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아르파드는 드물게 진짜 당황했다.
조금 전까지 자신에게 온갖 악담을 퍼붓던 여자가 갑자기 격렬하게 매달려 오니 당연했다.
말과 행동이 반대로 가는 버릇이라도 있는 건가?
“…뭐 하는 거지?”
그러자 힐리아는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입꼬리가 잘도 말려 올라가 있었다.
“이렇게 꽉 매달리면 당신이 손 놔도 안전할 테니까!”
단순히 바닥에 내동댕이쳐지지 않기 위해 꽉 붙잡은 것뿐이라는 모양이다.
어째선지 아르파드는 그 단순한 발상이 조금 거슬렸다.
자신이 정말 힐리아를 내던질 수 있다는 믿음인지 불신인지 모를 저 확신이 어쩐지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목구멍과 혀에 가시처럼 걸리는 것이 있으니 자연히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힐리아가 이 생각을 안다면 경악하며 비난했을 거다. 단 한 순간도 당신 말은 고왔던 적이 없다면서.
어쨌건 아르파드는 힐리아가 기겁할 말을 내뱉었다.
“그래? 나는 유혹하는 줄 알았지.”
“뭐라고요?!”
진심으로 경악한 목소리가 뒤집어졌다.
그리고 힐리아는 반 박자 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이 남자에게 달라붙어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납치당해 온 이후 이렇게 육체적으로 밀착해 있는 건 처음이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한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납치당할 때를 포함해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유, 유혹이라니……!”
힐리아는 기겁해서 아르파드의 목을 단단히 감고 있던 제 두 팔을 떼어 냈다.
뒤늦게 이러다가 진짜로 바닥을 구를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
하지만 그녀가 손을 떼고도 한참 지나도록 자세는 안정적이었다.
여전히 아르파드는 그녀를 곱게 안고 있었다.
마주 닿은 피부에서는 온기가 선명했고, 기분 좋은 심장의 두근거림마저 전해져 왔다.
놀랍게도, 이 사람도 붉은 피가 흐르는 평범한 남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목적지인 오두막에 도착할 때까지 힐리아는 멍한 표정으로 아르파드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결국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쓸데없이 잘생기긴 했어.’
무슨 짓을 저지른 인간인지, 입만 열면 화가 나서 돌아 버리게 만드는 말만 해대는 인간인지조차 잠시 잊게 된다.
힐리아는 잠시 자신이 이렇게 시각에 약한 인간이었는지 회의감에 빠져 있어야 했다.
잠시 어색해졌던 분위기는 곧 눈 녹듯 사라졌다.
납치 이후부터 한시도 잊은 적 없는 분노와 원망도, 저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던 동안의 정체 모를 술렁거림도.
이 모든 감정과 감상은 깨끗한 물과 식량, 편한 잠자리가 있는 오두막을 보는 순간 저 멀리 달아났기 때문이다.
아르파드는 어울리지 않게 친절하게도 힐리아를 오두막 안의 유일한 침대 위에 깃털처럼 안전하게 내려놓아 주었다.
힐리아는 팔다리를 쭉 늘이며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으아아아!”
솜이 든 침대의 푹신함이 온몸을 감싼 순간, 납치범에 대한 울분도, 정체 모를 설렘도 씻은 듯 사라졌다.
그리고 힐리아의 정신을 빼놓는 감각의 공격이 연이었다.
아르파드는 나무잔에 깨끗한 물을 가득 담아 내밀었다.
힐리아는 감격의 비명을 내뱉을 여유도 없이 벌떡 일어나 물잔에 달려들었다.
허겁지겁 잔을 다섯 번 비우고 나서야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그랬더니 아르파드가 마른 빵과 치즈, 말린 과일을 가져왔다.
이미 물배가 찼음에도 마른 식량들은 입 안에서 마치 설탕처럼 달게 느껴졌다.
“어흐흑! 너무, 너무 맛있어!”
아르파드는 여섯 잔째 물을 건네주며 침착하게 말했다.
“아까 욕하던 거와 완전히 같은 메뉴야. 진짜 미각에 문제가 있는 건 그대 같군.”
“내가 이게 똑같은 메뉴라는 걸 몰라서 이러는 줄 알아요?!”
벌컥 화를 내면서도, 힐리아는 딱딱한 빵을 허겁지겁 씹어 삼켰다.
너무 급하게 먹다 보니 사레들리고 말았다.
“콜록콜록!”
