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직접적으로 수조 내의 실험체를 공격해도 타격을 주긴 어려울 게 뻔했다.
아르파드가 공격을 날리자 가스팔이 직접 막아설 정도로 저걸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가스팔 본인보다 실험체 방어를 더 단단히 해 두었음이 분명했다.
지금 나나 아르파드의 전력 상태로는 실험체를 부수기 힘들었다.
그때 불현듯 떠오른 게 바로 회귀 전 마탑에서의 기억이었다.
가스팔의 실험체로서 살았던 때의 끔찍한 기억.
그중에서도 가스팔이 육체를 갈아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사건.
“아아. 이런 어이없는 사고로 예비 목숨을 하나 소모하다니. 이건 계산 밖인데…….”
실험체가 폭발한 사고에서 나를 살리기 위해 가스팔이 막아 주었던 그때의 일 말이다.
가스팔은 꽤 입이 가벼운 편이었다. 종종 실험관에 박제된 표본이나 이지가 없는 실험체를 잡고 줄줄줄 말을 늘어놓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의 실험체 중 몇 안 되는 대화가 가능한 나는 아주 좋은 대나무 숲이었을 거다.
덕분에 나는 그 실험체의 폭발 원인에 대해서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분명히 신성력과 마력을 함께 적용한 실험체이기 때문에 그런 폭발이 일어난다고 했어.’
서로 반발하는 두 힘을 하나의 육체 안에 넣으니 조금이라도 균형이 무너지면 큰 충격이 발생하는 것이다.
실험체는 당연히 산산조각 나고, 주변까지 다 쓸어 버릴 정도로.
이를 바탕으로 온갖 정성과 자원을 들였음이 분명한 저 실험체가 그렇게 된다면?
‘지금 이 공간을 둘러싼 결계를 부수고, 가스팔에게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거야.’
사실 가장 중요하고 유효한 것은 가스팔의 정신에 충격을 줘서 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눈앞에서 배우자나 아이가 살해당하는 걸 본 수준의 충격과 고통을 가스팔이 느낄 테니까.
이건 복수 겸 우리의 탈출 방법으로서도 아주 효과적일 거다.
내가 세운 계획은 간단했다.
‘외부 공간의 마력 흐름을 불안정하게 해서, 실험체 내부 균형을 깨뜨리는 거지!’
그때의 기억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가스팔조차 폭발 사고가 한번 난 이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가스팔은 신성력을 실험에 응용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거다.
게다가 나와 아르파드 때문에 안정적인 실험을 꾸준히 이어 갈 환경도 되지 않았다.
당연히 이 사실은 알지 못할 게 분명했다.
마력의 흐름을 가장 효과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은 바로 전투였다.
그것도 마법과 오러가 부딪치는.
나는 아르파드에게 부탁해서 최대한 지하실 내부 마력의 흐름을 어지럽혀 달라고 한 뒤 가스팔의 반응을 보며 확신했다.
‘가스팔은 아직 이 사실을 몰라!’
알았다면 아르파드와 싸우는 상황에 실험체 수조를 옆에 두진 않았을 거다.
아무리 몇 겹의 결계로 보호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주변의 마력 흐름을 최대한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시간을 끌 수 있는 데까지 끌었다.
마침내 원하던 결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수조 안에서 둥둥 떠 있던 실험체가 격렬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몸체 안에서 붉은색을 띤 마력이 맥동하며 점점 거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던 신성력의 영역을 침범했다.
상극인 두 힘은 서로 섞이지 않은 채 끊임없이 회전하며 버티고 있었다.
그 위태로운 균형이 마침내 깨어졌다.
내가 당당하고 통쾌하게 가스팔에게 네 모든 걸 박살 내 주겠다고 선언한 순간.
쩍―!
가스팔은 마치 세상에 금이 가는 걸 들은 듯한 표정으로 뒤돌았다.
아르파드와의 싸움마저도 안중에 없는 듯했다.
“안 돼!”
하지만 그의 깨달음은 너무 늦었다.
그가 수조 내 상황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고, 최대한 주의를 끌며 노력한 결과였다.
균열은 삽시간에 번졌고, 마침내 내부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수조가 박살 났다.
어마어마한 충격이 사방을 휩쓸었다.
콰과광―!!!
* * *
제국 동쪽 끝에 있는 항구 도시 베네타는 오늘도 평화로웠다.
갑자기 용병 길드의 일원들이 도시 내부를 바삐 뒤지고 다닌 일이 있긴 했지만, 그것도 잠잠해졌고.
