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아득함이 내 온몸을 휘감았다.
발아래에 아무것도 없다는 건 생각보다 엄청나게 두려운 일이었다.
거친 바닷바람이 내 피부를 할퀴고 머리카락을 온통 흐트러뜨리며 지나갔다.
하지만 아찔한 추락이 나를 땅으로 끌어내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귀를 할퀴는 바람 소리를 지우며, 아르파드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물었다.
“정말 자해하려고 한 건 아니면서 왜 이런 짓을 하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나와 함께 허공에 선 남자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그의 말대로였다.
죽으려고 뛰어내린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내 의지가 이토록 강하다는 증명에 가깝다.
“협박인가? 그대가 이러면 내가 막을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잖아. 나도 그대도.”
부아가 터졌다.
“말투가 점점 빌어먹을 도마뱀 닮아 가잖아!”
“…그런가? 아니, 그래? 조심하기로 하지.”
그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아르파드를 협박하기 위한 시위였지, 도박이 될 수 없었다.
그가 절대로 나를 추락하게 두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우리 모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협박 맞아. 내 아르파드를 전부 내놓으라는 협박.”
“…방법을 모르겠다고 했잖아. 나는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거야. 그, 아니, 당신에게 거짓말할 이유가 없어.”
“나도 알아.”
“그런데도 왜?”
나는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바닥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일단 저것부터 치워.”
그곳에서 꿈틀거리는 징그러운 괴물을.
“아까부터 저것을 없애는 것과 내가 부족한 점을 채우는 게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군.”
“모르겠으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해.”
나는 서릿발처럼 말했다.
“내 아르파드가 했을 법한 일을 하면서, 나에게 계속 듣다 보면 되찾을 게 없어도 되찾게 될 테니까.”
“날 세뇌하겠다는 걸로 들리는데.”
“맞아. 세뇌라고 하면 세뇌라고도 볼 수 있어. 그리고 당신을 빼앗는 것이기도 해. 당신으로부터. 빌어먹을 도마뱀 놈으로부터!”
“…….”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아르파드에게 나는 다시금 협박했다.
반드시 통할 수밖에 없는 협박을.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또 뛰어내릴 거야.”
“나는 매번 잡을 수 있어.”
“알아. 그래도 할 거야. 그리고 계속 뛰어내리다 보면, 언젠가 저기서 사람을 잡아먹고 있는 괴물에게 닿을 수도 있겠지.”
“…….”
어설픈 협박은 별 의미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내 목숨까지 걸고 협박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리고 이건 효과가 있으리라 확신하는 부연을 덧붙였다.
“그러면 저건 날 아주 맛있게 먹어치울걸? 가스팔 그 개자식도 날 갖고 싶어 했으니까.”
확신했다.
적어도 지금의 아르파드에게 나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는 그대로일 거라는 걸.
내가 이렇게까지 강하게 원하고 밀어붙인다면, 결국 억지라도 그는 끌려올 수밖에 없었다.
나를 사랑하니까.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에 아르파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 익숙한 표정이다.
내 말이 마음에 안 들 때, 혹은 다른 남자가 내 주변에 있을 때 그가 종종 보이던 표정.
이것만은 그대로였다.
정말로.
순간적으로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그를 끌어안을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결국 아르파드의 입에서 항복의 말이 나왔다.
“…이길 수가 없군.”
그와 함께 아르파드의 몸이 금빛 아우라로 둘러싸였다.
빛은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다.
익숙한 모습을.
‘드래곤!’
아르타누스의 거체보다는 작았지만, 분명한 드래곤의 형태를 띠었고 같은 파장의 마력이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정말로 지금의 아르파드는 거의 드래곤에 가까워 보였다.
드래곤의 마력을 팔다리 다루듯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완전히 드래곤이 된 건 아니야.’
지금의 아르파드가 아르타누스처럼 드래곤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마력을 드래곤의 모습으로 몸에 두른 것뿐.
‘그렇다면 완전한 드래곤이 되기 전에 내가 그를 인간으로 되돌릴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을 거야.’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금 아르파드가 실제 드래곤이건 아니건, 아래에서는 영락없는 금빛 드래곤이 출현한 것으로만 보일 터였다.
멀리 떠 있음에도 사방에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들려왔다.
“드래곤, 드래곤이시다!”
“아르타누스께서 현신하셨다!”
“세상에, 아르타누스시여!”
“살려 주세요!”
사람들의 간절한 외침과 비명은 아르파드에게 조금의 감상도 주지 않는 듯했다.
그야말로 발아래 개미의 외침이 사람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듯.
나는 미약한 아찔함을 느꼈다.
정말 내가 되돌릴 수 있을까. 이렇게 거대한 존재가 되어 버린, 그리고 점점 더 되어 갈 아르파드를.
나의 곁으로.
인간으로.
손안이 긴장과 두려움으로 척척하게 젖어 들었다.
그사이 아르파드는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시장 가장 높은 첨탑 위에 무게감 없이 사뿐히 내려앉은 뒤, 긴 목을 내밀어 가운데에서 사람을 집어삼키고 있는 가스팔의 잔해를 물어뜯었다.
“끼에에에엑―!!!”
이성과 영혼을 잃은 살덩어리는 괴성을 내지르며 저항했으나, 드래곤의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아르파드는 착실하게 내가 바라고 협박한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가스팔과 그 실험체가 뒤엉켜 만들어 낸 거대한 괴물을 산산조각 내고, 마력으로 불태운다.
