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갑작스럽게 모습이 변화한 가스팔을 보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다름 아닌, 우리가 저자에게 건네준 아르파드의 피 한 방울.
그의 피가 섞인 실험체가 가스팔의 몸 일부가 된 것이다.
가스팔이 변화한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아르파드의 시신으로 만든 실험체와 비슷하게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지금의 가스팔은 아르파드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라 봐도 좋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흉내 낸 괴물을 앞에 둔 아르파드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실린다.
“그렇게 기분 나빠?”
그럴 만도 했다.
세상 최고의 변태 마법사가 자신을 닮은 괴물이 되는 걸 지켜보고 있으니.
기분이 복잡할 수밖에.
하지만 아르파드의 대답은 예상외였다.
“조금 불안하고 두렵군.”
“뭐?”
나는 조금 놀랐다. 불쾌하고 불안한 건 예상했다.
그런데 아르파드 입에서 나와 관련된 것 외에 ‘두렵다’라는 표현이 나온 건 처음이었으니까.
아르파드는 내 두려움을 박살 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하필이면 저놈이 날 닮은 모습이 된 게 짜증 나고 싫어. 그것도 당신 눈앞에서 저러다니. 대놓고 꼬리치는 거잖아.”
“엥?”
저게 나한테 꼬리치는 거라니?
아르파드는 눈매를 반달처럼 접은 채 나를 보며 웃었다. 유달리 예쁘고 고운 얼굴선과 미소였다.
안색도 안 좋고, 한창 전투 중이다 보니 꼬질꼬질한데도 어쩜 이렇게 예쁜지 모르겠다.
아르파드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당신 내 얼굴 좋아하잖아. 아니야?”
아, 이제야 알겠다.
가스팔이 본인을 닮은 모습이 된 게 나를 유혹하려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다는 거구나.
본인의 외모가 나에게 아주 잘 먹힐 거라는 확신이 넘쳐흐르고 있는 게 아주 아르파드다웠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저쪽은 너무 못생겼는걸. 이제 와서 흉내 내 봤자 진짜는 못 이겨. 본판은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러자 아르파드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우리 옆에 구겨져 있던 검은 뱀이 태클을 걸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런 농담이 나오는 건가, 당신들은…….”
“응? 농담 아닌데?”
“힐리아는 내 외모와 관련해서는 농담 안 해.”
우리 부부의 솔직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검은 뱀은 할 말을 잃은 듯했다.
“…….”
* * *
그사이 온몸을 비틀어대던 가스팔의 변화가 마침내 끝났다.
물론, 아르파드는 계속해서 검기를 날리고 있었으나, 가스팔의 몸에서 뻗어 나오는 마력에 전부 막혔다.
그는 천천히 첫발을 내밀었다. 키긱, 기분 나쁜 소음이 바닥을 긁었다.
발은 인간의 형태를 잃었고 단검처럼 길쭉한 발톱이 돋아나 있었다.
발만이 아니었다.
왼팔을 제외한 사지가 전부 비슷한 상태였고, 등 뒤에는 반쪽짜리 날개가 자라 있다.
온몸에는 얼룩덜룩한 금빛 비늘의 흔적이 돋아나 있었다.
제 몸 곳곳을 신기하다는 듯 움직여 보던 가스팔의 붉게 변한 눈동자가 힐리아를 향했다.
“!”
놀랍게도 그의 눈은 전에 없이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거기에 곧 강렬한 열정과 희열, 탐욕이 더해진다.
힐리아는 역겨움과 거부감이 치솟는 걸 참지 못했다.
뒤이어 이어진 눈빛은 익숙했기 때문이다.
아르파드, 혹은 배 속 아이를 보던 탐욕스러운 눈빛.
그리고 회귀 전에는 가스팔이 저런 눈빛으로 힐리아를 본 적 있었다. 용의 신부라는 것을 알고 난 뒤.
“너는 용의 신부야. 그 외에 어떤 표현으로 너 같은 존재를 묘사할 수 있을까…….”
그때처럼, 아니 그때보다도 몇 배는 광기 어린 집착적인 시선으로 지금의 힐리아를 보고 있었다.
아르파드는 가스팔로부터 아내를 지키려는 듯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가스팔은 불만스럽게 말했다.
“신부를 좀 더 보여 줘.”
가스팔의 입에서 나온 한 단어가 아르파드의 심사를 단단히 뒤틀었다.
하지만 그보다 힐리아가 더욱 놀랐다.
‘신부? 지금 나를 신부라고 한 거야?’
힐리아는 얼음이 등줄기를 핥는 듯한 섬뜩함을 느꼈다.
설마 가스팔이 회귀 전의 기억을 되찾기라도 한 건가?
곧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용의 신부가 정말로 존재할 줄 몰랐고, 이렇게 가까이 있었을 줄은 더 몰랐어. 용혈이 직접 흐르는 몸이 되어서 보니 확신할 수 있어. 너는 용의 신부였군. 그래서 황태자가 그렇게 아낀 거였나.”
가스팔은 힐리아에게 ‘용의 신부’라는 존재를 처음 알려 준 사람이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도 이미 드래곤에 대해 연구하면서, 특히 아르타누스와 이스트리드의 관계를 보고 ‘용의 신부’라는 존재가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을 만들어 낸 자였다.
직접 용혈을 몸에 받아들인 지금, 그가 깨닫게 되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끔찍한 일이긴 하지만.
