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신성력이나 마력을 쓰지 못해도 지금 힐리아는 아르타누스의 단검을 불러낼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그녀의 의지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 때문에 본인의 손이 아닌 타인에게 건넬 수도 있었고, 빼앗겼어도 마음만 먹으면 되찾아 올 수 있었다.
드래곤 아르타누스가 왜 그런 방식으로 이 단검을 자신에게 주었는지 힐리아는 비로소 이해했다.
손안에 단단한 감촉이 잡힌다. 이걸 쥘 때마다 힐리아는 늘 꺼림칙하고 불안했다.
사실은 절대 꺼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이 단검을 자주 손에 쥐게 되면, 아르파드를 해칠 확률도 높아지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럴 거라는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칼날이 피처럼 붉게 빛났다.
지금 그녀의 예상이 정확히 맞아 들어갈 거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힐리아가 매달릴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지금 아르파드는 죽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신부’가 이 단검으로 심장을 찌르면, 그렇게 해서 인간으로서의 그를 죽이면…….
‘드래곤으로서 다시 태어난다고 했어.’
인간인 아르파드를 잃고 싶지 않아서, 땅끝까지 도망친 주제에 지금 매달리는 게 이거라니.
자신이 한심해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더는 기댈 수 있는 게 없었다.
‘드래곤이 되든 아니든, 일단 살아 있어야 해!’
인간성을 완전히 잃는다고 해도 자신은 그가 살아 있기를 너무나도 간절히 바랐다.
지금 행하는 행동은 반대였으나, 힐리아가 원하는 것은 같았다.
살리기 위해 그의 심장을 찔렀다.
푹!
칼끝이 살을 찌르는 감촉이 너무나도 선연하고 끔찍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칼날을 깊이 찔러 넣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심장을.
눈을 감지는 않았다. 현실에서 눈 돌릴 수 없었으니까.
‘제대로 안 되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빌어먹을 도마뱀!’
단검은 너무나도 쉽게 사람의 살과 뼈를 가르고 들어갔다.
힐리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칼자루를 쥔 채, 아르파드의 상태를 살폈다.
“아르파드? 괜찮아?”
그의 심장을 찌른 지금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힐리아는 그 외에 어떤 질문도 할 수 없었다.
줄줄 흐르는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사랑하는 남자를 불렀다.
“아르파드, 살아 있는 거지? 응?”
결국 마지막은 절규가 터져 나왔다.
“제발 그렇다고 말해!!!”
동시에 아르파드의 가슴을 꿰뚫은 단검으로부터, 그리고 축 늘어진 육체로부터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 *
베네타의 사람들은 멍하니 부서진 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베네타 성은 바다만큼이나 늘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그 성이 박살 났다.
“지진, 때문인가?”
“아니, 하지만 성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옆이 터졌는데? 지진 난다고 저렇게 돼?”
베네타는 지반이 안정적인 곳이라 지진을 경험한 이들이 적었다.
“설마 전쟁?”
“하지만 다른 나라 군대나 배는 전혀 안 보여!”
혼란과 두려움이 파도처럼 번져 가고 있었다.
“성주님께 가 봐야 하지 않나?”
“글쎄. 내가 듣기로 요즘 성문이 거의 열린 적 없다고 하던데.”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그 와중에 기이한 게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폭발이 일어난 직후, 성에서 시장까지 떨어진 몇몇 파편이 있었다.
크지 않은 파편이었고, 거무튀튀한 색이라 사람들은 목재 등이 타서 날아온 숯이나 재려니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정해진 형태를 가진 물질이 아니었다.
타르나 기름 찌꺼기처럼 기분 나쁘게 물컹거렸다.
파편에 호기심을 가진 젊은 청년 하나가 그것에 돌을 던졌다.
청년의 누이가 옆에서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뭔지 모르니까 함부로 건드리지 마!”
“에이, 모르니까 더 확인해 봐야지.”
던진 돌은 웅덩이 안에 퐁 하고 빠진 듯 사라져 버렸다.
더욱 호기심이 동한 청년은 땔감을 들고 기묘한 물체를 툭툭 쳐 보기 시작했다.
“감촉이 이상한……?”
돌을 맞아도, 건드려도 가만히 있던 부정형의 물체가 갑자기 휙 뒤집혔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가운데가 뱀의 아가리처럼 쫙 갈라져 넓게 펼쳐졌다.
“우왁! 이게 뭐야?!”
남자는 기겁해서 물러났지만, 이미 늦었다.
제 몸을 수십 배로 넓게 늘린 괴물이 마치 어망처럼 청년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리고 포식이 시작되었다.
“아악! 으아아악! 아아아악! 살려 줘!!!”
“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성이 폭발하며 비산한 파편이 떨어진 모든 곳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
재앙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조금 전 폭발 때 날아온 일부 파편만으로도 이 난리가 벌어졌는데, 코어를 잃고 포식 본능만 남은 괴물의 본체가 아르파드로부터 도망쳐 무너진 성벽을 타고 거리로 흘러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글바글 모인 사람들의 머리 위로.
* * *
너무나도 강렬한 빛이 눈을 찔렀지만, 나는 절대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내가 선택한 일과 그 결과를 두 눈으로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보고 싶은 건 사실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아르파드가 다시 달콤한 숨을 내쉬고.