어제는 부두에서 난데없는 빛이 보여 경악하고 두려워하고, 기적이라며 경배하는 이들이 섞여 복잡하긴 했지만.
이 아슬아슬한 평화가 박살 나는 데에는 전혀 전조가 없었다.
사실 앞의 두 사건은 어찌 보면 큰 사고의 전조였으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한 건 당연했다.
본의 아니게 사고를 일으킨 원인이 된 양측도 이런 상황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건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베네타 시는 영주 성을 가운데에 두고 동서로 뻗어 나간 성하 거리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이 거리에는 동방 교역으로 들어온 문물과 제국의 풍부한 산물이 함께 팔리는 시장이 사시사철 열려 있었다.
제국인은 물론이고, 타 대륙에서 온 사람들까지 늘 우글거리는 번화가였다.
그때 하늘과 땅이 함께 흔들렸다.
쾅! 쿠과광―!
어마어마한 충격이 사방을 강타하고, 소음이 고막을 찢었으며 영주 성에 가까운 건물들의 유리창이 전부 박살 났다.
“꺄악!”
“이게, 이게 뭐야?!”
“살려 줘!”
사람들이 경악과 공포의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이변을 가장 먼저 눈치챈 이들이 있었다.
누군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서, 성에 저게 뭐지?!”
바닥에 납작 엎드리거나 나동그라졌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아비규환의 시장통 위로, 100년 넘게 든든하게 버텨 온 영주 성의 한쪽 벽면이 무너져 구멍 난 것이 보였다.
그 틈새로 무언가 기괴한 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폭발이 일어난 순간, 아르파드는 남은 힘을 모두 사용해 나를 보호했다.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검은 뱀은 어느새 우리 주변으로 와 있었다.
덕분에 그는 폭발의 여파에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충격파가 지나간 뒤.
나는 겨우 정신을 수습해 가스팔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게 부서진 지금, 가스팔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
가스팔은 멍하니 박살 난 수조와 그 안에 1/3가량 남은 실험체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폭발의 여파를 정면으로 받으며 자신의 몸이 넝마가 된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는 부서진 집기와 실험체의 흔적을 하나하나 영혼이 없는 눈으로 확인했다.
곳곳을 훑던 시선이 마침내 나에게 도달했을 때.
나는 경악했다.
“?!”
절망 수준이 아니라, 아예 모든 걸 잃고 빼앗긴 자의 공허하던 눈에 순식간에 생기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정말 아쉽고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실패작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가스팔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부서진 손을 내밀었다.
‘뭐야? 어떻게?!’
가스팔은 환하게 웃으며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을 내주었다.
“최고의 재료들은 아직 남아 있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
미친 마법사의 천진스러운 미소가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깨진 수조 안에 남아 있던 실험체의 흔적이 꿈틀거리며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가스팔을 향해.
수조 안에 남은 것들만이 아니었다.
잘게 부서지고 타 버린 파편들까지도 작은 벌레처럼 꾸물거리며 그 주인을 향해 기어갔다.
나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깨달았다.
‘실험체를 흡수해 힘을 회복하고, 다시 우리를 잡아 실험을 반복하겠다는 소리야!’
그야말로 미친 말.
하지만 가스팔은 그러고도 남을 미친 마법사였고, 그럴 능력이 있었다.
내가 소리 내 말하기도 전에 아르파드 역시 이를 눈치챘다.
얼마 남지 않은 힘을 긁어모아, 검기를 날렸지만 가스팔과 실험체의 합체를 막지는 못했다.
폭발의 여파로 부서지고 타 버린 가스팔의 몸 곳곳을 실험체의 파편이 메웠다.
검기에 잘리고 베인 부분은 순식간에 아물어 붙고, 살점으로 채워졌다.
뿌득, 까드득!
뼈가 부서지고 새로 맞춰지는 소리가 기괴하게 울렸다.
가스팔이 둥글게 허리를 말았다. 마치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그리고 다음 순간.
빠직!
검붉은 살덩어리 사이사이에 금빛 비늘의 흔적이 보이는 비틀린 날개 하나가 가스팔의 등을 뚫고 자라났다.
금빛으로 물든 머리카락과 붉게 채색된 홍채. 인간의 것이던 동공이 세로로 길게 갈라졌다.
인간과 드래곤을 얼기설기 섞어 놓은 듯한 기괴한 형태.
나는 저것과 거의 유사한 것을 이미 본 적 있었다.
‘회귀 전 아르파드의 시체로 만들었던 실험체와 거의 똑같잖아!’
소름이 돋았다.