괴물은 하나가 아니었다. 마치 아메바처럼 부서진 조각 하나하나까지 전부 움직이며 사람을 먹어치우려 들었다.
그걸 일일이 처치하는 건 귀찮았는지, 아르파드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펼쳐서 가볍게 휘둘렀다.
날개에서 작은 금빛의 섬광이 내쏘아졌다.
그것들은 작은 금빛 드래곤의 형상을 띤 채 빠르게 날아갔다.
괴물의 파편들을 향해.
끼에엑! 꾸엑! 카악!
소리의 크기와 높낮이가 제멋대로 울렸다. 작은 괴물의 파편들을 물어뜯어 불태우며 나는 비명이었다.
덕분에 잡아먹힐 뻔했다가 목숨을 구한 사람들, 일부가 먹혔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이들.
몇몇은 아예 삼켜졌다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오기도 했다.
구원받은 이들은 물론, 그 가족들과 지인, 혹은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본 이들조차도 기쁨과 경의감에 첨탑 위에 앉은 드래곤을 우러러보았다.
“감사합니다, 아르타누스 님.”
“우리를 구해 주셨어!”
“만세!”
사람들의 무수한 감사와 추앙이 치솟는다.
이런 걸 보면 아르파드는 사람들의 감사에 감동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의무를 다한 것뿐이라며 자랑하는 한편, 정치적인 이득을 계산했을 거다.
나는 아르파드에게 물었다.
“뭐 느껴지는 거 없어?”
“내가 뭘 느껴야 하나?”
나도 모르게 힘이 빠져 한숨이 흘러나왔다.
계속 마음을 다잡았다.
정말로 내 아르파드의 일부를 영영 잃은 건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되찾을 수 있다고.
안 된다면 약탈이라도 해 오겠다고.
하지만 정말 가능한 일일까?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억누르고 있던 자책과 불안감이 아르파드의 변화 없는 태도에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나는 아르파드를 살리고 싶었던 건데, 도리어 죽이게 된 걸까.’
아르타누스의 저주처럼.
나도 모르게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참지 못하고 터져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황궁에 있을 걸 그랬어. 사실 가기 싫었는데. 옆에 있고 싶었는데. 도망치면서도 매 순간, 보고 싶었는데…….”
애써 버티던 감정이 무너져 눈물로 녹아내렸다.
“그랬으면 이렇게 될 일도…….”
“그건 아니야.”
“…뭐?”
“드래곤의 용언은, 미래의 예언은 어떻게 해도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 하지만 그 과정은, 의미는 다르지.”
나를 위로하는 거라기엔 놀랄 정도로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이런 점이 너무나도 아르파드답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더더욱 서러움과 두려움이 울컥울컥 치솟았다.
아르파드는 그런 건 모른다는 듯 덤덤한 말을 이어 갔다.
“<운명의 서>에 내가 죽어 가고 있을 때, 그대가 날 살리기 위해 찌른다는 부분이 써 있었나?”
“아, 아니.”
“그럼 이건 그대가 만들어 넣고 채워 낸 의미야.”
그는 따스하고 다정한 말을 너무나도 무덤덤하게 이어 갔다.
“문장 하나만으로는 모든 걸 표현하지 못해. 그걸 어떻게 해석하느냐, 덧붙이느냐에 따라 문장의 의미 역시 천차만별로 바뀌어. 결국 아르타누스의 예언도 같은 것이고.”
저 말은 지독한 위안이었고, 동시에 끔찍한 선고였다.
“그대는 필사적으로 날 살리려 했고, 성공했지. 그 결과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거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실패했어.”
“결국 그대는 내가 아르파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당신은 아르파드야. 하지만… 달라. 달라졌어.”
“결국 모든 존재는 변하기 마련이야. 좀 빠르게 변화했다고 해서, 내가 아니게 된 건 아니지.”
아르파드는 환하게 웃었다.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니까.”
지독하게도, 이 순간에마저 저 말은 진심이고 사실이었다.
사방에서 기쁨으로 치솟는 환호성이 축하의 꽃잎처럼 비산했다.
되찾은 삶과 재앙을 피한 것을 기뻐하는 순수한 기쁨.
그 속에서 나는 너무나도 슬프고 또 외로웠다.
끔찍한 상실감과 후회에 휩싸여 있어야 했다.
그때 갑작스러운 힘이 나와 아르파드를 덮쳤다.
“!”
내가 도망쳐 온 땅끝 베테나의 풍경이 지워지며, 깊은 어둠이 우리를 집어삼켰다.
아득한 어지러움이 사방을 흔들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끔찍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르파드가 베네타에서 드러낸 형태보다 두 배 가까이 커다란 금빛의 드래곤.
내 키보다 큰 붉은 세로 동공의 눈.
파충류의 표정을 알아보기는 힘들었으나, 알 수 있었다.
지금 아르타누스는 기쁨을 넘어 희열에 차 있었다.
그게 내 이성을 휙 날아가게 했다.
슬픔과 자책, 상실감마저 잠시 옆으로 치워 놓을 정도로.
나는 드래곤을 향해 삿대질하며 달려갔다.
“내 남자 내놔! 이 빌어먹을 도마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