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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206화 (외전) (206/210)

외전 1화

외전 1. 의뢰한 적 없는 약탈혼의 경우

분홍빛 입술 사이로 가쁜 숨결이 새어 나왔다.

“하아, 하…….”

여자는 땀이 맺힌 흰 턱을 치켜 올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나뭇잎 사이로 조각난 푸른 하늘이 꼭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았다.

연이어 턱을 내려 좌우로 시선을 돌린다.

생김새의 차이를 전혀 알 수 없는 나무들뿐이다.

전생의 동화에서 얻은 지혜로 도망치면서 길에 쿠키 조각을 뿌렸지만,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덩굴과 나무뿌리들이 탐욕스럽게 쿠키 부스러기를 삼켜 버린 것처럼.

한참 동안 야속한 숲을 노려본 끝에 힐리아는 마침내 현실을 인정했다.

‘길을 잃었어.’

사실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다. 살다 보면 길 정도는 얼마든지 잃게 되니까.

하지만 지금 그녀가 처한 상황은 절대 평범하지도, 일반적이지도 않았다.

걷기도 어려운 원시림에서 길을 잃을 일이 대체 얼마나 있겠는가.

‘게다가… 조난당했을 때 어떻게 길을 찾아야 하는지 따윈 배운 적 없다고!’

델핀 공녀로서의 삶에서도.

그 이전 한국인으로서의 삶에서도.

힐리아는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주저앉았다.

“진짜 죽겠다…….”

농담이 아니다. 힘들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험한 숲에서 몇 시간째 헤맨 건지 가늠이 안 되니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힐리아 델핀의 체력은 3일 굶은 사슴보다 못했다.

사실 오두막에서 도망쳐 나온 지 대략 30분 만에 후회를 시작했었다.

다만 자존심과 오기로 인정하기 싫었을 뿐.

‘그냥 얌전히 있을걸.’

적어도 몸은 편했을 거 아닌가.

숨이 차고, 다리가 욱신거렸다. 매끄럽던 발에는 물집이 잡힌 게 틀림없었다.

힐리아는 헐떡거리면서 바닥에 주저앉아 분노와 좌절을 한참 곱씹었다.

결론은 간단하면서도 기이했다. 분노를 가득 채운 목소리를 내뱉어 누군가를 ‘불렀던’ 것이다.

“나와―!”

풀벌레 소리마저 없는 고요한 숲속으로 가녀린 소녀의 외침이 널리 울려 퍼졌다.

“…….”

하지만 숲은 여전히 고요할 뿐이었다.

어떤 목소리도, 기척도 그녀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굴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힐리아는 더 약이 올라서는 더 크게 외쳤다.

“나오란 말이야! 양심만 팔아먹은 게 아니라 이젠 귀까지 먹은 거야?!”

“…….”

이번에도 대답은 무정한 침묵뿐.

힐리아는 좌절 어린 신음을 깊이 삼켰다.

결국 진 건 그녀였다.

어쩔 수 없었다.

몇 시간을 헤맨 몸은 날개가 푹 젖은 나비보다 지쳐 있었고, 발은 다 까져서 아팠다.

무엇보다… 목마르고 배가 고팠다.

얼마나 배가 고프냐면, 아까 뿌린 쿠키 부스러기가 지금 눈앞에 보이면 핥아먹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다.

배고픔도 갈증도 인간으로서는 절대 거역할 수 없는 본능이다.

‘그래. 나는 그 악당에게 진 게 아니야. 내 체력, 본능과 싸워서 진 거라고.’

힐리아는 그렇게 합리화했다.

큰 효용은 없는 정신 승리였다. 결국 패자가 힐리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승자의 자리에 ‘그 남자’를 순순히 넣어 주기 싫었던 그녀의 마지막 발악에 가까웠다.

머릿속으로는 자기합리화를 하면서도, 힐리아의 입은 매끄럽게 항복의 말을 내뱉었다.

조금 전의 독기는 잊어버린 듯했다.

“알았어요. 내가 졌어요.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어서 나와요. 어차피 다 보고 있으면서… 진짜… 너무해.”

말을 이어 갈수록 목소리가 커지고 분노가 터져 나왔다.

끝에는 거의 악에 받친 악담으로 귀결되었다.

“진짜 성격 나쁜 악당 놈!!!”

그 순간, 힐리아의 욕설인지 부름인지 모를 외침에 겨우 대답이 나왔다.

숲의 나무와 덤불을 마치 커튼처럼 걷으며 발걸음 소리도 없이 우아하게 걸어 나온 한 남자.

그는 눈매를 반달처럼 접었다.

지상의 그 어떤 짐승보다 위험하고 날카로운 붉은 눈동자가 폭력적으로 시선을 잡아끌었다.

길게 자란 백금발이 늘어진 나뭇가지를 우아하게 쓸었다.

“그래. 여기 악당 등장이야.”

힐리아는 이를 갈며 외쳤다.

