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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204화 (204/210)

204화

아르파드는 힐리아의 눈가에 투명한 보석처럼 아롱진 눈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조금 전, 그가 인간으로서 한번 죽었다 눈을 뜬 이후 힐리아의 표정은 계속 저 상태였다.

빨개진 눈가에 눈물 몇 방울을 매단 채 억지로 강한 척, 막무가내인 척 가장한다.

하지만 순간순간 나약함과 슬픔, 절망이 울컥울컥 치솟는 것을 참지 못했다. 아르파드는 그 모든 것을 섬세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힐리아는 제 감정을 애써 갈무리한 채 분노와 간절함으로 아르파드를 놓지 않았다.

한번 놓치면 그걸로 끝이 되기라도 할 것처럼 애달프고 절절하게.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지금 그녀가 드러내고 숨기는 모든 감정이 전부 자신을 향한 애정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슬퍼하는 것도, 약해지는 것도, 절망할 뻔한 것도 모두 그를 사랑해서였고.

반대로 이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이겨 내고 강인하게 버티는 이유 역시 그에 대한 사랑이었으므로.

황홀할 정도였다.

흘러넘치는 사랑, 힐리아의 존재로 인한 놀라움과 감동은 신기하리만치 일체의 변화가 없었다.

그 때문에 아르파드는 한번 심장이 멈췄다가 눈을 뜬 이후 자신이 크게 변화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녀에 대한 것 이외의 부분은… 큰 변화는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믿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은 아주 어릴 때부터 주변인에 대한 감상에 이질감을 가진 이였다.

가족처럼 가까운 이들조차 동등한 존재로, 혹은 마음 깊은 곳 선 안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감각이 강화되고 확대된 것에 불과한 느낌이었다.

아마 이대로라면 큰 위화감이나 거부감 없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아르파드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단 한 명의 존재로 인해.

‘힐리아.’

그녀의 노력만 아니었다면.

힐리아는 너무나도 필사적이었다.

그녀는 바위로 스스로를 내던지는 달걀처럼 계속 아르파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커다랗고 두꺼운 껍질이 자신을 둘러싼 듯한 느낌이다.

이 껍질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크고 강렬해서, 그 속에 파묻힌 이전까지의 ‘아르파드’라는 존재는 머지않아 짓눌려 흩어져 버릴지도 몰랐다.

어쩌면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위대함을 가장한 파충류는 사실 이미 그렇게 된 자의 잔해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이 상태를 예리하게 알아본 이가 바로 힐리아였다.

그녀는 크고 두꺼운 껍질 바깥에서 계속해서 두드리며 아르파드를 불렀다.

너무나도 미약한 소리와 충격.

하지만 그건 깊은 곳에 잠든 아르파드에게 분명히 닿았다.

“응. 협박 맞아. 내 아르파드를 전부 내놓으라는 협박.”

“세뇌라고 하면 세뇌라고도 볼 수 있어. 그리고 당신을 빼앗는 것이기도 해. 당신으로부터. 빌어먹을 도마뱀 놈으로부터!”

미약한 자극이었지만, 아르파드는 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시키는 대로, 바라는 대로 기꺼이 휘둘리면서 그녀의 말대로 두꺼운 껍질이 조금씩 무너지고 벗겨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눈물을 가득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는 힐리아의 자수정빛 눈동자가 시야를 가득 채웠을 때.

아름다운 눈동자가 녹아내린 듯한 눈물이 힐리아의 부드러운 눈매를 적시고, 뺨을 타고 흘러 턱에 고였을 때.

아르파드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내밀었다.

흰 턱에 아롱진 눈물을 입술로 거두었다.

이토록 투명하고 영롱한 보석이 무력하게 바닥에 떨어져 사라져 버리는 걸 참을 수 없다는 충동이 일었다.

입술이 턱과 뺨에 닿아, 그녀가 세상에 뿌리려는 애정과 슬픔을 받아 마셨다.

기갈에 찬 짐승처럼 다급하게.

이건 단순한 눈물이 아니었다.

힐리아가 아르파드에게 가진 감정의 결정체나 마찬가지였다.

신부가 자신을 위해 흘린 눈물, 그 모든 애정과 감정의 정수는 아르파드에겐 너무나도 달콤하고 충격적이었다.

몇 방울의 눈물은 아르파드의 입술과 혀만을 적신 게 아니었다.

마치 광증으로 이성을 잃었던 순간에조차 그녀의 체향과 피에 아르파드가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같았다.

힐리아의 애정은, 그 증명은, 언제나 아르파드를 구해 냈다.

몇 번이고.

광증에서든, 혼란으로부터든, 그 무엇에서라도.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기에, 비로소 세상이 온통 봄빛이었다. 향기가 코를 찌르고, 다른 모든 감각이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아르파드는 새삼 알았다.

힐리아 없이 자신이 지금처럼 드래곤이 되기 직전의 단계에 왔다면, 세상은 더없이 무미건조한 것이었으리라.

그녀가 있기에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었다.

“!”

멋대로 그를 감싸고 짓누르려 들던 껍질이 산산조각 났다.

아르파드는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듯한 고양감과 각성을 느꼈다.

분명히 아르파드는 계속 힐리아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순간에 와서야 갑자기 그녀가 주는 감각들이 선명하게 뇌리에 틀어박혔다.

흐려져 있던 시야가 일시에 개인 듯 갇혀 있던 감각과 감정들이 우르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이건 일종의 세례였다.

그를 다시금 ‘힐리아의 아르파드’로 되돌려 주는.

* * *

아르타누스는 당황했다. 그는 절대적인 위치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그러니 그를 진심으로 동요하게 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하물며 단순한 놀라움을 넘어 경악하고 절망하게 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희망이었던 아르파드가 신부 없이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걸 보던 순간에조차 그는 이렇게 절망하지 않았다.

