창문으로 뛰어내린 거야?”
아르파드는 키득거리며 힐리아의 귓가에 아주 솔직하게 속삭였다.
“당신이 보고 싶어서 죽기 직전이었거든. 와 줘서 살았어.”
힐리아는 새삼스레 안심되고 행복하다는 걸 절감했다.
비슷한 말을 전혀 다른 어조로 아르파드가 말하는 걸 들은 적 있으니까.
그를 지키겠다며 떠났다가 재회했을 때.
아르파드는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절절하게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의 과장된 투정 섞인 평온한 말일 뿐이다.
“오늘 아침에도 내가 깨는 거 기다려서 인사하고 가 놓고는.”
“그거로는 모자라. 종일 함께해도, 꿈속까지 따라가도 부족하다고.”
아르파드는 어린아이처럼 응석을 부리며, 힐리아를 끌어안고 어깨에 제 뺨을 기댔다.
남편의 드문 애교에 힐리아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제 아르파드가 힐리아 앞에서만 보이는 기행에 궁인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즉위 후 약 3개월이 지났다. 게다가 궁인 중 측근들은 황태자궁 출신이 많았다.
아르파드의 팔불출 짓에는 이골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궁인들은 하나같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평온을 지켰다.
자신의 어깨에 뺨을 비비는 남편의 애교에 힐리아는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역시 나도 정무를 돕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은 황후의 정무까지 당신이 거의 다 보고 있잖아.”
거기에 보좌관 중 가장 선임인 율켄까지 자리를 비워 아르파드는 더더욱 격무에 시달렸다.
그 말에 아르파드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돼.”
지금 힐리아가 정무에서 손을 떼고 있는 데에는 아르파드의 주장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임신 초기에 황궁에서 도망쳐서 지나치게 고생한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대관식을 치른 직후에 황궁에서 한번 쓰러졌던 게 가장 컸다.
임신한 몸으로 여러모로 큰일을 겪은 직후인 데다, 휴식이나 회복할 시간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새벽에 깨어났을 때 힐리아는 쓰러졌던 자신보다 더 안 좋은 얼굴을 한 아르파드를 마주해야 했다.
그는 두 번째로 죽었다가 겨우 살아난 듯한 얼굴이었다.
세 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르파드가 출산 후 3개월까지 정무를 돌려주지 않겠다며 빼앗아 갔을 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파드는 여전히 강경했다.
“내가 다섯 번쯤 쓰러질 때까지는 절대 안 돼.”
아르타누스가 소멸해도 아르파드의 몸에 흐르는 강력한 마력과 힘은 여전했다.
이제 세대를 거듭할수록 드래곤의 혈통도, 권능도 약해지겠지만 아르파드는 예외였다.
일반인을 아득히 뛰어넘는 체력은 여전했으니, 그가 기절할 일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럼에도 힐리아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당신이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걱정돼.”
아르파드는 힐리아가 자신을 평범한 사람을 보듯 걱정하는 걸 아주 좋아했기 때문이다.
“걱정만 해 줘. 물론 나는 끄떡없으니까 조금만. 걱정하다가 당신이나 아기까지 힘든 건 안 되니까.”
힐리아는 살포시 웃으며 아르파드가 더 좋아할 말을 속삭였다.
“그리고 사실… 당신을 보고 싶은데 일에 빼앗긴 것 같아서 슬퍼.”
과연 힐리아가 예측하고 노린 대로, 아르파드의 입매가 흐물흐물 풀어졌다.
그는 투정 어린 말로 대꾸했다.
“당신이 상으로 이렇게 불쌍한 나랑 같이 놀아 주면 돼.”
그렇게 만개한 벚나무 아래에서 황제 부부의 조촐한 소풍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 * *
벚꽃이 무수히 심어진 정원 가운데, 두 사람은 자리를 깔고 앉았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자, 흰꽃잎이 마치 눈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아르파드의 눈에는 마치 나무들이 힐리아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꽃을 떨어뜨리고 있는 듯한 광경이었다.
이 감상을 진심 그대로 표현하자, 힐리아는 또 과장한다면서 까르륵 웃었다.
아르파드는 행복감에 젖은 채 힐리아의 웃음을 보며 점심 바구니를 열었다.
단둘만이라는 기분을 내고 싶었기에 준비해 온 식사도 아주 간단한 거였다.
갓 구운 빵과 버터, 잼, 부드러운 염소젖 치즈와 사슴 고기를 넣은 스튜, 신선한 과일들.
황제 부부의 만찬이라기엔 지나치게 소박하지 않은가 했지만, 아르파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힐리아가 자신을 위해 준비해 온 사실이 가장 중요했고,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게 행복했으니까.