“내가 늘 생각해 왔던 가설이 사실이라는 걸 직접 몸으로 증명할 수 있게 되다니, 최고야.”
가스팔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넘치는 희열을 감당 못 하겠다는 듯.
힐리아가 아르파드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명백한 거부감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르파드는 힐리아의 두려움을 눈치채고 부러 거칠게 나섰다. 아니,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본인의 불쾌감과 질투심을 표현하는 데에 힐리아가 등을 밀어준 격이었다.
불꽃처럼 피어오른 오러가 가스팔의 하관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가스팔은 반쪽뿐인 날개를 펼쳐 검기를 막아 냈다.
카가각―!
쇠끼리 서로를 깎아 내는 듯한 소음.
“그 입부터 잘라 내 줘야겠군. 남의 아내를 감히 신부 운운하다니.”
가스팔은 찢어진 피막 아래에서 기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야 ‘나의’ 신부이기도 하니까.”
“…!”
이건 말이 안 된다.
분명히 아르타누스는 신부와 드래곤은 1대 1의 관계라고 했다.
힐리아가 아르파드의 신부라면 다른 드래곤의 신부는 될 수 없다고.
그런데 어떻게……?
그때 힐리아와 아르파드는 거의 동시에 한 가지 사실을 떠올랐다.
‘설마……!’
그들이 가스팔을 이용하기 위해 내줬던 아르파드의 피 한 방울.
분명히 지금 괴물로 변한 가스팔의 몸에는 아르파드의 피가 포함되어 있을 거다.
그 영향으로 가스팔이 힐리아를 신부라 인식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최악이다.’
그때 가스팔이 희열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평생 이 손으로 완전한 드래곤을 만들어 내는 것에만 집착해 왔는데, 이런 즐거움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어.”
그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있었지만, 대치 중인 이들로서는 대체 뭐가 즐겁다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아! 드래곤은 이런 시선으로, 그리고 또 이런 정신으로 세상을 보는 거였군! 그래! 사실 어떤 존재에 관해 연구하려면 그 당사자가 되는 것보다 좋은 방식은 없지!”
열띤 목소리는 그야말로 인간을 벗어난 광인의 것이었다.
반쪽뿐인 날개가 허공을 갈랐다.
쾅!
거기서 뻗어 나온 충격파가 두 사람을 덮쳤다.
다행히 아르파드가 막아 냈으나, 지금 너무 무리한 상태였다. 잇새로 피가 튀었다.
“컥!”
조금 전 전투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가스팔의 신체가 날아들었다.
카각!
아르파드는 오러를 휘감은 칼날로 겨우 가스팔의 공격을 쳐 냈다.
움직임이 눈에 띄게 정교해졌다.
‘바뀐 몸과 힘에 익숙해지고 있는 건가?’
위력이 조금 전과 전혀 달랐다. 칼날 같은 손톱에 벽이 치즈처럼 으깨졌다.
“힘이 넘쳐흐르는군! 아하핫! 믿어지지 않을 정도야!”
“…너 따위에게는 과분한 힘임에는 분명하지.”
“하지만 불안정해. 직접 느껴보니 선명하게 알겠어. 왜 피가 진한 황족일수록 빨리 미쳐 버렸는지도.”
손과 발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적응하는 듯하던 가스팔이 가장 커다랗게 변화한 오른쪽 팔을 휘둘렀다.
부웅―!
전과는 전혀 다른 위력이 터져 나왔다. 흰 칼날 같은 손톱들이 아르파드의 어깨와 목덜미를 찢어 냈다.
붉은 피가 가스팔의 얼굴 위로 튀었다. 괴물은 기다란 혀를 내밀어 용혈을 마치 감로수처럼 핥았다.
아르파드라고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살이 찢김과 동시에 검을 휘둘러 가스팔의 목을 베려 했다.
하지만.
캉!
맑은소리와 함께 칼이 부러졌다.
“!”
오러가 고갈된 지금 칼날은 그저 무쇠에 불과했다.
불완전하다 해도 용의 비늘을 뚫을 수는 없었다.
“크하하학!”
가스팔의 유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불완전한 꼬리가 날아들어 아르파드를 후려쳤다.
뼈가 드러나 있는 꼬리는 드래곤 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시 한번 피를 뿜으며 아르파드는 사정없이 나동그라졌다.
힐리아의 비명이 울렸다.
“아르파드!”
아르파드를 날리고 둘 사이를 갈라놓듯 끼어든 가스팔이 아직 사람의 형체가 많이 남은 왼손으로 힐리아의 손목을 잡았다.
“이거 놔!”
아르파드에게 달려가려는 그녀의 앞을 날개로 막은 채, 가스팔은 힐리아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댔다.
놀랍고 또 역설적이게도 지금 가스팔은 이 미친 마법사에게서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 적 없는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회귀 전 가스팔이 특별히 여겼던 에반젤린에게도 보인 적 없는 표정.
다른 의미에서 힐리아는 이 표정에 익숙했다.
가스팔이 아니라, 다른 남자가,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가 늘 자신에게 보이는 애정과 미소를 닮았으니까.
“그래, 알겠어. 용혈을 얻은 이후 널 볼 때마다 들던 이 감정이 뭔지.”
소름 돋았다. 절대 듣고 싶지 않았다.
힐리아는 어떻게든 벗어나려 발버둥 쳤으나 전혀 소용없었다.
마치 아르파드의 가면을 뒤집어쓴 것처럼 가스팔이 웃으며 말했다.
“사랑해, 나의 신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고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