“아니, 틀렸지! 보통 악당이 아니잖아! 이 납치범!!!”

아르파드 이스트리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너무나도 즐거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한 미소.

“아니, 틀렸어.”

“뭐가 틀리다는 거야? 난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뿐인데!”

힐리아는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아, 이제 와서 당치도 않은 변명이나 말도 안 되는 정당화라도 하려는…….”

아르파드는 힐리아의 말허리를 무정하게 잘랐다.

“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해야 더 정확하지.”

아르파드는 자신이 악당이자 납치범이라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었다.

“악질적인 납치범 악당에 ‘남편’이라는 단어를 잊지 말도록. 나는 그대를 약탈혼 한 남편이니까.”

힐리아의 턱이 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미친놈!”

의뢰한 적 없는 약탈혼을 강제로 당한 힐리아는 몇 번째인지 모를 분노의 비명을 내질렀다.

당연하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 * *

힐리아의 울분 섞인 성토는 꽤 길게 이어졌으나, 끝은 허무했다.

결국 제풀에 지쳐 힐리아는 헐떡거리고 있었으니까.

“다 울었나?”

힐리아는 푹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안 울었거든! 하나도!”

정작 눈가는 발갛게 부어 있고, 두어 방울 투명한 액체가 반짝였지만 아르파드는 그것까지 지적하진 않았다.

그저 상대의 의사를 확인할 뿐.

“더 저항하거나 도망칠 의사가 아직 남아 있나?”

힐리아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없겠냐?!’라는 말을 입술 끝에서 겨우겨우 억눌러 참았다.

‘그랬다간 도주 의사가 사라질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다는 둥 하면서 며칠 밤이라도 새우고도 남을 놈이야.’

정말 미치도록 대답하기 싫었다.

항복하기 싫다. 지기 싫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긴 아무것도 없지만 오두막에는 침대도 있고, 물도 있고, 식량도 있으니까.

전부 힐리아에게 너무나도 간절한 것들이었다.

“…….”

갈등하는 찰나, 아르파드는 몸을 돌렸다.

힐리아는 기겁했다.

“야! 날 버리고 가면 어떡해! 간다고! 탈출 포기한다고요!”

그러자 아르파드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버리고 가는 건 아니니, 그대로 날 따라오면 된다. 그대의 굼벵이 같은 속도를 맞춰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힐리아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가 진짜 걷기 시작하자 다급하게 외쳤다.

“그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럼 왜 그러지?”

그녀는 당당하게 두 팔을 뻗었다.

“나 못 걷겠어요!”

처음으로 아르파드의 눈이 약간의 놀라움으로 커졌다.

“안아 달라고?”

평범한 말이다. 힐리아가 요구한 것을 그대로 읊은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파드의 저음을 통해 표현된 저 말은 아주 이상야릇하게 들렸다.

저도 모르게 뺨이 붉어질 만큼.

“아, 아니! 그게……!”

하지만 저 얄미운 남자는 조금의 감상도, 이상한 생각도 용납하지 않았다.

바로 뒤돌았기 때문이다.

“얌전히 뒤따라오도록 해. 또 미아가 되지 않게 조심하면서.”

힐리아는 기겁해서 외쳤다.

“못 걷는 거 맞다고요! 데려가 줘요! 안 그러면 나 못 돌아가!”

아르파드는 씩 웃으며 고개를 모로 꼬았다.

이제 힐리아에게 제법 익숙해진 웃음이다. 또 최고로 재수 없는 표정이기도 했다.

“표현을 정확하게 해야지.”

한 술 더 떠서 아르파드는 팔짱을 끼고 내려 보았다. 한층 더 재수 없어 보였다.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각도에서도 날카로운 턱선이 지나치게 잘빠져 보였다.

그래서 더 어이없고 짜증이 났다.

“…무슨 표현이요?”

아르파드는 성큼 다가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힐리아와 시선 높이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아르파드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짐짝처럼 들려서 돌아가고 싶은 건지, 아니면 곱게 안겨서 돌아가고 싶은 건지.”

“…….”

“아, 참고로 나는 짐짝은 거꾸로 드는 습관이 있어.”

“그런 습관 있는 인간이 어디 있다는 거예요?!”

아르파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나는 미친놈에 납치범이고, 악취미에 성격 나쁜 그대의 남편이니까.”

“…….”

힐리아의 껄끄러운 침묵에 아르파드는 다시 몸을 돌렸다.

같은 실랑이가 서너 번 반복되고 난 후에야, 힐리아는 겨우 고집을 버렸다.

“에에잇!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안아 줘요!!!”

“명에 따르도록 하지.”

힐리아가 뭐라 더 빈정거리거나 악담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바람처럼 빠르고 가뿐하게 아르파드는 힐리아를 안아 올렸기 때문이다.

“꺅!”

시야가 진탕되고, 순식간에 발이 바닥에서 멀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이 남자의 품에 곱게 안긴 채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너무 놀라서였을까.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두드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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