비아냥거릴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아르파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대신 자신 몫의 물 잔을 새로 건네주며 등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그 손길은 정말로 안 어울리게 다정했다.
‘뭐야, 정말.’
당황하고 놀랄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종일 헤매느라 꼬질꼬질하고 피로한 몸을 뜨거운 물로 깨끗하게 씻고 나왔을 때 전혀 예상 못 한 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작은 오두막에 온수로 목욕하는 시설이 있는 것부터 경악스러웠다.
하지만 이어진 아르파드의 태도가 더더욱 놀라웠다.
그는 얇은 무명천에 이름 모를 약초를 담은 뒤 뜨거운 물에 적셔 힐리아를 침대에 앉힌 뒤 붓고 곳곳에 물집 잡힌 발에 대어 주었다.
물집이 잡히고 터진 걸로도 모자라, 왼쪽 발목은 접질러서 퉁퉁 부은 상태였다.
허브향이 감도는 따끈따끈한 찜질이 닿자, 말 그대로 발이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그대로 흐물흐물해질 뻔하다가 겨우 정신을 붙잡고 뾰족하게 말할 수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이런 건 어떻게 할 줄 알아요?”
치료해 줄 의사나 약사, 시중을 들어줄 시종 따윈 없으니 아르파드가 직접 한 걸 텐데 말이다.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그다지 곱게 크지 않아서 말이지.”
“…….”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남자는 평소와는 머리 위치가 달랐다.
늘 재수 없고 고압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이지만 아래쪽에서 올려 보고 있었다.
낯선 각도.
술렁거리며 솟아오르려는 낯선 기분을 힐리아는 꾹 눌렀다.
‘미쳤나 봐, 힐리아 델핀.’
이 인간이 무슨 짓을 했는데.
이건 자신이 지나치게 피곤하고 힘들어서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 * *
다음 날.
죽은 듯 자다가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눈을 떴을 때 오두막엔 혼자뿐이었다.
‘뭐야? 어디 갔어?’
아르파드가 없는 걸 확인한 순간, 떠오른 생각은 이거였다.
‘도망칠까?’
발을 봤다. 붓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식탁에 쌓인 빵과 말린 과일, 커다란 물병이 보였다.
식탁보에 싸 들고 가서 아껴 먹으면 며칠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곧 힐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길을 잃고 헤매면 결국 똑같은 결과뿐이다.
그러던 때였다.
문이 열리고, 커다란 남자가 들어섰다.
바닥에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꺄아아악!!!”
힐리아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확인하자, 아르파드가 짊어진 게 사슴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죽은 짐승을 보는 건, 그것도 피를 뚝뚝 떨어뜨리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뭐, 뭐예요? 날 협박하기라도 하려는 거예요?”
사슴을 바닥에 내려놓은 아르파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굳이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아르파드는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이 쓸데없이 잘생긴 남자는 웃을 때 너무나도 재수가 없었다.
“내가 집을 비웠는데도 안 도망갔는데 말이야.”
“이익! 안 도망간 거 아니거든요? 확실한 계획을 세우고 있을 뿐이거든?”
“어제 한 약속과 완전히 다른 거 아나? 도망 안 친다며.”
“내가 왜 납치범과 한 말을 지켜야 하는데요?!”
그때 아르파드는 단검을 꺼내 들었다.
힐리아는 어깨를 움츠렸다.
“뭐, 뭐예요?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거예요?”
아르파드는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갸웃했다.
“왜 굳이?”
칼날이 죽은 사슴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어제 그대가 내가 미각치라고 비난하면서, 아내에 대한 대우가 잘못되었다고 한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거든.”
“아내가 아니라, 포로에 대한 대우겠죠.”
그리고 힐리아는 삐뚜름한 자세로 물었다.
“또 불만을 말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이라도 하려는 거예요? 이 사슴처럼 죽여 버리겠다고?”
“그대의 발상은 늘 신기해.”
아르파드는 사슴의 목에 칼을 박아 넣었다. 푹!
“히익! 역시 협박 맞잖아!”
“다시 말하지만 그런 쓸데없는 짓이 아니야. 쓸만한 식재료를 구해 온 것뿐이지.”
아르파드는 능숙하게 사슴을 해체했고, 힐리아는 눈을 가리고도 귀에 들리는 소음에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녀는 몇 시간 후 식탁 위에 오른 사슴 고기 스튜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금 망설이다가 스푼을 입에 넣고는 눈을 더더욱 크게 떴다.
“맛있어?”
아르파드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꼴도 보기 싫은데도, 이상하게 눈을 떼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