아직 따끈따끈한 스튜 그릇을 보고도 아르파드는 힐리아가 왜 이 메뉴를 골랐는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냄새는 괜찮아? 고기나 생선을 힘들어하면서 이렇게 챙겨 오고…….”
아르파드는 걱정하는 한편으로 바지런히 음식을 차려 놓고, 힐리아의 무릎 위에 냅킨까지 펼쳐 준 뒤에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힐리아가 달빛보다 환하게 웃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왜 그래?”
힐리아는 말없이 입꼬리를 빙그레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입을 아, 하고 벌렸다.
“먹여 줘. 당신이 먹여 주면 맛있을 거 같아.”
드문 응석에 아르파드는 심장을 얻어맞은 것처럼 놀랐다.
조금 허둥지둥하며 스푼으로 스튜를 떠서 아내의 입에 넣어 주었다.
“어때? 입에 맞아?”
임신 극초반보다는 덜 했지만, 아직 입덧이 남아 있는 차였다.
생선은 물론이고, 고기도 먹기 힘들어했기에 아르파드의 걱정은 당연했다.
“응. 맛있어.”
아르파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뻐했다.
“황후궁의 요리장에게 상을 내려야겠군. 당신이 고기를 이렇게 편하게 먹는 건 몇 달 만에 보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바삐 손을 움직였다. 힐리아가 입맛에 맞아 하는 음식을 잔뜩 먹이고 싶어서였다.
다행히도 힐리아는 사슴 고기 스튜를 꿀떡꿀떡 잘 받아먹었다.
그러다 전혀 예상 못 한 말이 귓가를 간질였다.
“맛은 있는데… 그런데 역시 당신이 해 줬던 게 몇 배는 더 맛있어.”
“…?”
잠시 의아해하던 아르파드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아르파드는 힐리아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몇 초 만에 그는 기억해 냈다.
너무 오래 층층이 쌓이고 쌓여, 그 무게로 아르파드의 영혼을 짓눌러 온 기억들.
그 속에 사금처럼 빛나는 순간들의 파편이 섞여 있었다.
아르파드는 진흙탕 속에서 빛나는 순간들을 어렵지 않게 끄집어낼 수 있었다.
완전히 미쳐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였고, 지금의 행복이 가능하게 한 원천이었으며, 영혼을 지탱하는 기둥과도 같은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힐리아는 쑥스럽게 말했다.
“오늘 아침나절에 그때 꿈을 꿨거든. 그랬더니 너무 먹고 싶은 거야.”
잠시 울컥한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보다가 그는 곧 단단한 다정함으로 얼굴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만들어 달라고 하지.”
“바쁜 걸 아는데 어떻게 그래.”
“당신은 그래도 돼. 어디서든, 어떤 때든, 우리가 어디 있든. 제발 그렇게 해 줘.”
“그럼 당신도 그렇게 해 줘.”
힐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박했지만 그들은 추억을 함께 곱씹고 있었기에, 그 어떤 만찬보다 풍요로운 식사였다.
“신기하지. 사실 지금이 몇 배로 호화로운 식사인데, 그때 먹은 게 몇 배로 맛있게 느껴져.”
목 막힐 정도로 마른 보리빵에 퀴퀴한 치즈, 묵은 말린 과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사실 사슴 고기 스튜도 아르파드가 해 줬던 것보다, 황궁의 요리장이 만든 지금 것이 더 호화롭고 정돈된 맛이리라.
그런데도 받아들이는 마음이 달랐다.
아르파드는 고개를 반짝 들었다.
“거기에 함께 가 볼까?”
“응? 어디?”
“그 숲의 오두막.”
힐리아는 놀라서 물었다.
“지금도 존재하는 곳이야?”
“응. 자주 간 곳은 아니지만 원래 내가 준비해 둔 안가 중 하나니까.”
“…!”
힐리아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움이 넘쳐흘렀다. 당시에는 자신이 행복의 가운데 있음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었다.
그때의 추억을 곱씹으면 쌉싸름한 껍질 속에 꿀보다 달콤한 것이 숨어 있다는 걸.
힐리아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꼭 가고 싶어. 가자!”
보랏빛 눈이 행복감과 그리움에 젖어 보석보다 환하게 빛났다.
그리고 힐리아는 추억 속에서 자신이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이번에는 입 밖에 낼 수 있었다.
“이번엔 당신 혼자 바닥에서 자면 안 돼. 꼭 같이 침대에서 자야 해. 사실 그때도 침대로 올라오라고 하고 싶었어.”
“…알아.”
화사하게 쏟아지는 꽃잎의 빗속에서 두 사람은 거듭 입을 맞추었다.
이후 아르파드는 초인적인 힘으로 업무를 일단락 지었다.
그리고 별궁에서 은퇴 생활을 즐기던 상황에게 간곡히 부탁해 대행을 맡기고, 휴가를 떠났다.
휴가의 행선지는 황제 부부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