그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아름다운 곡을 연주하며.
그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금 나를 보고 부드럽게 휘어지는 걸.
보고 싶었다.
너무나도.
내 간절한 바람에 답하는 것처럼 거대한 빛은 천천히 아르파드의 안으로 스며들었다.
내가 심장에 찔러 넣은 단검은 빛에 녹아 그의 몸 일부가 되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파드는 여전히 누워서 눈뜨지 않았다.
나는 덜덜 떨며 아르파드의 코에 손등을 대어 보았다.
얕은 숨결이 손끝을 간질인다.
연이어 그의 가슴팍에 귀를 댔다.
두근두근두근…….
규칙적이고 강렬한 소리가 내 귀를 두드렸다.
살아 있었다.
그가 만들어 내는 모든 소리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의 육신은.
지독한 안도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곧 이와 같은, 아니 그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하고 무거운 감정이 머리를 짓눌렀다.
불안감.
아르파드가 정말 눈을 뜰 수 있을까?
일어난다 해도, 내가 아는 아르파드가 맞을까?
“네 의사와 상관없이 때가 되면 너는 아르파드를 죽여 완전케 하리라.”
드래곤의 불길한 예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저 예언은 결국 맞아떨어졌다.
빌어먹을 드래곤의 말대로 내 의지로, 내 손으로 아르파드의 심장을 찔렀으니까.
‘정말 이게 맞는 선택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십, 수백 번을 고민해도 나오는 결과는 같았다.
조금 전의 아르파드는 그대로 두면 수 분 내로 숨이 끊어질 상황이었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무슨 대가를 치른다 해도 그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볼 수 없었다.
불안감과 자책감 어린 복잡한 의문이 머릿속을 울렸다.
‘만일 다시 눈을 뜬 아르파드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대부분 잃은 상태라면?’
‘그 재수 없는 도마뱀이 바라는 대로, 그 도마뱀 같은 상태가 된 거라면 어쩔 거야?’
‘그래서 네가 아는 아르파드라고 볼 수 없다면……?
내 선택에 대한 책망과 힐난이 가슴 속에서 성난 벌떼처럼 일어났다.
그중 가장 통렬한 질문이 서늘하게 가슴을 찔렀다.
‘그러면 또 도망칠 거야? 또 버릴 거야?’
나는 눈물을 삼키면서 마구 고개를 저었다.
“안 버려. 아니, 애초에 한 번도 버린 적 따위 없었어! 내가 어떻게 아르파드를 버려!”
그때 선택은 내가 나를 버린 것에 가까웠다.
아르파드는 나를 두고 자신의 심장이라고 했다.
내가 아르파드를 생각하는 건 조금 달랐다.
그는 내 용기이고 기쁨이며, 행복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그를 살리고 싶었다.
내 행복이나 기쁨보다도 그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세상을 원했다.
나는 모든 생을 돌고 돌아, 지금 이곳까지 단 한 번도 아르파드를 버린 적 없었다.
버릴 수 없었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아르파드의 뺨을 적셨다.
그때 낮은 목소리가 물었다.
“정말이야? 정말 단 한 번도… 날 버린 적 없어?”
죽었다 살아난 인간답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보단 잔뜩 신난 개구쟁이 같았다.
“아르파드!”
“그래. 틀리지 않아. 나의 신부.”
붉은 눈동자가 반달처럼 접힌 눈매 사이로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유달리 짙어진 홍채의 색과 더욱 길게 벌어진 동공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르파드였다.
내가 아는, 나의 아르파드.
나는 억지로 참았던 눈물을 와앙 터뜨리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르파드는 단단한 두 팔로 다시는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감싸 안았다.
* * *
불안과 걱정이 무색하도록 아르파드는 그녀가 아는 그대로였다.
“정말 당신 맞지?”
“맞아. 혹시 아닌 것 같아?”
힐리아는 그가 하는 말과 행동, 몸 곳곳을 꼼꼼히 뜯어봤지만, 자신의 남편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 다행이다!’
지독한 안도감에 다리가 풀릴 뻔했다.
연이어 지독한 자괴감과 수치심이 그녀를 덮쳤다.
‘그럼 나는 대체 왜 베네타까지 도망친 거야? 굳이 이럴 필요도 없었던 거 아니야?’
힐리아의 의문과 수치심은 곧 아르타누스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었다.
‘말을 제대로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빌어먹을 도마뱀!’
그때였다.
힐리아가 성 밖의 상황을 뒤늦게 눈치챘다.
비명과 아비규환.
“저게 뭐야?!”
곧 깨달았다.
아르파드에게 코어를 잃고 남은 가스팔의 육체가 살아남기 위해 생명체의 마력을 갈취하고 있다는 것을.
무고한 사람들이 괴물에게 쫓기고 있었다.
힐리아는 아르파드를 잡고 외쳤다.
“어서 내려가자! 사람들을 구해야지!”
평소의 아르파드라면 바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아무리 비인간적이니 미친 황태자니 하는 말을 들었어도, 그는 황제가 될 몸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럴 능력도 있는 게 아르파드다.
힐리아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 본인이 나섰을 거다.
하지만 전혀 예상 못 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응? 내가 왜?”
“……!”
힐리아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더없이 낯선 표정을 한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