-나의 후계자인 네가 신부를 찾아내 내 자리를 대신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도록.

드래곤이 된 이후 처음 느껴보는 강렬하고 지독한 감정의 홍수였다. 그것도 지극히 부정적이고 끔찍한 것들.

힐리아의 눈물을 모두 거두고, 깊은 키스까지 나눈 뒤 아르파드는 제 신부를 안고 아르타누스를 적의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난 힐리아를 울게 만드는 짓을 절대 할 생각이 없어.”

아르파드는 단 한마디로 아르타누스의 유일한 희망을 박살 냈다.

아르타누스는 육성으로 절규했다.

“아르파드!!!”

아무리 대부분의 힘을 계승자에게 내준 상태라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

그의 의지와 감정만으로도 주변의 마력이 감응하여 움직였다.

아르파드는 도발적인 눈으로 오랜 조상을 올려다보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후계든, 계승이든 딴 데 가서 알아봐, 빌어먹을 도마뱀.”

완성 직전이었던 드래곤으로서의 힘과 격을 스스로 내버린 채,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가며 아르파드가 남긴 말이었다.

순식간에 자신이 아르파드에게 내주었던 힘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아르타누스는 절규했다.

“어째서 이토록이나 잔인한가! 이제 나는 내 신부의 곁으로 가 쉬어야 하건만……!”

절망과 슬픔으로 훌쩍거리고 있던 힐리아는 누구보다 빠르게 자신이 아르파드를 되찾았음을 알았다.

아니, 사실상 빼앗아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름 아닌 저 위대하신 드래곤으로부터.

드래곤의 절규가 계속 이어졌다.

“어찌 이리 잔인한가!”

그녀는 조금 전 처연하게 운 건 완전히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태세를 빠르게 바꿨다. 부러 입꼬리를 날카롭게 끌어올렸다.

자신에게 저주를 걸고 멋대로 이용하려다 결국은 실패한 드래곤을 온 힘을 다해 비웃어 주었다.

악감정과 원한이 쌓일 만큼 쌓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네가 그렇게 내버리고 싶은 자리에 아르파드를 대신 집어넣고, 너는 쏙 빠지려고 한 거잖아. 이 빌어먹을 도마뱀 놈아. 그런데 누가 잔인하다고?!”

힐리아는 말끝에 험한 욕설을 몇 마디 내뱉었다.

아르파드는 그 감정에 백분 공감하면서도, 그녀에게 다정하게 속삭였다.

“저 도마뱀 놈이야 욕을 몇 번을 들어도 싸지만, 이제 조심해야지. 우리 아이가 들을라.”

“아! 미안해, 아가야.”

힐리아는 사건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와중에 착하게 조용히 있어 준 기특한 아이에게 사과했다.

아르파드는 힐리아를 보호하듯 안은 채 드래곤을 향해 차갑게 선언했다.

“힐리아의 말대로야. 결국 넌 너를 대신할 제물을 만들려 한 것뿐. 그런 취급도, 너 같은 운명도 사양하지.”

처절한 절규가 공동을 울렸다.

“크아아아악―!!!”

그건 절망의 울부짖음이었다.

이 와중에도 아르타누스는 이스트리드 공주의 유해를 더없이 소중하게 품고 있었다.

아르파드는 그 모습을 적의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아르타누스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것과 달리, 이스트리드는 죽음을 맞이한 게 분명해 보였다.

“드래곤과 신부가 삶은 함께해도 죽음 이후까지 손을 맞잡을 수 없다면… 더더욱 거절하지. 그렇게 살아도 의미가 없으니까.”

이스트리드의 죽음 이후 가까스로 버텨 온 아르타누스의 삶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사랑하는 여자의 당부가 새삼스레 뇌리를 할퀸다.

“당신이 지켜 줘요. 우리의 아이를. 아이의 아이들이 살아나 갈 세상을…….”

그를 지탱한 건 그녀의 유언을 지키고 있다는 명분.

그리고 언젠가 찾아올 끝이었다.

심장을 잃은 채 거대한 자리에 묶여 버텨 온 세월은 생각보다 잔인하고 끔찍했다.

그런데 드디어 손안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안식이 산산조각 난 순간.

아르타누스는 수백 년 전 이미 벗어났다 믿은 광기가 자신을 잠식하는 걸 느꼈다.

이미 이겨 낸 것이었다.

그가 사랑하고 또 사랑받은 여인이 광증으로부터 그를 해방시켜 주었다.

…정말 그러했던가?

그러했다면 어째서 그녀는 이 지독한 고통과 고독 속에 자신을 버려둔 것인가.

용암처럼 터져 나오는 잔인한 의문 속에서, 드래곤의 외피에 갇힌 홀로 남겨진 사내가 울부짖었다.

사내의 정신은 광기 속에 스스로를 내던졌다.

하지만 수백 년 전과 달리 지금 그를 지옥 속에서 건져내 줄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 * *

“카아아아악―!!!”

위대한 드래곤이라느니, 세계를 지키는 기둥이라느니, 온갖 화려한 수식을 받는 존재가 내뱉었다기엔 지나칠 정도로 날것이고 야만적인 소리였다.

일말의 이성도 없는 그저 짐승의 울부짖음.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조금 전 베네타 시내에서 아르파드가 처리한 가스팔의 파편과 큰 차이가 없었다.

사실상 끔찍하고 지독한 타락이자 전락.

하지만 한 가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잠깐, 당신에게 전해졌던 힘 이제 다 돌아간 거 맞지?”

“…그렇지?”

“그 완전한 드래곤이 미쳐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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